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 속의 불-139화 (139/189)

139화

“사비나 아가씨, 진정하십시오.”

에르잔은 자신에게 들러붙으려는 사비나를 살며시 밀어내고는, 그녀를 거부하는 것이 아님을 알려 주려는 듯 천천히 어깨를 쓰다듬었다. 사비나는 에르잔의 손이 자신을 밀어냈을 때 조금 딱딱하게 몸을 굳었다가, 그가 진지한 얼굴로 사비나와 눈을 마주하며 어깨를 안아 주자 다시 표정을 풀었다.

“에르잔? 왜…….”

“아가씨. 마지막 저주의 핵을 흡수하면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무슨 일이라니…… 아무 일도 없었어요.”

“아무 일도 없는데 왜 이렇게 변하신 겁니까?”

변했다고? 사비나는 제 모습이 어디가 달라졌나 눈을 굴려 훑어보았다가, 다시 에르잔을 바라보았다. 에르잔의 푸른 눈동자에 비치는 제 얼굴은 익히 알고 있던 모습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에르잔. 나는 변하지 않았어요.”

“아뇨. 아가씨께서는 지금 무척 불안해하고 계십니다.”

“그건 마음이 급해서…… 아버지가 오기 전에, 마을 사람들을 지키려면…….”

“사비나 아가씨. 당신께서는 마을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시간이 멈춰 있던 저주를 흡수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걸 다시 풀어 사람들을 구속하시겠다고요?”

에르잔의 지적에 사비나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창백해진 입술이 파르르 떨리더니, 검은 눈동자가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병사들을 데려오면, 모두 죽을 거예요. 아버지의 정체를 아는 사람들을 살려 둘 리가 없다고요.”

“죽일 생각이었다면 처음부터 그들을 말살했겠지요. 콘바야젠 백작께서는 사비나 아가씨께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라>고 하셨습니다.”

휴식?

그랬다. 아버지는 그녀에게 요양을 할 만한 곳을 찾았다며 이 마을로 사비나와 에르잔을 보냈다.

이 마을에 깃든 저주는 사비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녀의 저주를 더욱 강하게 했으니까.

저주를 흡수하는 와중에 이런저런 사고를 겪고, 의심을 받고, 이렇게 적으로 몰리기까지 했으나 이 마을에서의 생활은 힘들지 않았다. 15년 동안 지하의 돌방에 갇혀 있을 때보다, 이 마을에 와서 겪은 몇 달 동안의 추억이 훨씬 많을 정도니까.

“하지만 아버지가 혼자서 이곳에 올 리가 없잖아요.”

“콘바야젠 백작께서 이곳에 오실 거라고 말씀을 하셨습니까? 누구에게요?”

누구에게?

그것은 모른다. 카이라트는 사비나를 인질로 잡고 있으면 알렉세이가 반드시 찾아올 거라고 말했고, 사비나 또한 아버지의 연락을 받고도 돌아가지 않으면 당연히 찾아오리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어떻게 <연락>을 취하려고 했던 거지?’

이 마을은 외부인의 출입을 거부하는 마을. 사비나와 에르잔을 데려온 마부는 마을 어귀도 아닌, 한참 떨어진 길목에 두 사람을 내려 주고는 되돌아갔다. 15년 동안 마을에 출입한 사람의 흔적이 없다는 것쯤은 이미 이 마을에 처음 들어설 때 눈치채지 않았던가.

“로스카옌 신부님이…… 아버지의 연락을 받았다고 했잖아요. 우리를 안내해 주셨고.”

“로스카옌 신부님께서는 지금 크게 다치셨습니다.”

“네? 신부님이요? 카이라트가 해친 건가요?”

“아닙니다. 어떤 상황인지 살펴보고자 했는데, 아가씨 소식을 듣더니 안색이 변해 제게 이것을 주시면서, 빨리 가라고 호통을 치셔서 바로 숲속으로 들어와 버렸습니다.”

에르잔은 그렇게 말하며 제 손목에 감긴 금줄 목걸이를 보여 주었다. 성인의 모습을 부조한 금줄 목걸이. 아버지가 늘 몸에서 지니고 떼어 놓지 않았던 것과 동일한 목걸이.

로스카옌 사제는 교회에는 으레 모시는 성물로, 모조품은 얼마든지 있다고 말했지만.

저것은 분명 아버지와 로스카엔이 나눠 가진 <주술 도구>임이 분명했다.

나자예프와 바르셀다가 나눠 낀 반지와 마찬가지로.

“에르잔. 그 목걸이, 손에 감고도 아무 일 없었어요? 저주가 옮겨간다거나 하지 않았어요?”

“아닙니다. 몸이 조금 무거워지긴 했지만, 그건 숲의 저항이라고 생각해서…….”

“숲의 저항?”

“목걸이를 받기 전까지, 이 숲에 들어올 수가 없었습니다. 어째서인지 자꾸 튕겨져 나와서…….”

“튕겨져 나왔다고요? 왜요?”

“이 목걸이를 받아들자, 숲은 저를 받아들이고 로스카엔 신부님을 내보냈습니다.”

아무래도 이 숲에는 외부인을 걸러내는 주술이 걸려 있는 것 같다는 에르잔의 설명까지 듣고 나서, 사비나는 비로소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버지가 마을 밖으로 나가려면 <마을 사람>이 아니라 <외부인>으로 여겨져야 하니까…….’

주술도구인 목걸이를 통해 로스카옌을 알렉세이로, 알렉세이를 로스카옌으로 착각하게 함으로써.

알렉세이는 <외부인>이 되어 마을 밖으로 나가고, 로스카옌은 <마을 주민>이 되어 마을을 빠져나갈 수 없게 되었다.

시간을 멈추게 하는 주술의 효력은 알렉세이가 마을 밖, 즉, 주술의 범위를 벗어난 뒤에도 여전히 유효했다. 그 반동을 로스카옌이 대신 받아내고 있었으니.

“그런데 에르잔은 왜 괜찮은 거죠?”

“제가 정화 체질인 것과 연관이 있지 않겠습니까?”

사비나는 눈을 가늘게 하고는, 에르잔의 손목에 걸린 목걸이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이런 마을에서는 아무리 소중히 관리를 한다고 한들 빛이 퇴색해야 마땅할 터인데, 황금빛은 마치 갓 만들어진 듯이 반짝였고 부조된 성인의 모습은 마모된 곳 하나 없이 선명했다. 마치 주술로 인해 그 형상을 유지하는 것과 같이.

로스카옌이 <제물>로서 아버지의 저주를 대신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어떻게 연락을 주고받았던 걸까.

‘이 마을에는 외부인이 들어온 적이 없다고 그랬어. 그런데…… 로스카엔 신부님은 어떻게 아버지에게 나와 에르잔이 이곳에 온다는 이야기를 들은 거지?’

사비나의 머릿속에서 과거의 정보가 빠르게 흩어졌다가 다시 조립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동쪽 첨탑의 지하에 갇혀 있던 바르셀다와 마주쳤을 때, 서쪽 교회에 있어야 할 로스카엔이 바로 나타났던 일이다.

마을의 동쪽과 서쪽은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어, 큰 소리로 불러도 소리가 닿지 않을 만큼 거리가 멀다. 그러니 동쪽 첨탑의 지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서쪽 교회에 있는 로스카옌이 알 리는 전무했다.

그다음으로 떠오른 것은 네나뷔스테에 대해 설명을 할 때였다. 마을의 남쪽 사람들을 모두 그녀가 죽였다고 로스카옌이 말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실제로 마을 사람들을 죽여 업보를 받아들인 것은 그 동생인 자니베크였고, 그로 인해 고슴도치 같은 외형으로 변해 버렸다.

‘네나뷔스테는 로스카엔 신부님을 증오했으니까, 남쪽으로는 가지 못하셨을 텐데…… 어떻게 남쪽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았지?’

아페티트가 있는 교회 창고로 향했을 때, 로스카옌은 부재중이었다. 사비나와 에르잔이 저주의 핵을 흡수하고 폭발에 휘말려 교회 안으로 옮겨졌다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나와 카이라트와 언쟁을 벌이고 있던 무렵 갑자기 되돌아왔다.

‘그때 마을 북쪽에 가 계셨다고 했어. 카림을 통해 페고라와 만날 약속을 하셨다고…….’

나자예프와 함께 사비나를 마을 북쪽에 데려다주었지만, 로스카옌은 사비나가 저주를 흡수하는 것을 지켜보지 않았다. 마치 아무런 문제도 없을 거라고 확신이라도 한 듯, 덤덤한 표정으로 물러났다.

페고라에게 걷어차이고, 카림에게 화상을 입히고, 탑의 지하에서 빠져나왔다가 사람들의 습격을 받고 나자예프와 함께 공동묘지까지 굴러떨어질 줄 알았더라면, 그런 태연한 표정으로 자리를 벗어날 수는 없을 터인데.

로스카옌 사제가 아버지와 한패라면, 사비나를 위험에 처하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반대로 대립하는 위치였다면, 저주의 핵을 흡수한 이후에 사비나가 실수하여 누군가를 다치게 할 수도 있다고 판단해 지켜보고 대비했을 것이다.

“에르잔. 로스카옌 신부님은 누구 편일까요?”

“예?”

“아버지? 카이라트? 그것도 아니면 다른 누군가의 편에 서 계신 걸까요? 나는 로스카옌 신부님의 목적을 모르겠어요. 부상까지 입었다면서,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다면 본인 몸이라도 보호할 방법을 찾았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사비나 아가씨. 로스카옌 신부님은 지금 상황을 전혀 예견하지 못하신 것 같았습니다.”

“그래요?”

에르잔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르잔으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다 죽어 가던 로스카옌의 얼굴에 필사적인 기운이 샘솟던 것을 기억한다. 손톱이 다 깨져 피가 나는데도 엉금엉금 기어 와 에르잔에게 목걸이를 건네주고, 숲 밖으로 튕겨져 나오고서는 제대로 앉지조차 못하는 상태면서 에르잔에게 호통을 쳐 숲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럼 지금 이 상황이 로스카옌 신부님의 예상 밖 사고라는 뜻이네요.”

“적어도 제 눈에는 그렇게 보였습니다.”

로스카옌은 누구의 편일까. 그리고 무엇을 계획하고 있을까.

지금 당장 숲 밖으로 나가 로스카옌을 만나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런 준비 없이 숲을 헤매다가 카이라트가 보낸 정찰대와 마주치기라도 하면 더 문제였다.

그렇다고 이곳에서 시간을 끌면, 연락을 받고도 돌아오지 않는 사비나의 신변에 이상이 생긴 것을 감지한 아버지가 병사들을 끌고 쳐들어올 것이다.

‘가만. 카이라트는 아버지가 내게 연락을 하리라는 걸 어떻게 알고 있었지?’

사비나와 아버지가 나눈 대화는 두 사람밖에 알지 못한다. 처음부터 돌아오는 일정을 정해놓았을 수도 있고, 아예 몇 년 동안 부르지 않을 가능성도 있는데, 카이라트는 마치 사비나가 네 개의 핵을 모두 흡수하면 곧바로 아버지가 그녀를 부를 것이며, 소환에 응하지 않으면 찾아오리라는 것을 확신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수도에 계시는데, 내가 저주의 핵을 흡수했는지 아닌지를 알 방법이 없잖아.’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사비나의 머릿속에 한 가지 사실이 스쳐 지나갔다.

로스카옌이 마을 저주의 핵을 관리하면서, 네 개의 핵의 균형을 맞추고 있다고.

‘설마…….’

사비나는 고개를 들어, 에르잔의 손을 붙잡았다.

“에르잔. 그 목걸이를 목에 걸어 보세요.”

“목에요?”

“네. 착용하는 위치가 같아야 해요.”

나자예프가 그러지 않았던가. 같은 주술도구를 동일한 위치에 착용하면 저주를 옮길 수 있다고.

나자예프와 바르셀다는 각각 엄지와 중지에 금반지를 하고 있었고, 네나뷔스테와 그 동생 자니베크는 동일한 머리핀을 머리에 꽂고 있었다.

“그 목걸이를 목에 걸면, 아버지와 소통할 수 있을 거예요.”

늪 속의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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