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네나뷔스테가 갈퀴를 한 손으로 휘두르자, 가뜩이나 그녀를 경계하고 있던 무리가 일제히 뒤로 밀려났다.
갈퀴가 길다고는 해도 가볍게 휘두른다고 다칠 거리는 아니었다.
실제로 공격한 것도 아닌데, 위협적인 태도 한 번에 바로 겁에 질리는 것을 본 네나뷔스테가 눈을 가늘게 했다.
‘흥. 겁쟁이들.’
이렇게 여러 명이 몰려와 놓고 자기 하나 상대하는 것을 두려워하다니, 아무래도 상대 쪽 무리에 진심으로 싸울 마음을 품은 사람은 없는 모양이었다.
'하긴. 북쪽은 체념의 공간이었으니까.'
15년간 무기력하게 시간을 보내 온 이들의 억눌려 있던 분노가 치솟긴 했으나, 그들은 북쪽에 있기를 스스로 선택할 만큼 안전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양손으로 붙잡아야 할 만큼 길고 무거운 갈퀴를 한 손으로 휘두르는 네나뷔스테를 제압할 만큼 그들은 싸움에 익숙하지 못했다.
“한바탕 하려고 온 거 아니었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대던 인간들은 다 어디 갔을까?”
“네나뷔스테…… 너 혼자서 우리를 감당할 수 있을 거 같아?”
“못 하겠지.”
네나뷔스테는 한 손으로 잡고 있던 갈퀴를 양손으로 붙잡고, 자세를 살짝 낮췄다.
“그런데.”
그녀를 에워싸던 무리가 일제히 긴장한 눈으로 몸을 굳히는 것이 보였다. 네나뷔스테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감당 못 하는 건 피차 마찬가지인 것처럼 보여서 말이야.”
무기를 든 네나뷔스테를 상대로 어떠한 피해도 없이 제압하기란 쉽지 않다.
여럿이 달려들면 붙잡을 수야 있겠지만 그 과정에서 다치는 사람은 분명 생길 것이다. 녹슨 갈퀴에 잘못 긁혔다간 파상풍으로 죽을 수도 있고, 눈을 찔리면 영영 앞을 못 볼 수도 있다.
저주의 고통으로부터도 회피하는 것밖에 선택하지 못했던 이들에게 자신이 다칠 것을 감수하고 네나뷔스테를 붙잡을 용기는 없었다. 그럴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그들의 적은 네나뷔스테가 아니었으니까.
‘뭐야, 왜 네나뷔스테가 나서는데?’
‘사이 안 좋은 거 아니었어?’
‘이러다 오딜까지 나서면 어쩌지?’
‘카이라트가 지시한 거잖아. 카이라트는 어디 갔어?’
불안한 속닥거림이 오가더니, 카밀라와 네나뷔스테를 향하던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들을 이끌고 온 주모자를 찾아 뒤를 향했다.
한곳에 시점이 고정되자 마치 파도가 갈라지듯 무리가 두 쪽으로 갈라져 물러났다. 그 끝에는 카이라트가 서 있었다.
카이라트의 표정은 태연했으나 그의 눈동자는 불쾌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네가 이끌고 왔으니 어떻게 좀 해 봐라>라는 눈총이 따가웠던 까닭이다.
카이라트는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들었다. 물론 무리의 맨 뒤에 서 있던 자리에서는 한 걸음도 벗어나지 않았다.
“……네나뷔스테. 우리끼리 싸워 봤자 피해만 더 커질 뿐입니다.”
“그럼 너희가 물러가면 될 일이잖아? 내 동생들 쉬는 데 불안하게 하지 마.”
한 걸음이라도 가까워졌다간 바로 후려칠 기세로 으르렁거리는 네나뷔스테의 모습은 15년 전보다 한층 위협적이었다.
카밀라는 여기 웅크려 있다간 패싸움에 휘말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워하면서도, 움직이는 기척이라도 냈다간 반사적으로 휘두른 갈퀴에 얻어맞을 것 같아서 일어나지도 못했다.
빨리 카이라트가 마을 사람들을 데리고 물러가야 네나뷔스테도 위협적인 태도를 거둘 텐데. 대체 어쩌자고 이런 짓을 벌이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카밀라가 원망스러운 눈으로 카이라트를 쏘아보자, 그는 시선을 회피하며 말을 이었다.
“네나뷔스테. 우리에겐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난 너희들 도움을 받은 적이 없는데, 내가 왜 너희를 도와야 하지?”
“우리가 단결하지 않으면 또다시 15년 전의 참극이 재현될 거예요.”
“그게 무슨 헛소리야. 꿈이라도 꿨어?”
“15년 전, 이 마을에 저주를 내린 건 알렉세이입니다.”
뜬금없이 알렉세이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네나뷔스테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알렉세이는 그보다 훨씬 전에 마을을 떠났잖아.”
“산 아래 도시로 내려갔던 거겠지요. 그가 귀족의 피를 이었다는 소문은 당신도 들은 적이 있지 않습니까?”
아주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서 알고 있다. 그의 어머니가 매일같이 알렉세이는 귀족의 자손이니 이런 촌구석 마을 사람들과 같이 취급하지 말라고 했던가.
상대하는 게 시간 낭비라고 판단했던 까닭에 사람들은 그냥 대충 무시하고 넘어갔지만, 알렉세이는 모친의 마을을 진심으로 알아들었는지 마을 사람들을 무시하는 태도를 고치지 않았다.
“그날 마을을 침범한 무리는 귀족의 사병입니다. 아마도 알렉세이가 로스카옌과 결탁해서 일을 꾸민 거겠죠.”
“역시 로스카옌이 연관되어 있었네.”
알렉세이가 범인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로스카옌이 연관되어 있다는 말에 네나뷔스테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사비나는 그 알렉세이와 올가의 딸입니다.”
“뭐?”
“알렉세이는 올가를 죽이고 딸을 데려가 저주의 화신으로 만들었죠. 그리고 다시 한번 이 마을을 죽음으로 뒤덮어 새로운 저주를 완성할 셈으로 그녀를 이곳으로 보냈습니다.”
“눈도 안 보이던 주제에 꼭 바로 옆에서 보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네.”
네나뷔스테는 사비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외부인인 그녀가 자꾸 자신이 살던 마을을 들쑤시는 것이 싫었고, 무슨 피해를 몰고 올지 몰라 경계했다.
알렉세이의 존재는 잊고 있었지만, 의심하던 로스카옌과 사비나가 한패라는 사실은 납득하기 쉬웠다.
“누가 보면 너도 한패인 줄 알겠어.”
네나뷔스테는 고개를 까딱하고는 갈퀴를 든 채 한 걸음 나아갔다.
인파가 다시 한번 뒤로 물러나고, 카이라트와의 거리가 좁혀졌다.
“네나뷔스테. 한마을에서 살아온 저보다, 외부인인 그들을 믿는 겁니까?”
“믿은 적 없어.”
네나뷔스테는 사비나에게 아페티트의 핵을 먼저 흡수할 것을 요구했고, 사비나는 그녀의 요구대로 오딜을 끌어들이지 않고 세 번째 핵을 흡수했다.
오딜을 통해 그 이야기를 들은 지 며칠 되지도 않아 오늘 아침 네 번째 핵이 삼켜지고, 비로소 마을의 시간이 원래대로 흐르기 시작한 것을 직감했다.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소리를 하니까 짜증이 나서 말이지.”
네 개의 핵을 흡수하여 마을의 시간을 원래대로 되돌렸으니 이제 떠날 일만 남았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알렉세이의 딸이라니.
아니, 알렉세이의 딸이든 아니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만, 흡수한 핵을 바탕으로 또 다른 저주를 내린다면 이 마을은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이해합니다. 겨우 저주에서 벗어났는데 또다시 위험이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으니 마음이 편하지 않겠지요.”
“너한테 이해받고 싶은 생각 없으니까 맘에도 없는 소리는 집어치워, 카이라트.”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니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럼 먼저 그쪽 무기부터 치우게 하든가. 너희들이 가기 전까지 나는 여기서 물러나지 않을 거거든.”
네나뷔스테가 물러나지 않는다면 오딜을 만날 수 없다.
오딜을 설득해서 알렉세이가 오자마자 그를 잡을 덫을 마련해야 하는데, 만약 그 전에 카밀라나 에르잔이 오딜을 찾아가 사비나를 구하려 든다면 계획이 모두 어그러지고 만다.
카이라트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모두 무기를 거두세요.”
“카이라트, 뭐 하려고?”
“네나뷔스테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웅성거리는 무리 사이에서 빠져나온 카이라트는 네나뷔스테의 앞에 섰다.
금방이라도 네나뷔스테가 들고 있는 갈퀴가 그를 내리찍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으나, 카이라트는 겁먹지 않았다.
네나뷔스테는 성질이 포악한 것이 아니다. 동생들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지나치게 강할 뿐.
그러니 그녀를 설득하려면 회유가 아닌 다른 목적을 심어 주는 것이 적당할 터였다.
“사실 사비나의 신변은 저희가 이미 확보했습니다.”
“……그래?”
“예. 마을을 엉망으로 만들지 못하도록 가둬 두었죠. 하지만 호위기사인 에르잔은 놓쳐 버렸습니다.”
“이렇게 여럿을 데려와 놓고 그거 하나를 못 잡아? 잘 하는 짓이다.”
“도망친 에르잔이 사비나를 구하기 위해, 당신의 동생을 인질로 잡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죠.”
네나뷔스테의 자주색 눈동자가 예리하게 빛났다. 뒤에서 카밀라가 에르잔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외쳤으나 카이라트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네나뷔스테, 우리와 함께 그 남자를 찾으러 갑시다.”
“…….”
“카밀라는 지금 녀석들에게 속고 있는 상태라서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해야 합니다. 카밀라는 우리가 붙잡고 있을 테니, 당신은 오딜을 불러오세요. 인원은 많을수록 좋지 않습니까.”
“네나뷔스테, 속지 마! 저 자식 날 15년 동안 속여 온 놈이야!”
카밀라가 진저리치며 절규했으나 그 소리는 네나뷔스테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얼마나 죽어 나가든, 제 동생들만은 지켜야 했다. 그리고 동생들을 지키려면 자신도 살아 있어야 한다. 네나뷔스테의 머릿속에는 그것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카이라트는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네나뷔스테, 가서 오딜을 불러오세요.”
“싫은데?”
네나뷔스테는 주저 없이 카이라트의 어깨를 갈퀴로 내려찍었다.
늪 속의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