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25. 내일이 오지 않도록
비가 내리는 것도 아닌데 숲의 공기가 무겁고 습습했다.
젖은 천이 몸에 들러붙는 느낌과 바닥의 진흙이 발에 끈적하게 달라붙는 느낌이 낯설었다.
꼭 뒤에서 뭔가가 끌어당기는 것 같다고 할까.
에르잔은 주위를 둘러보고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 묘하게 힘이 들었다.
등의 상처는 쓰리지만 피는 멎은 듯했고, 다른 곳에는 상처가 없다.
힘이 빠진 것도, 어디가 아픈 것도 아닌데 걸음이 무거웠다.
에르잔은 제 오른팔에 감긴 금줄 목걸이를 흘끗 보았다가, 다시 주먹을 움켜쥐고 걸음을 내디뎠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들어가려던 나를 계속해서 밀어내던 숲이다. 이 목걸이 덕분에 들어올 수 있게 된 모양이지만 완전하지는 않은 것 같군.’
거부반응이라는 걸까. 목걸이에 걸린 주술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지만, 저주가 통하지 않는 정화 체질인 에르잔이니만큼 로스카옌이 걸고 있을 때보다는 효력이 덜할 것이다.
손목에 감고 휘둘러도 불에 타 사라지지 않는 것을 보면 목걸이에 걸린 것은 <저주>는 아닌 듯했다.
‘로스카옌 신부님께서 이 목걸이를 내게 건네자마자 숲 밖으로 튕겨져 나오셨지…… 출입증 비슷한 건가.’
검은 숲에 걸린 주술이 이방인을 밀어내는 방어막이라는 것은 몰라도, 로스카옌도 자신도 외부인이라는 공통점 정도는 찾을 수 있었다.
에르잔은 목걸이가 풀리지 않도록 한 번 더 손목에 휘감고, 뺨에 들러붙는 나뭇가지를 꺾어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평소였다면 에르잔이 꺾은 가지가 황금빛으로 불타 사라졌을 터인데, 어째서인지 꺾인 나뭇가지는 불타 사라지지 않았다. 에르잔은 메마른 나뭇가지를 발로 밟았다.
진흙 사이에 파묻힌 가지가 꺾이는 소리가 꼭 작은 생물이 짓밟혀 죽어 갈 때 내는 단말마를 닮아, 에르잔은 고개를 숙여 제가 밟은 것이 진짜 나뭇가지가 맞는지 확인하는 번거로움을 거쳐야 했다.
‘숲이 길어. 이상하군. 처음 왔을 때는 이렇게 넓지 않았는데…….’
오딜을 피하기 위해 밤에 몰래 북쪽 숲을 통해 아페티트가 있는 창고로 가던 밤, 에르잔은 이 북쪽 숲을 사비나와 함께 지났다.
나무가 빽빽하기는 했으나 지나다니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고, 잎이 무성해 주위가 잘 보이지 않을 뿐 숲 자체가 그리 넓은 것은 아니었다.
나뭇가지를 꺾으며 지날 때 분명 흔들리는 이파리 사이로 교회 건물이 보일 정도였으니까.
‘지금은 마치 미로에 갇힌 것 같군. 이것도 사비나 아가씨께서 저주를 흡수한 영향인가?’
죽음의 늪에 갇혀 버렸다고 카이라트가 그러지 않았던가. 카이라트의 말을 전부 믿는 것은 아니지만, 저주의 핵을 흡수하고 한참 시간이 흘렀음에도 사비나가 돌아오지 않은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어떤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홀로 떨어져 있던 로스카옌 사제는 사비나가 저주를 흡수하다가 폭주한 것도, 나자예프가 죽은 것도 전혀 모르는 듯했다.
‘그럼 지금 사비나 아가씨의 곁에는 아무도 없다는 뜻인데…….’
더는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다고 울던 사비나의 얼굴이 어렴풋이 스쳐 지나갔다. 자신을 괴물 보듯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저주를 거두어들이기 위해 위험 속으로 뛰어들던 그녀의 모습이 잊히지 않았다. 칼에 베이고 가시에 찔려 피를 흘리면서도, 호위기사인 에르잔이 무사한지를 확인하고 안도하던 표정을 떠올리자 가슴이 욱신 아파 왔다.
자신이 다칠지언정, 다른 누구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이 마을의 저주를 모두 떠안으려 한 것일 텐데.
그것이 잘못되어 다른 이들을 위험에 처하게 만들고, 나자예프까지 죽어 버렸다면 사비나가 느끼는 상실감과 허무함은 얼마나 클 것인가.
그리고 그렇게 절망하는 그녀의 곁에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두려움으로 다가올 것인가.
‘아가씨의 곁에는 내가 있어야 해.’
할 수 있는 것이 없어도, 도움이 되지 않아도, 그래도 사비나의 곁에 있겠다고 맹세했다.
사비나가 오지 말라고 해도, 돌아가라고 해도, 차라리 다른 사람을 불러오라고 애원해도 듣지 않을 각오로 뛰어들어온 것이 아닌가. 에르잔은 후우, 크게 숨을 들이켜고는 큰 소리로 사비나를 불렀다.
“사비나 아가씨!”
숲은 어둡고, 습하고, 넓었다. 큰 소리를 내면 밖에 있던 누군가가 에르잔이 숲속에 있음을 알고 붙잡으러 들어오겠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사비나를 찾는 것이 우선이었다. 제 위치를 노출하는 한이 있더라도, 사비나가 들을 수 있을 만큼 큰 소리로 그녀를 불러야 했다.
“사비나 아가씨, 어디 계십니까? 제 목소리가 들리십니까?”
에르잔의 목소리가 검은 숲속에 메아리쳤다. 소리가 울릴 정도로 이 숲이 넓었던가. 에르잔은 초조한 표정으로 다시 소리를 높였다.
“사비나 아가씨, 대답해 주십시오!”
숲의 끝에서 끝까지, 우거진 나뭇잎 사이를 뚫고 저 먼 하늘까지 닿도록, 에르잔이 큰 소리로 사비나를 불렀다.
간절함이 닿은 것일까, 아니면 이것도 주술로 인한 어떤 작용일까, 오른팔이 당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금줄 목걸이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사비나 아가씨!”
바사삭.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나뭇가지의 잎사귀가 후드득 떨어졌다. 삽시간에 시야가 뻥 뚫려 버린 자리에 검은 인영이 있었다. 검은 머리가 헝클어져 얼굴을 다 가리고 있었지만, 사랑하는 여자가 쓰러진 모습을 알아보지 못할 만큼 에르잔은 둔하지 않았다.
“아가씨, 사비나 아가씨!”
이름을 부르며 달려가자, 시체처럼 늘어져 있던 사비나의 몸이 에르잔의 목소리에 반응한 듯 움찔 떨렸다. 늪에 잠겨 있다고 들었는데, 카이라트의 거짓말이었을까? 에르잔은 서둘러 다가가 사비나의 몸을 안아 일으켰다.
흙먼지로 지저분해진 옷자락이 피부를 스치지 않도록 조심해서 정리한 뒤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주자, 사비나의 눈이 깜박였다. 긴 속눈썹 아래서 초점을 잃어가던 검은 눈에 빛이 돌아왔다.
“사비나 아가씨, 정신이 드십니까?”
“에르잔…….”
목소리는 작았으나 아픈 것은 아닌 듯했다. 에르잔은 사비나의 몸 상태를 살폈다. 옷차림이 지저분해 눈치채지 못했는데, 그녀의 팔에 상처가 나 있었다. 칼에 베인 듯한 상흔이었다. 더는 피가 흐르지 않지만 아직 아물지 않은 것으로 보아 상처가 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 같았다.
“사비나 아가씨, 팔을 다치셨습니까? 다른 곳은 괜찮으십니까?”
“에르잔, 키스…….”
“예?”
“키스해 줘요.”
숲에서 쓰러진 그녀를 겨우 발견했다 싶더니만, 사비나가 전혀 예상치도 못한 요구를 해온 까닭에 에르잔의 눈이 크게 떠졌다. 사비나는 천천히 눈을 깜박이더니, 붉은 혀를 내밀어 입가를 핥았다.
“나랑 키스하기 싫어요?”
“예? 아니, 저…… 아, 아닙니다!”
갑자기 왜 이런 요구를 해 오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사비나가 원하고 있다. 에르잔은 사비나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어 상체를 고정한 뒤,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제 것을 겹쳤다. 부드럽고 촉촉한 입술에는 온기가 없었다. 가벼운 입맞춤을 마치고 에르잔이 고개를 들려는데, 사비나가 팔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아, 아가씨?”
“지금 섹스하면 안 되겠죠?”
“예에?”
자신이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귀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에르잔이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바라보자, 사비나는 조금 아쉬운 듯이 입맛을 다시면서 에르잔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럼 키스 한 번만 더.”
“사비나 아가씨, 지금 이러실 때가…….”
“하고 싶어요.”
가느다란 손가락이 에르잔의 뺨에 와 닿더니, 사비나의 입술이 에르잔의 입술을 빨아들였다. 갑작스런 그녀의 요구에 당황하면서도, 에르잔은 차마 사비나를 밀어내지 못하고 난감한 듯이 눈만 굴렸다.
꼭 사탕을 빨듯 쪽쪽거리며 에르잔의 입술을 빨던 사비나가 단 한숨을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상황 파악을 못 하는 에르잔의 표정이 우습다는 듯,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에르잔. 난 당신을 원해요.”
“사비나 아가씨. 저, 지금은…….”
“계속 움직일 수 없었는데, 당신과 닿으니까…… 내 욕망이 움직였어.”
욕망이라니, 욕망의 핵을 말하는 것일까.
에르잔과의 키스 덕분에 기운을 차린 듯, 사비나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에르잔은 그녀가 혹시라도 넘어지지 않도록 지지해 주려 했으나, 사비나는 등을 지지하던 에르잔의 팔을 앞으로 잡아끌었다. 손바닥에 닿는 가슴의 부드러운 감촉에 에르잔의 얼굴이 바로 붉어졌다.
“에르잔도 아주 생각이 없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예? 아니, 저…… 아, 아가씨…….”
“……한다고 해소가 되지는 않을 것 같아. 그렇죠?”
사비나가 씁쓸하게 웃으며 에르잔의 가슴에 얼굴을 부볐다. 대체 왜 이러는 걸까. 에르잔은 사비나의 행동에 당황하면서도 그녀가 크게 다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처음엔 차가웠던 몸에 점점 온기가 돌아오고, 심장이 뛰는 소리도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사비나 아가씨.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씀해주시지 않겠습니까? 저는 카이라트로부터, 아가씨께서 저주를 흡수하다가 위험에 처하셨다는 말을 듣고…….”
“카이라트가요?”
“예. 나자예프가 저주에 삼켜져 목숨을 잃는 바람에 다른 사람들을 이끌고 숲 너머로 대피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걱정이 되어…….”
“나자예프는 죽지 않았어요. 아페티트와 카림과 함께 있었는걸.”
“아페티트가요? 아페티트의 행방을 알 수 없다고 들었습니다만…….”
거기까지 말하고는, 에르잔은 카이라트가 제게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주의 늪도, 나자예프의 죽음도, 아페티트의 실종도 무엇 하나 근거 없는 말이 아니었던가. 사비나가 숲에 갇혀 있다는 것 외에는 맞는 말이 하나도 없었다. 애당초 그런 일이 있었다면 함께 나섰던 로스카옌이 전혀 모를 리가 없는 것을.
“사비나 아가씨. 아무래도 카이라트가 뭔가를 꾸미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 그럴 거예요. 카이라트는 아버지를 이곳에 소환하는 게 목적이니까.”
“아버지…… 콘바야젠 백작을요?”
카이라트는 알렉세이를 불러 무엇을 할 생각일까. 복수를 하려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마을 주민일 때라면 모를까, 귀족을 상대로 이 다 무너져가는 마을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병사들을 이끌고 와 다시금 이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 수도 있을 터인데,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서도 알렉세이를 부르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에르잔. 이 마을의 시간을 다시 멈춰야 해요. 누구도 침입할 수 없도록.”
늪 속의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