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마치 커다란 짐승이 후려친 것처럼 카이라트의 어깨에서 가슴까지 네 개의 세로줄이 그어졌다.
살벌한 소리에 비해 피는 크게 튀지 않았으나 그 자리의 모두가 새하얗게 질린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갑작스럽게 공격을 받은 카이라트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걸레짝처럼 찢겨진 어깻죽지에서 그제야 붉은 피가 서서히 번지기 시작했다.
“네나뷔스테…… 지금, 무슨…….”
“카이라트, 네가 그 여자를 붙잡았는데 호위기사는 놓쳤다면서?”
녹이 슬어서인지, 아니면 피가 묻어서인지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붉은색으로 얼룩덜룩 뒤덮인 갈퀴를 한쪽 어깨에 둘러메며, 네나뷔스테가 고개를 까딱했다.
“너 같은 놈한테 지휘는 못 맡겨.”
“그게, 무슨…….”
제 어린 동생들을 비좁은 관에 밀어 넣고 쇠사슬로 칭칭 감는 것이 학대나 다름없다는 사실은 네나뷔스테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네 개의 관을 공터에 늘어놓은 뒤,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온종일 지키고 있었던 이유는 <만에 하나의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항상 예민하게 신경을 곤두세우며 동생들을 지켰음에도 알마즈를 잃고 말았다. 사방에서 나타나는 적을 쫓아낼 수 있어도, 땅속까지 살필 재주는 없었으니까.
카이라트의 말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믿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카이라트의 말이 꼭 진실이 아니라도 상관없었다.
사비나가 정말로 알렉세이의 딸이든 아니든, 이 마을을 엉망으로 만든 알렉세이가 다시금 자기 딸을 이용해 마을을 저주로 뒤덮든 아니든,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다.
시간이 멈춘 저주에서 벗어났음에도 여전히 위험 요소가 남아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위험 요소>를 감당하기에, 살아남은 마을 사람들은 대다수가 지극히 평범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카이라트, 너. 다른 사람들을 앞세워 놓고 제일 뒤에 있었지?”
네나뷔스테는 어깨를 감싸쥔 채 몸을 웅크리고 헉헉거리는 카이라트를 발로 밀어 고꾸라뜨렸다.
“네나뷔스테!”
“뭐 하는 거야? 너 지금 같은 마을 사람을……!”
아무리 네나뷔스테의 성정이 불같다고 한들 그녀는 나자예프 같은 인간말종이 아니었다.
목숨을 위협당한 것도 아닌데 카이라트를 갈퀴로 인정사정없이 그어 버린 데다 부상자를 발로 걷어차는 극악무도한 짓을 저질렀다는 사실에 마을 사람들은 당황했다.
그러나 네나뷔스테는 태연했다.
“우리 마을에 여자들만 남은 이유가 뭔지 알아? 남자들은 그때 다 싸우다 죽어서잖아.”
나자예프는 남자 이전에 인간 취급을 받지 못했고, 오딜은 올가의 죽음을 목도하고 미쳐 도망쳤으니 예외로 치더라도, 카이라트가 살아남은 것은 네나뷔스테로서도 의외였다.
당시 카이라트는 맹인도 아니었고, 침대 생활을 할 정도로 몸이 약하지도 않았으며, 매일 굶어 가며 연구에 몰두해도 사라진 연구 자료를 찾아 마을 전체를 헤맬 만큼 사지 멀쩡한 남자였으니까.
“병사들도 바보가 아니거든.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반항하는 사람들은 깡그리 죽인 데다 위험 요소까지 말살한다고 학살을 저질렀는데 이 자식만 안 죽이고 넘어간 이유가 뭐겠어?”
“네나뷔스테.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카이라트, 너. 다른 사람들 시체 속에 숨어서 죽은 척하고 있었잖아.”
네나뷔스테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카이라트를 향했다.
아무리 원수 같은 오라비라도 제 가족을 사정없이 무기로 내려치는 네나뷔스테의 행동에 분노하던 카밀라는 입안을 깨물고 있던 것도 잊어버리고 입을 허, 벌렸다.
찌릿한 감각이 퍼지면 입술을 타고 피가 흘러내렸으나 카밀라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번에도 다른 사람들을 방패로 삼고 있으면, 너는 혼자 살아날 수 있을 줄 알았나 봐?”
“야, 네나뷔스테. 지금 그게 무슨 소리야?”
카밀라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녹색 눈동자가 심하게 요동쳤다. 네나뷔스테는 카밀라를 흘긋 바라보았다가, 다시 카이라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병사들이 사람 죽일 때도 상처 하나 없이 살아남았는데, 저주 때문에 눈이 멀어 버렸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병사들은 네나뷔스테의 몸에 증오의 핵을 억지로 욱여넣었다.
저주에 사로잡힌 그녀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어 남쪽 공터에 엎어진 채, 혹시라도 수풀에 숨어 있는 제 동생들을 누군가 발견할까 싶어 눈을 부릅뜨고 교회 쪽만 지켜보고 있었다.
저주 덕분인지, 아니면 위기 상황에서 인간의 감각이 필요 이상으로 예민해진 까닭인지, 남쪽 공터에서 교회까지는 제법 거리가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네나뷔스테의 눈에는 교회는 물론, 문이 열리고 닫히며 그 안에 드나드는 사람의 행색까지 또렷하게 들어왔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교회로 가는 길목에 늘어선 세 채의 집.
카밀라와 카이라트와 그의 아내가 살던 집.
그곳에서 빠져나온 두 부부가 교회 뒤의 창고를 향해 다급하게 뛰어가던 것을.
“교회 뒤 창고 시체들 속에 숨어서 병사들 눈을 속였지? 카이라트.”
“……그런 적, 없습니다.”
“그래? 아니면 말고.”
네나뷔스테가 발로 카이라트의 턱을 걷어차자, 카이라트의 눈이 하얗게 뒤집혔다.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기절해 버린 카이라트의 모습에 내내 굳어 있던 사람들이 다시 무기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네나뷔스테…… 지금 우리랑 해보자는 거야?”
“찾을 거면 너희끼리 찾아. 난 내 동생들만 지키면 돼.”
네나뷔스테가 들고 있던 갈퀴를 휙 내던지자, 사람들은 또다시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인원수만 믿고 몰려온 것이 허무하게도, 그들은 맞은편에 서 있는 네나뷔스테 하나를 어쩌지 못하고 서로 눈치만 보았다.
모두가 달려든다면 네나뷔스테를 제압하는 것은 일이 아니지만, 필연적으로 그 과정에서 몇 명은 다칠 것이다.
네나뷔스테의 성정은 그리 잔인한 편이 아니지만, 15년이란 사람의 가치관을 바꿔 놓기에 충분한 세월이다.
만약 네나뷔스테가 전력으로 저항하여 그 과정에서 죽는 사람이 나오기라도 한다면?
그 죽는 사람이 자신이 되는 결과만은 사양하고 싶었다.
죽고 싶지도, 다치고 싶지도 않았던 이들은 고작 한 사람을 앞에 두고도 차마 공격을 가하지 못할 만큼 겁에 질려 있었다.
“더 할 말 없으면 이 자식 데리고 나가. 여기 시끄럽게 하지 말고.”
“하지만 오딜은…… 그 호위기사 녀석이 오딜을 만나게 하면 안 된다고 그랬어.”
“오딜 아저씨는 내 동생들이랑 같이 있어.”
찾아오면 위협으로 간주하고 알아서 내쫓을 테니 더는 간섭하지 말라는 뜻이다.
“하지만 우리들만으로는…… 그 호위기사가 그 여자를 구하겠다고 날뛰면 못 막아.”
“못 막으면 뺏기는 거지 뭘 어쩌라고? 너희 몸은 너희가 알아서 지켜. 무서우면 그 년놈들이 산을 내려가 지원군을 불러오기 전에 산으로 들어가 숨으면 되겠네.”
네나뷔스테는 심드렁하게 대답하며 등을 돌렸다. 그녀가 성큼성큼 오딜의 거처로 되돌아가는 것을 바라보며 마을 사람들은 서로 불안한 듯 눈치만 주고받았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하지?’
‘카이라트가 저 꼴인데, 일단 데려가야 하나?’
‘그럼 카밀라는?’
눈치를 주고받던 이들의 시선이 자신을 향한 것을 알아챈 카밀라는 퍼뜩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에서는 아직도 피가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으나 그런 것을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카밀라는 아직도 엎어진 채로 미동도 없는 카이라트를 내려다보며 인상을 구겼다가, 빽 소리를 질렀다.
“네나뷔스테가 그랬잖아, 카이라트나 데리고 돌아가라고!”
네나뷔스테의 이름에 사람들이 움찔 놀란 틈을 타, 카밀라는 후다닥 오딜의 거처로 뛰어갔다. 지휘자를 잃은 이들은 카밀라를 쫓아가야 하나 우왕좌왕하다가, 오딜의 거처로 몰려갔다간 네나뷔스테가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어 우선은 카이라트를 데리고 돌아가기로 했다.
***
뒤따라오는 카밀라의 발소리를 들었는지, 앞서가던 네나뷔스테의 걸음이 멈추었다.
카밀라는 순간 후드려 맞는가 싶어 냉큼 큰 나무 뒤로 숨었다. 어차피 들킨 이상 숨는다고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으나, 자신을 지키려는 본능이었다.
“카밀라. 왜 따라와?”
“너 따라가는 거 아니거든? 난 오딜 아저씨 만나러 가는 거야.”
“오딜 아저씨는 만나서 뭐 하게?”
"네나뷔스테. 너 말이 짧다? 내가 너보다 세 살이나 많은데.”
“열세 살도 아니고 세 살 가지고 뭐 어쩌라고? 카밀라 너도 연상인 나자예프한테 반말하잖아.”
“나자예프하고는 겨우 한 살밖에 차이 안 나거든? 그게 무슨 연상이야!”
“카이라트한테도 반말하면서.”
정확한 지적에 카밀라는 할 말이 없어졌다.
카이라트가 카밀라보다 여섯 살이나 위인 것은 사실이지만, 살면서 그가 제대로 오빠 노릇을 했던 적이 몇 번이나 있었던가.
늘 연구실에 틀어박혀서 책이나 파고들다가 가끔 마주치면 한다는 말이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는 현학적인 질문을 건네 놓고 카밀라가 대답을 못 하면 한심한 눈빛을 하는 것뿐이었으니.
“하긴. 나도 카이라트가 오빠랍시고 가르치는 시늉 할 때마다 거꾸로 매달아서 빗자루로 털어 버리고 싶었어.”
“그렇지? 존경할 만한 인품이 안 되는 연장자란 그런 존재야.”
그럴 바엔 차라리 나이를 잊고 대등하게 취급하는 게 낫다는 네나뷔스테의 말은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카밀라는 곧바로 수긍했다.
‘그래. 카이라트는…… 그 자식은 오빠도 아니야.’
마을에 걸린 저주의 비밀을 알고도 15년간 입을 꾹 다물었고, 마을 사람들을 선동해 자신을 위협하기까지 했다.
원래도 그리 사이좋은 남매는 아니었지만, 지금은 차라리 원수라는 말이 아까울 정도였다.
15년 전 그날보다 더, 저주의 진실을 알게 된 그날보다 더, 카밀라는 카이라트가 원망스럽고, 미웠다.
“아무튼. 내 질문에 대답이나 해.”
“무슨 질문?”
“오딜 아저씨를 만나서 뭘 하려고 졸졸 따라오는 거냐고.”
“뭘 하긴…… 그래도 거기 가면 아저씨가 우릴 지켜 줄 거 아냐. 난 무섭다고.”
“우릴 지켜 줄 사람은 없어.”
네나뷔스테가 뒤를 돌아보았다.
큰 나무 뒤에서 빼꼼 고개만 내밀고 있던 카밀라와 눈이 마주쳤다.
“아저씨는 죽었으니까.”
늪 속의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