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그 목걸이를 목에 걸면, 아버지와 소통할 수 있을 거예요.”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는 어떤 장치라도 되어 있는 것일까?
에르잔은 손목에 감았던 목걸이를 풀어 제 목에 걸었다.
잘그락거리는 금줄 목걸이가 소리를 내며 그의 벌어진 옷깃 사이로 모습을 감추었다. 손목에 감고 내내 달려와 체온에 데워진 까닭인지 목걸이는 뜨거웠다.
“에르잔, 어때요?”
“제가 열이 많아서인지, 목걸이가 따뜻합니다.”
“그거 말고는요?”
“죄송합니다, 사비나 아가씨. 저는 잘…….”
주술에 대해 문외한이라서일까. 아니면 자신이 저주를 정화하는 특이 체질이라서일까. 로스카옌 사제가 건네준 목걸이를 걸어도 숲의 출입이 가능하게 되었을 뿐 이상한 힘이 샘솟거나 볼 수 없었던 뭔가를 볼 수 있게 된 건 아니었다. 에르잔은 옷섶에 숨어 있던 목걸이 장식 부분을 끄집어내 손에 쥐었다. 목에 건 장식물을 손으로 쥐고 들어 올린 탓에, 성인의 모습은 거꾸로 매달린 듯한 모양이 되어 있었다.
그러자 돌연, 사비나가 가슴을 감싸며 신음했다.
“아윽!”
“사비나 아가씨? 왜 그러십니까?”
“아, 아니에요! 갑자기 가슴이…… 꺄!”
심장이 욱신거려 몸을 웅크렸을 뿐인데, 에르잔은 사비나가 가슴에 상처를 입은 것으로 착각이라도 했는지 가슴을 가리던 손을 끌어 내리고 옷자락을 벌렸다. 순식간에 맨가슴이 드러나 당황한 사비나와는 달리, 에르잔은 사비나의 몸에 아무런 상처가 없는 것을 보고 한결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외상은 없군요. 사비나 아가씨, 가슴이 답답하십니까?”
“아뇨, 아니에요!”
“증오의 핵은 분명 가시 모양이었지요. 혹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있습니까? 아니면…….”
“에르잔, 에르잔! 잠깐만요. 이거 좀 놓고…….”
사비나가 당황하며 에르잔의 손을 밀어내자, 에르잔은 그제야 제가 사비나의 앞섶을 벌리고 맨가슴을 움켜쥐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무심코……!”
“꺄, 에르잔! 잡아당기지 마세요! 아파……!”
서둘러 손을 거두려 했는데, 힘을 빼지 않은 까닭에 말랑한 가슴을 쥐고 흔드는 결과가 되어 버렸다. 에르잔은 입안을 깨물며 팔을 뒤로 빼고는, 바닥에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로 몸을 낮추었다.
“죄송합니다, 사비나 아가씨. 제가 경황이 없어…… 아, 아니.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잘못했습니다.”
“……내가 섹스하자고 할 때는 안 할 것처럼 굴더니.”
“예, 예?”
“에르잔이 만져 주는 게 좋다고 해서, 이렇게 물건 쥐듯이 쥐어도 괜찮다는 뜻은 아니었거든요?”
사비나는 약간 상기된 뺨을 손등으로 문지르고는 벌어진 앞섶을 도로 여몄다. 풀어 헤쳐진 끈을 엮을 줄 몰라 그냥 잡아당겨 벌어진 틈을 조이기만 한 까닭에 헐거운 옷깃 사이로 앞가슴이 설핏 드러났으나, 에르잔은 그녀의 몸을 보지 않으려 고개를 뻣뻣이 들고 있는 까닭에 창피하지는 않았다.
“사비나 아가씨. 저어…….”
“에르잔이 그 목걸이를 나한테 향하니까, 가슴이 아팠어요.”
“예? 목걸이요?”
목걸이의 장식 부분이 옷 속으로 들어간 탓에 끄집어내 들어 보였을 뿐인데, 사비나는 마치 무언가에 찔린 듯한 통증을 느꼈다. 에르잔이 고개를 숙여 다시 목걸이를 들어 보이자, 사비나가 어깨를 움츠리며 살짝 뒤로 물러났다.
“에르잔. 그거, 나한테 향하게 하지 마세요…….”
“앗, 죄송합니다!”
에르잔이 얼른 손으로 장식물을 가리자, 가슴이 저릿하던 통증이 멈추었다. 사비나는 한결 편한 숨을 내쉬고는, 다시 에르잔에게로 다가갔다.
“로스카옌 신부님이 저주의 균형을 잡고 있다고 말씀하셨잖아요. 혹시 이게…… 앗!”
사비나가 목걸이에 손을 대려 하자, 뭔가 파직 하고 불꽃이 튀며 그녀의 손을 밀어냈다.
“사비나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괜찮아요. 찔린 거 아니에요.”
사비나는 제 손가락을 확인하고, 에르잔이 들고 있는 목걸이를 다시 확인하고는, 손끝을 살며시 장식물에 갖다 대었다. 이번에도 뭔가 따끔한, 정전기와 같은 감각이 일면서 목걸이가 사비나의 손을 밀어냈다.
저주를 튕겨 내는 주술이라도 걸려 있는 것일까. 하지만 아버지의 목걸이에 닿았을 때는 이런 거부반응이 없었다.
‘에르잔의 체질 때문일까? 아니면…….’
입가에 손을 대고 고민하는 사비나의 왼쪽 귀 옆에 에르잔의 손이 와 닿았다. 아무렇게나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흘러내린 것을 살며시 정리해서 귀 뒤로 넘겨 주는 동작에 사비나는 왼쪽 어깨가 살짝 가벼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에르잔. 내 오른쪽도 만져 봐요.”
“예?”
“오른쪽 귀…… 어깨까지.”
사비나가 왼손으로 오른쪽 목 부위를 가리키자, 에르잔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사비나의 귀부터 목선을 거쳐 어깨까지 가볍게 쓰다듬었다. 이번에는 상쾌한 듯한 감각이 흐르면서 몸이 편해졌다.
‘에르잔이 만져 주니까, 안정이 되었어.’
사비나의 몸을 무겁게 가라앉혔던 저주의 주술은 에르잔이 입을 맞춰 주자 가벼워졌고, 뒤집어진 목걸이를 마주했을 때 따끔했던 심장은 에르잔이 그녀의 몸을 만져 주자 진정되었다. 어쩌면 이 목걸이는 단순히 저주를 막아내는 성물이 아니라, 저주를 <통제>하는 물건일지도 모른다.
“에르잔. 나를 안아 줘요.”
“사비나 아가씨?”
“아니, 내가 안길게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비나가 에르잔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에르잔의 덩치가 워낙 큰 까닭에 사비나의 이마가 정확히 목걸이의 끝부분에 닿았다. 사비나는 살며시 발돋움을 해, 성인의 모습을 부조한 장식물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황금빛이었던 목걸이가 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사비나 아가씨? 이건……!”
“쉿. 가만히 있으세요.”
사비나는 목걸이에 어른거리는 붉은 빛을 가만히 주시했다. 일렁이던 빛이 성인의 눈동자 쪽에 모여들더니, 아버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개의 핵을 전부 흡수한 모양이구나, 사비나.]
마치 이제까지 그녀가 해 왔던 일을 전부 지근거리에서 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아버지가 태연하게 말을 걸어왔다.
“아버지…….”
[로스카옌을 통해 이야기는 들었단다. 네게 휴식을 취하게 할 셈으로 보냈는데, 도리어 고생만 시킨 것 같구나.]
“…….”
[하지만 정말 잘해 주었어. 이 아버지는 네가 무척 대견하고, 자랑스럽단다.]
온화한 목소리지만, 그 안에 사비나에 대한 애정이나 걱정은 조금도 담겨 있지 않았다. 사람의 호의를 모를 때에는 아버지의 이 목소리를 다정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사비나도 아버지의 목소리에 실린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친애의 감정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마치 <이렇게 하면 사비나를 내 뜻대로 부릴 수 있다>고 확신하는 듯한 말투.
친절함도 다정함도 호의도 배려도 몰랐던 과거의 사비나는 알아차리지 못했던, 상대를 기만하는 어조.
[황제 폐하의 병에는 아직 차도가 없지만, 내가 대리를 맡으면서 체계를 새로이 잡은 덕분에 일은 문제없이 돌아가고 있단다. 공작 작위를 수여받는 것도 이제 곧이니, 그만 돌아오려무나.]
“아뇨. 안 돌아가요.”
[사비나. 이 아버지의 말을 거역할 참이니?]
그렇다고 말할까 하다가, 사비나는 말을 바꾸었다.
“마을 사람들이 아버지와 제 관계를 알았어요. 카이라트가 보내 주지 않을 거예요.”
[너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사비나.]
사비나를 붙잡은 마을 사람 모두를 죽이고 귀환하라는 뜻이다. 사비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살인을 명령하는 아버지의 태도에 피가 식는 것을 느꼈다.
“나는 더 이상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아요.”
[그래. 네가 싫다면 더는 사람을 죽이지 않아도 된단다.]
뜻밖의 대답에 사비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목걸이를 바라보았다. 전해지는 것은 음성뿐, 모습이 보이는 것은 아닐 텐데도 어쩐지 아버지는 사비나의 표정을 바로 앞에서 보기라도 한 듯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널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니? 네가 싫어하는 일을 억지로 시킬 생각은 없단다.]
“하지만 이제까진…….”
[더는 너를 숨겨 둘 이유도 없지. 네가 내 딸인 것을 공표하고, 앞으로는 공석에도 동행하게 해 주마. 밝은 하늘 아래 떳떳하게 고개를 들고 다녀도 괜찮도록.]
갑자기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사비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회유하면, 사비나가 저를 막는 이들을 죽이고 저택으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하기라도 하는 걸까?
[네가 나의 미래를 만들어 주었으니, 이제부터는 내가 네 미래를 만들어 주겠다.]
***
숲속에서 사비나를 잃어버린 나자예프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분명 앞서가던 사비나의 뒷모습이 보였는데, 아페티트의 등에 잠시 가려진 사이 사비나가 사라졌다.
“아페티트. 사비나를 어떻게 한 거야?”
“제가 한 게 아닙니다.”
“너 때문에 잠깐 사비나를 못 본 사이에, 사비나가 사라졌단 말이야!”
“그러니까 그게 왜 제 탓이 되지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건성으로 흘려듣는 아페티트와, 진심으로 역정을 내는 나자예프를 앞에 두고 카림은 울먹이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내가 누나의 손을 잡고 가야 했는데…… 또 다칠까 봐, 무서워서, 떨어져서 걷는 바람에 누나가 사라졌어.’
카림은 아직 빨갛게 부어 있는 제 손을 내려다보고는 코를 훌쩍거렸다. 아페티트는 그런 카림을 흘끔 쳐다보더니, 나자예프의 머리를 후려쳤다.
“아, 뭐야! 왜 때려!”
“저는 더 이상 욕망의 화신이 아니고, 당신과 카림은 저주에서 벗어났습니다.”
“그게 뭘 어쨌다고. 나도 그 정도는 알거든?”
“우리 눈앞에서 갑자기 사비나가 사라진 까닭이 뭐겠습니까?”
“그걸 내가 어찌 알아!”
고민도 없이 곧바로 대답하는 나자예프를 한심하게 바라보던 아페티트가 카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직 아페티트가 낯설었던 카림은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저주에서 튕겨져 나간 겁니다, 우리는.”
늪 속의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