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 속의 불-134화 (134/189)

135화

“로스카옌 신부님!”

에르잔은 목걸이를 받는 대신 바닥에 그대로 머리를 찧을 뻔한 로스카옌을 부축했다.

잘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금줄 목걸이가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로스카옌 신부님, 제가 부축하겠습니다. 우선 교회로…….”

“어서 아가씨에게로 가!”

목걸이를 던진 것이 마지막 힘이었는지, 로스카옌의 몸은 축 늘어져 있었다. 그러나 손힘만으로 기어온 것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붉어진 두 눈만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늘 탁하다고만 생각했던 검은 눈동자에서 분노를 닮은 격정이 끓어오르는 것을 처음 마주한 에르잔은 주춤했다. 로스카옌은 자신을 부축하려는 에르잔의 손을 어깨를 털어 뿌리치고 도로 바닥에 쓰러졌다.

“신부님, 괜찮으십니까?”

“나는 상관하지 말라니까!”

“하지만 신부님의 상태가…….”

“가라는 소리가 안 들려?”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로스카옌은 빗발이 선 눈으로 에르잔을 쏘아보았다.

“로스카옌 신부님…….”

로스카옌은 말없이 손을 뻗었다.

그의 손끝이 바닥에 떨어진 금줄 목걸이를 가리키고 있었다.

교회에서 모시는 성물. 저것에 검은 숲을 통과할 수 있는 어떤 힘이 있는 것일까.

에르잔은 로스카옌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로 목걸이를 주워들어 손목에 감았다.

순간적으로 목걸이를 감은 왼팔에 무게가 실리면서, 잊은 줄 알았던 등의 통증이 되살아나 에르잔은 얼굴을 찌푸렸다.

“읏…….”

“어서, 어서 가란 말이야!”

“로스카옌 신부님은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아가씨만 생각해! 왜 자꾸 남에게 한눈을 팔아!”

눈빛만 보면 마치 에르잔이 대단히 큰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무시무시하게 쏘아보는 것이 심상치가 않다. 로스카옌의 눈빛에 압도되어, 에르잔은 뭐라고 한마디 변명도 하지 못하고 주춤거리며 일어났다. 기세에 눌린 듯 무심코 뒤로 한 걸음 내딛는데 정강이에 수풀의 잎사귀가 닿아 바스락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로스카옌이 던져 준 목걸이가 어떤 작용을 한 것인지, 에르잔의 출입을 허용하지 않던 검은 숲은 더 이상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로스카옌 신부님. 이 목걸이는 무엇입니까?”

질문을 끝마치기 무섭게 따가운 모래가 눈가에 뿌려졌다. 에르잔의 질문에 대답할 가치도 느끼지 못했다는 듯, 로스카옌이 피와 흙으로 엉망이 된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빨리 사비나를 구하러 가!”

지쳐 쓰러져가던 늙은 몸 어디에서 저런 힘이 나오는 것일까. 마치 폭풍과도 같은 노성이 에르잔의 몸을 검은 숲으로 떠밀었다.

에르잔은 아직도 바닥에 쓰러진 채 실핏줄이 다 터져 붉어진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로스카옌을 바라보았다가, 결심을 굳힌 듯 등을 돌려 안쪽으로 뛰어갔다.

이성이 없는 주술은 금줄 목걸이를 두른 에르잔을 마을 주민으로 착각했는지, 커다란 기사의 등을 검은 그림자가 금세 집어삼켜 버렸다. 로스카옌은 까맣게 물들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숲 너머를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이래서…… 이래서 알렉세이가 저 청년을 보냈구나. 이래서…….’

생각만 했는지,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한 것인지는 모른다.

로스카옌은 자신의 역할이 끝났다고 생각했으나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신을 섬기는 사제로서의 의무는 이미 옛날에 내던졌고, 사랑하는 여인과 그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돌보는 남자로서의 의무도 검은 두루마기에 가로막혀 한 번 스쳐 보지도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미련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저주를 벗어난 땅의 흙은 더 이상 질척거리지 않았다. 로스카옌은 모두가 저주에서 벗어난 지금에 와서야 마치 뒤늦게 저주에 걸린 듯 벌레처럼 버둥거렸다.

다가오길 고대했던 고요하고 평온한 죽음이 물러간 자리엔 끔찍한 고통만이 남았으나 로스카옌은 포기하지 않았다.

“아가…… 아가…… 너는 내가, 지켜야지…….”

***

본래도 인구가 적을 뿐 마을의 규모가 별로 작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으나, 이놈의 광장은 정말이지 쓸데없이 넓었다.

오딜의 거처를 향해 필사적으로 뛰는 카밀라는 자신을 바짝 뒤따라오는 사람들의 발소리에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내가 왜 뛰어야 되는데? 내가 왜 쫓기는 거냐고!'

오딜의 거처를 향해 뛰어라. 에르잔이 그렇게 말하기에 오딜에게 도움을 요청할 셈인가 했더니만, 아무래도 자신을 미끼로 던져 놓고 에르잔은 다른 방향으로 향한 것 같았다.

입을 벌렸다간 그대로 혀를 깨물 것만 같은 상황이라 속에서 치밀어오르는 욕을 삼킬 수밖에 없었던 카밀라는 기울어진 울타리를 뛰어넘어 바로 숲길로 들어갔다.

숲의 나무와 수풀은 이 마을에서 나고 자라온 카밀라에게 전혀 방해가 되지 않았으나, 그것은 그녀를 뒤따라오는 마을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절뚝거리던 다리는 분명 사비나가 고쳐주었는데, 어째서인지 카밀라는 점점 종아리가 뻣뻣해지며 발뒤꿈치가 땅겨 오는 느낌을 받았다.

‘이러다 따라잡히겠어!’

제 육신을 괴롭히던 저주는 사비나가 흡수하고, 멈춰 있던 시간마저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했으니 걸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야 할 터인데, 심리적인 압박 때문인지 몸이 무겁고 시야가 좁아졌다.

땅 위로 모습을 드러낸 고목의 뿌리를 목격한 카밀라는 그대로 폴짝 뛰어 넘어가려 했으나, 높이가 충분하지 않았는지, 아니면 뛰었다고 생각했는데 제대로 뛰어오르지 못한 것인지 나무뿌리에 발목을 잡아 채여 그대로 고꾸라졌다.

“아윽!”

“걸렸다!”

“카밀라, 더는 못 도망가!”

유리한 것은 먼저 뛰기 시작했다는 사실밖에 없는 까닭에 뒤따라온 마을 사람들이 넘어진 카밀라를 에워싸기까지는 채 일 분도 걸리지 않았다.

발목의 통증을 느낄 새도 없이 저를 둘러싼 이들의 얼굴은 분명 익숙한데, 저를 바라보는 눈빛은 기이하리만치 낯설었다.

카밀라는 넘어지느라 말려 올라간 치마를 아래로 내려 발 쪽을 숨기며 몸을 움츠렸다.

“왜 따라오는 거야? 내가 뭘 했다고!”

“카밀라, 그 녀석들과 무슨 거래를 했어?”

“거래는 무슨 거래야! 난 아무것도 안 했어!”

“네가 그 녀석들과 한패가 아니라면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도망친 건데?”

“그야……!”

다들 무서운 얼굴로 연장을 들고 있고, 카이라트와 에르잔이 대립하는 모양새였고, 에르잔이 오딜의 거처를 향해서 뛰라고 했으니까.

새벽부터 내내 불안했던 카밀라는 본능적으로 자신을 향해 외친 그 말에 몸을 던졌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왜 에르잔의 말을 그대로 따랐는지 알 수가 없다.

같은 마을 사람인 카밀라에게라면 해코지를 하지 못할 거라고 판단한 걸까.

저주에서 벗어났다고는 해도 교류가 끊긴 지 15년이다. 기억하는 얼굴은 어제와 같을지라도 그사이에 쌓인 시간의 단절은 그들을 묶어 주는 유대감을 짓눌러 부숴 놓기에 충분했다.

‘이러다 나 죽는 거 아냐?’

카밀라는 겁에 질린 얼굴로 저를 고꾸라뜨린 고목나무에 찰싹 달라붙었다.

나무가 갑자기 사람이 되어 그녀를 지켜 주는 호위기사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일단 뭐라도 붙잡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무튼 나는 몰라! 할 말이 있으면 에르잔한테 가서 하면 되잖아!”

“너 때문에 그놈을 놓쳤는데 무슨 소리야?”

“카밀라, 빨리 바른대로 말해! 그 녀석들이 뭘 꾸미고 있어? 로스카옌은 어딜 갔느냐고!”

그걸 자신이 어떻게 아느냐고, 새벽에 북쪽 숲을 향해 걸 어들어간 세 사람의 뒷모습을 본 게 마지막이라며 항변하려던 카밀라의 목소리를 뒤덮는 노성이 쩌렁쩌렁 울렸다.

“내 동생들 자는데 여기서 시끄럽게 뭐 하는 거야!”

북쪽 숲만큼은 아니지만 나무가 빽빽해서 어두워 보이는 숲속에서도 찬연한 백금발. 카밀라보다도 머리가 하나는 더 높을 만큼 키가 큰 네나뷔스테가 짜증스러운 얼굴로 불청객들을 노려보았다.

“살 만한 북쪽에 자리를 잡았으면 거기에 처박혀 있을 것이지, 왜 여기까지 와서 행패야?”

“네나뷔스테, 너는 상관하지 말고 꺼져!”

“아니, 꺼져야 할 건 너희들이지.”

연장을 든 다수를 상대로도 겁먹지 않고, 네나뷔스테가 성큼 다가왔다. 그 기세에 눌린 이들이 주춤거리며 한 걸음 물러났다.

카밀라가 마을 제일의 수다쟁이고, 나자예프가 마을 제일의 사고뭉치고, 알렉세이나 아페티트가 어쩐지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기피 대상이었다면, 네나뷔스테는 맹수였다.

훤칠한 키에 긴 팔다리는 아무런 무기를 쥐고 있지 않아도 위협적으로 보였다. 다른 여자들은 물론이고 마을 남자 중에도 네나뷔스테보다 키가 큰 사람은 별로 없었으니 당연할까.

15년간 증오만을 품어 온 살벌한 눈빛을 마주하고도 아무렇지 않아 할 만큼 살아남은 이들은 강하지 못했다.

무기를 들고도 맨손인 네나뷔스테를 경계하는 상황이 우스웠으나 아무도 웃을 수는 없었다.

“큰 소리가 들리면 줄디즈가 무서워해. 아이베크와 자니베크도 더 쉬어야 하고.”

“뭐, 뭐?”

“마을 집회라도 하려거든 광장에서 해.”

“네, 네가 뭐라고 명령을 하는 거야?”

“맞아. 너도 우리 마을 사람이라면 응당 그놈들을 잡는 데 협력을 해야지!”

“협력?”

네나뷔스테는 엎어져 있는 카밀라의 몸 위를 훌쩍 건너뛰어 오더니, 바로 앞에 서 있던 여자의 손에서 무기를 빼앗았다.

녹이 슬어 끝이 마모된 긴 갈퀴였다.

“나 네나뷔스테야.”

마을의 남쪽에서 아무도 믿지 않고 15년 동안 홀로 동생들을 지켜내며 네나뷔스테가 신조로 삼은 것은 단 한 가지였다.

그녀 자신과 동생들을 위협하는 일체의 요소를 남김없이 말살할 것.

“난 누구 명령도 안 들어.”

늪 속의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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