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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 속의 불-141화 (141/189)

141화

“저주에서 튕겨져 나간 겁니다, 우리는.”

“튕겨져 나갔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저의 <욕망>을 흡수하고부터, 사비나는 다른 사람에게 닿거나 이름을 불러도 저주를 옮기지 않게 되었습니다. 맞지요?”

“어? 응…….”

나자예프는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 여자들의 추격을 피해 사비나를 안고 언덕에서 굴러떨어질 때만 하더라도 어깨부터 팔 전체가 까맣게 물들어 움직일 수가 없었는데, 아페티트의 욕망을 흡수하고부터는 사비나가 그의 이름을 불러도 배가 아프지 않고, 그녀에게 닿아도 검게 물들지 않았다.

“죽음의 화신인 사비나가 가장 절실하게 원했던 건 저주로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욕망>은 그녀의 바람을 들어주었지요.”

토굴 안에서 아페티트가 사비나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는 나자예프도 대충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과 사비나가 눈앞에서 사라진 것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다는 것인가.

나자예프는 도무지 예측을 할 수가 없었다. 형처럼 박식한 것은 아니라도 그 나름대로 잔머리는 잘 굴리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류의 수수께끼에는 영 젬병이었다.

“빙빙 돌리지 말고 본론부터 말해, 아페티트.”

“첫 번째 욕망이 이루어진 다음, 사비나가 두 번째로 욕망할 만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어…….”

사비나가 두 번째로 욕망할 만한 것.

나자예프는 사비나가 무엇을 바라는지 알지 못했다.

그녀를 좋아한다고 말했음에도, 그녀가 형과 첫사랑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음에도, 나자예프는 여전히 사비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다.

그간 겪어서 파악한 바로는 사비나는 솔직하지 못하지만 심성은 무척 다정하고, 평소에는 잘 위축되지만 목표가 생겼을 때는 과감해지고, 자신의 몸은 아끼지 않으면서 타인이 입은 상처에는 진심으로 아파한다는 것 정도일까.

“나와 숙질간이라서…… 우리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으니까, 혈연이 완전히 끊어졌으면 좋겠다고 바란 건가? 설마 그래서 사라진 거야?”

“미쳤습니까, 나자예프?”

아페티트가 떫은 표정을 짓거나 말거나, 경멸하는 눈초리로 정신병자를 보듯 자기를 훑어보거나 말거나, 나자예프는 진심으로 사비나를 걱정했다. 나자예프가 다가가면 밀어내고, 쉽게 자학을 하는 성품으로 보건대 만약 두 사람 사이의 혈연을 끊어야 한다면, 사비나는 나자예프를 죽이기보다는 자신이 사라지는 편을 선택할 것이다.

물론 두 사람의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라면 사비나의 성격상 후자를 택하는 것이 타당한 결론이었으나 전제조건부터가 글러 버린 탓에 나자예프의 합리적 추론은 누구의 동의도 얻지 못했다.

“다른 사람을 저주에 끌어들이기 싫다고 생각했겠지요. 우리…… 아니, 저와 카림을.”

“나는?”

“자, 카림. 생각해 봅시다. 나와 당신이 혹시라도 저주에 휘말릴까 두려워하는 사비나가 바랄 만한 것이 무엇인지를.”

“야, 아페티트. 나는?”

“카림. 떠오르는 소망이 있습니까?”

“야! 나는 갑자기 왜 쏙 빼는데?”

나자예프와 더 이상 말을 섞는 것이 시간 낭비라고 판단했는지, 아페티트는 카림에게 물었다. 카림은 낯설지만 조금은 대화가 통하는 어른과 익숙하지만 한 번도 가까워지고 싶지 않았던 어른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아페티트 쪽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카림이 밟아 메마른 나뭇잎이 버석거리며 부서지는 소리가 꼭 자신의 납작한 자존심이 부서지는 소리처럼 들려, 나자예프는 고통스럽게 신음했다.

물론 아페티트도 카림도 나자예프에게는 시선을 주지 않았다.

“우리가 휘말리면 안 되니까, 떠나야 하는데…… 숲 밖으로는 바로 나갈 수가 없으니까, 숨고 싶어 하지 않을까요?”

“숨바꼭질이라는 말이로군요. 확실히 급박한 상황에서는 유치한 생각이 더 잘 떠오르는 법이니 가능성이 있겠네요.”

“아페티트. 욕망의 주술이 무슨 요술이라도 돼? 우리들 앞에서 뿅 하고 사라졌다가 어딘가에 숨는다는 게 가능한 일이야?”

아페티트는 나자예프의 말을 무시할까 하다가,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한마디만 대답했다.

“욕망의 주술은, 감추는 주술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내보내는 주술이기도 하죠.”

탐욕이란 끝을 모르는 것.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프고, 목표를 이루면 또 그다음을 원하는 까닭에 <흡수하는 것>이라고 여길지도 모르나, 사실 욕망의 주술은 빨아들이는 주술이 아니라 밀어내는 주술이다.

자신이 바라는 것 이외의 모든 현상과 사상을 밀어내고, 그곳에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남겨 놓는 주술.

그래서 욕망을 품고 있는 동안 아페티트는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다.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모든 요소를 밀어낸 탓에, 서쪽 숲에 15년 동안 갇혀 있었음에도 누구도 그를 발견하지 못했다.

또한 우물에서 빠져나와, 제 영역으로 뛰어들어온 사비나가 보고 듣고 느끼던 <현실>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제가 덧씌운 환각만을 남겨 놓을 수 있었다.

그러니 아마 사비나가 이 자리에서 사라지기를 소망했다면, 욕망의 핵은 아페티트와 나자예프, 카림이 사비나를 인지할 수 있는 <감각>을 밀어냈을 것이다. 그래서 보이지도, 들리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것이리라.

“우선은 숲을 빠져나가야 합니다. 감추는 효과가 발동하는 동안은 움직일 수가 없어요. 우리가 이 숲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우리의 감각을 교란하는 주술도 동작을 멈출 겁니다.”

“아페티트. 넌 사비나랑 친하지도 않으면서 그걸 어떻게 확신해?”

“당신도 안 친하잖습니까.”

“나는 친하거든? 우린 더 가까운 사이야!”

“키스도 못 해 봤으면서 무슨.”

아페티트는 코웃음을 치고는 카림을 번쩍 안아 들었다. 갑자기 높아진 시야에 당황하던 카림이 다리를 흔들자, 아페티트는 아이를 거꾸로 둘러업었다.

“반항하지 마십시오, 카림. 전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걸 다룰 때 더 난폭해지거든요.”

“아페티트! 너 방금 뭐라고 그랬어?”

“당신도 빨리 따라오십시오, 나자예프. 사비나는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 파악을 못 하고 있습니다.”

“야, 내 질문에 대답해!”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다고 욕망하면서도, 사비나는 어째서 자신이 이름을 불러도 상대가 병에 걸리지 않는지, 자신에게 닿아도 저주에 물들지 않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니 아마 이 또한 무의식의 발현일 터. 그녀조차도 모르는 욕망을 달래기 위해서는, 그녀가 바라는 것을 추측해서 이루어 주는 수밖에 없다.

세 사람이 숲을 빠져나가면, <타인을 저주에 끌어들이기 싫다>는 사비나의 욕망은 충족되어, 새로운 욕망에 눈을 뜨게 될 테니.

“아페티트! 너 사비나한테 무슨 짓을 했냐고! 이 발정 난 짐승아!”

“듣자듣자 하니 아이 앞에서 못 하는 소리가 없군요. 그런 추접스러운 소리는 로스카옌 앞에서나 지껄이시길.”

“야! 나 원래 말 곱게 하거든? 네가 나를 자꾸…… 헙!”

아페티트에게 거꾸로 매달려 있던 카림이 나자예프의 입을 틀어막고, 다른 쪽 손가락을 입가에 대고 쉿, 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나자예프는 어린아이보다도 냉정하지 못했던 게 조금 창피하기도 하고, 자신이 계속 이 숲에 있으면 사비나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얼굴을 찌푸리고는 조용히 아페티트의 뒤를 따랐다.

***

사비나는 더 이상 빛나지 않는 금줄 목걸이를 주시했다. 마치 이 마을과 콘바야젠 백작가를 잇던 연결고리가 뚝 끊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아버지는 사비나에게 알 수 없는 소리를 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연락이 끊겼다. 사비나가 다시 목걸이를 만져도, 성인의 모습을 부조한 목걸이는 주술도구가 아닌 그저 장식물일 뿐이라는 듯이 가만히 있었다.

“사비나 아가씨. 콘바야젠 백작께서는…….”

“에르잔. 당신이 바라는 미래는 뭔가요?”

“예?”

“훌륭한 기사로서 공훈을 세워서 작위를 받는 것?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위치에 서는 것? 아니면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세상을 여행하는 것?”

사비나가 금줄 목걸이를 쥐고 있는 탓에, 에르잔은 사비나에게 목줄을 잡힌 듯 엉거주춤하게 허리를 구부린 자세였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로부터 눈을 돌리지 못하고, 에르잔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사비나 아가씨. 저는…… 다른 건 바라지 않습니다.”

“그럼 뭘 바라는데요?”

“…….”

에르잔의 눈가가 붉어졌다. 청년은 꿀꺽, 침을 삼키고는 진지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사비나가 아가씨의 곁에 있고 싶습니다. 지금은 그 생각밖에 하지 못하겠습니다.”

“정말이죠?”

에르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답에 만족한 듯 사비나는 발돋움을 해 에르잔에게 가볍게 입을 맞추고, 쥐고 있던 목걸이를 들어 올려 벗겨 냈다.

“나도 그래요, 에르잔.”

“사비나 아가씨?”

목걸이를 벗으면 숲 밖으로 튕겨 나갈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사비나가 목걸이를 벗겨 냈음에도 에르잔은 여전히 사비나의 앞에 서 있었다. 사비나는 에르잔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자신의 목에 금줄 목걸이를 걸었다.

“아버지가 만드는 미래 같은 건 필요 없어.”

에르잔의 금발보다 더, 한낮의 태양보다 더, 목에 걸린 황금빛 목걸이보다 더.

사비나가 빛나게 웃었다.

“내 미래에는 당신만 있으면 돼요.”

늪 속의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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