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 속의 불-133화 (133/189)

134화

“로스카옌 신부님……?”

에르잔의 부름을 듣지 못했는지, 로스카옌은 흐트러진 백발이 얼굴을 다 덮고 있는데도 몸을 추스르지 못하고 기침을 했다. 어디가 안 좋은 걸까, 에르잔은 로스카옌의 상태를 살피고 싶었으나 검은 숲은 그를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 에르잔은 주위를 살펴 인적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 조금 더 큰 소리로 로스카옌을 불렀다.

“로스카옌 신부님!”

힘없이 늘어진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던 검은 두루마기가 움찔 떨리더니, 흰머리인지 수염인지 구분도 되지 않는 풍성한 털로 뒤덮인 주름진 얼굴이 소리가 들린 쪽을 향했다. 로스카옌은 느리게 눈을 깜박이더니,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에르잔…… 인가?”

“그렇습니다. 로스카옌 신부님, 괜찮으십니까? 혹시 마을 북쪽에서 저주의 핵을 흡수하다가 사고가 난 건……!”

“아니…… 아닐세.”

로스카옌은 나무에 기댄 채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피 냄새가 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어딜 다친 것은 아닌 듯한데, 금방이라도 픽 쓰러질 사람처럼 기운이 없어 보였다. 어쩌면 저주의 영향일지도 모른다고 판단한 에르잔은 최대한 숲의 가장자리에 딱 붙어 섰다. 들어갈 수도, 팔을 뻗을 수도 없지만 소리가 전달되는 것을 보면 아주 단절된 것은 아닌 듯했다.

“로스카옌 신부님, 제가 그쪽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조금만 더, 가장자리로 와 주시면…….”

“나한테는 신경 쓰지 말고 아가씨나 챙기게.”

로스카옌은 손을 휘휘 내젓고는 바닥을 짚었다. 흰머리와 수염으로 뒤덮인 얼굴이 아래로 푹 고꾸라졌다. 에르잔이 놀라 소리치는 것이 들렸으나 로스카옌은 괜찮다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목소리를 내는 것이 힘이 들었다.

‘그래. 이만하면 오래 살았지…….’

15년 동안 시간이 멈춘 마을에서, 나이를 먹는 것은 외지인뿐이다.

마을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마을 주민들은 저주 속에 갇혀 있는 한 나이를 먹지 않으니 병이나 노환으로는 죽지 않는다.

외부인으로서의 15년. 마을 밖으로 빠져나간 알렉세이를 대신해 <제물>이 됨으로써 그의 세월을 받아 낸 시간이 또한 15년.

30년이나 홀로 늙어 버린 남자에게 실제로 그가 살아온 세월이 반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했다.

참극이 일어났을 당시 38살이었으니 지금 육신의 나이는 68살이 될까. 수도자의 수명이 일반인에 비해 긴 편이라고는 하나, 도심도 아닌 이런 외딴 마을에서 근 70을 바라보는 나이까지 살게 될 줄은 로스카옌도 짐작하지 못했다.

‘이게 <시간이 흐른다>는 것이지……. 나의 현재는 이미 지나가 버린 모양이구먼’

시간이 멈춘 마을에서, 홀로 하루가 다르게 나이를 먹어 가면서도 로스카옌은 육신의 나이를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걸음이 느려졌으나 걷는 데는 문제가 없었고, 날이 저물면 눈이 침침해졌으나 교회에는 장애물이 없고 자주 다니는 길도 전부 외워 둔 탓에 돌아다니는 것이 불편하지 않았다.

매일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목욕을 하고 기도를 올리고, 빵을 구워 카밀라와 카이라트에게 가져다주고, 낮에는 묵묵히 교회를 지킨다. 이따금 카밀라나 나자에프가 찾아와 고해성사를 하면 들어주고, 날이 저물면 자리를 정리하고 일기를 쓴 뒤 잠들기를 반복했다.

그때는 제 몸이 노화되었다는 것을 신경 써야 할 이유가 없었다. 홀로 나이를 먹어갈 뿐, 그의 존재는 살아 있는 유령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러나 사비나가 찾아오고, 에르잔을 만나고, 잊고 있던 감정이 되살아나고 미련이 싹텄다. 마음을 쓰지 않으려 해도 반가움과 그리움이 물밀듯이 밀려와 가슴을 쳐 댔다. 사비나와 에르잔이 마을에 도착한 이 몇 달간, 로스카옌은 지난 15년간 움직인 거리보다도 더 많은 길을 오갔다. 두 사람을 위해서.

아니, 한 사람을 위해서.

‘그래도 마지막까지 잘 버텨서 다행이야. 저주의 핵도 흡수했고, 아가씨와 에르잔이 떠나면 이제 내 역할은 끝이니…….’

미래를 예지하는 주술사도 아닌데, 로스카옌은 자신을 향해 서서히 죽음이 가까워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거부할 생각은 없었다. 알렉세이의 제물이자 마을의 관리인으로서 15년간 자신을 속여 온 대가치고는 지나치게 평온한 죽음이 아닌가. 오히려 올가에게 죄스러울 지경이었다.

“로스카옌 신부님!”

사람의 오감 가운데 마지막까지 남는 것이 청각이라는 사실은 참으로 성가셨다. 그만 편히 잠들고 싶은데, 죽음과는 너무나도 먼 거리에서 빛을 업고 달리는 불꽃 같은 청년에게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안식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자의 소망이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설마 신부님께서도, 사비나 아가씨의 저주에 당하신 겁니까?”

몸을 움직이기는커녕 눈도 뜨기 힘든데 왜 이렇게 자꾸 질문을 던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이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청년의 열렬한 질문에 답변을 들려주기에 로스카옌은 너무 늙고 지쳐 있었다. 그는 입술을 우물거리며 쉰 소리로 중얼거렸다.

“에르잔, 이상한 추측 그만하게. 내 수명은 아가씨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

“카이라트에게 들었습니다. 사비나 아가씨께서 네 번째 핵을 흡수하다가, 저주가 폭주해서 죽음의 늪에 갇혀 버리셨다고……!”

“……뭐?”

스스로는 도저히 뜰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던 눈꺼풀에 힘이 돌아오더니, 로스카옌이 눈을 부릅떴다. 바닥에 엎어진 채 눈만을 치켜뜬 로스카옌의 탁한 눈동자에 에르잔의 다급한 표정이 비쳤다.

“나자예프는 늪에 삼켜져 죽고, 카이라트가 나머지 사람들을 데리고 피신한 것을 확인했습니다.”

나자예프가 죽다니, 이건 또 무슨 허무맹랑한 소리인가. 로스카옌은 이해하지 못하고 눈만 크게 떴다.

“카이라트는 콘바야젠 백작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고 했지만, 아가씨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로스카옌 신부님, 제가 이 숲을 건널 방법을 알려 주십시오!”

“무슨…… 말도 안 되는…….”

로스카옌은 말을 뱉다가 턱 목이 막혀 컥컥거리더니, 목에 힘을 주어 고개만을 들어 올렸다.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린 몸뚱어리는 나무토막처럼 뻣뻣한데 주름 가득한 얼굴에서 두 눈동자만이 살아 있음을 증명하듯 요동쳤다.

“제발, 로스카옌 신부님! 이 숲이 저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저주를 정화하려고 해도, 통하지 않아서……!”

“……이건 저주가 아니야.”

마을 사람이 아닌,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하는 주술. 본래는 마을 전체에 둘러져 있던 그 주술은 사비나가 네 개의 핵을 흡수함으로써 그녀의 반경으로 범위가 제한되었다. 아마도 에르잔이 들어올 수 없는, 가로막힌 범위의 정 가운데에 사비나가 있을 것이다.

핵을 무사히 흡수했다면 벌써 숲을 빠져나와 교회로 돌아가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에르잔이 말해 주는 사비나의 상황은 로스카옌의 예상을 한참 벗어나 있었다.

‘폭주? 왜! 주술이 작동하고 있는데!’

주술은 이성이 없기에 반드시 술자가 처음에 베푼 방식대로 움직이나, 술자의 통제를 벗어나면 멋대로 날뛰기 시작한다. 사비나가 네 번째 핵인 <체념>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뭔가 문제가 생겼다면, 외부인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는 이 주술도 효력을 잃고 다른 속성으로 변해야 정상이다.

그러나 에르잔이 이 검은 숲 안쪽으로 들어올 수 없다는 건, 외부인을 차단하는 결계 주술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뜻. 사비나가 흡수한 네 개의 핵은 여전히 균형을 이루며, 보다 강력해진 상태라는 뜻이 된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 내가, 분명히…….”

로스카옌의 턱이 덜덜 떨렸다. 부릅뜬 눈가의 주름 위로 힘줄이 도드라지더니, 실핏줄이 터졌는지 눈가가 빨갛게 물들었다.

‘페고라를 직접 만났어야 했나? 대체 뭐가 잘못된 거야!’

로스카옌을 중오하는 네나뷔스테, 분노로 이성을 잃은 바르셀다, 소재를 파악할 수 없는 예측 불가의 존재 아페티트와는 달리, 페고라는 15년 전 그날부터 죽 북쪽 우물을 막아 그 안에서 햇볕을 피해 누워 있었다. 체념의 핵을 봉인한 존재답게 느긋하고 감정의 동요도 적어, 사비나가 핵을 흡수하고 난 뒤에 어떤 트러블을 일으켰을 거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뭔가…… 뭔가, 다른 사람이 개입했나?’

그러고 보니 에르잔이 카이라트의 이름을 올렸다. 다급해진 로스카옌은 혀를 깨물었다. 평온한 죽음을 요구하며 서서히 잠들어 가던 육신이 저를 괴롭히는 통증에 다시 꿈틀거렸다. 로스카옌은 바닥을 짚고 숲의 가장자리로 기어갔다. 움직이지 않는 몸을 손힘만으로 끌고 가느라 흙바닥에 박힌 손톱은 깨져 피가 흘렀고 손끝은 피부가 다 벗겨졌으나 그런 것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에르잔, 어서……!”

“로스카옌 신부님, 이쪽으로 오십시오! 제가 부축하겠습니다!”

“이걸, 이걸 가지고 아가씨께 가!”

로스카옌은 목에 걸고 있던 금줄 목걸이를 뜯어낼 기세로 벗어 내더니, 그것을 에르잔에게 던졌다.

그와 동시에, 검은 숲은 15년 동안 의지가 없는 주술을 기만하던 늙은 <외지인>을 밖으로 튕겨 냈다.

늪 속의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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