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지하가 엉망일 텐데, 괜찮을까.’
사비나는 잠시 망설였다가,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디든 이곳보다 위험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오랫동안 버려져 있던 출입금지 구역인 만큼, 그곳을 가까이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 여기기도 어려웠다.
이 저주받은 마을에서 15년이라는 세월을 버틴 이들이 아닌가. 저주의 핵을 봉인한 장소에는 발도 들이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좋아. 카림, 동쪽 첨탑으로 가자.”
“하지만 어른들이 가지 말라고 했는데…….”
“원래 가지 말라면 더 가고 싶은 법이잖아? 애들은 애들다워야지, 카림.”
이 자리에서 가장 나잇값을 못하는 나자예프가 너스레를 떨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나자예프. 걸을 수 있어요?”
“걷기 힘들다고 하면 사비나, 네가 부축해 줄래?”
“저보다는 아페티트가 더 키가 크니 부축이 수월할 거예요.”
“……응. 같은 거절이라도 그렇게 말해 주니까 가슴이 아프지는 않네.”
처음부터 그다지 기대하지는 않았는지, 나자예프는 절뚝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다리를 다친 것은 아닌데 걷기 불편해하는 것을 보니 오른팔에 퍼진 저주가 하반신에도 영향을 비치는 듯했다.
사비나가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것을 눈치챘는지, 나자예프는 씩 웃으며 어깨를 추어올렸다.
“자, 빨리빨리 가자고. 숲에서 미적거리면 언제 뒤를 밟힐지 알 수 없으니까.”
“어…… 그쪽이 아니라 이쪽인데.”
“나자예프. 이쪽이래요.”
나자예프가 향하던 방향의 반대쪽을 가리키며 카림이 난감해하자, 사비나가 그를 불러 세웠다.
머쓱해진 얼굴로 채 뒤돌아보기도 전에 아페티트가 심드렁하게 비수를 날렸다.
“길도 모르면서 앞장서서 우리를 이끌다가, 미아라도 만들 셈이었습니까? 여전히 한심하네요, 나자예프.”
“아페티트, 너는 입 다물어라.”
이 마을에서 혀에 칼을 문 사람이 한둘이 아니지만, 그다지 친하지도 않았던 데다 성별까지 같은 아페티트에게 잔소리를 듣는 건 자존심이 상했는지 나자예프가 답지 않게 이를 갈았다.
그러나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는지, 아페티트는 코웃음을 치고는 사비나의 어깨를 붙잡았다.
“가시죠, 사비나. 나자예프는 알아서 뒤따라올 겁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아페티트가 뒤쪽을 좀 신경 써 주세요.”
“제가 왜 그런 수고를 해야 합니까?”
“그래야 제 어깨에서 손 치울 거 아녜요?”
뿌리치는 대신, 사비나는 몸을 살짝 돌려 아페티트의 손을 벗어났다. 냉담한 반응에 아페티트는 조금 얼이 빠졌다.
<환각>에 걸려들었을 때는 그에게 이끌리면서도 당혹스러워하는 모습이 퍽 사랑스러웠는데, 환각의 영향을 받지 않는 사비나는 참으로 반응이 재미없었다. 아페티트는 입술을 삐죽거리고는 뒤따라오는 나자예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사비나의 부탁이니 어쩔 수 없군요. 자, 나자예프. 잡고 따라오시죠.”
“너랑 잡을 손 같은 건 없어.”
“그럼 팔에 달린 건 손이 아니라 발입니까? 네발로 기질 않아서 미처 몰랐군요.”
“내 손은 사비나 전용이라는 뜻이야!”
쓸데없는 실랑이를 주고받는 두 남자를 무시한 채 사비나는 카림과 함께 숲을 빠져나갔다.
그녀가 저주의 핵을 모두 거둬들임으로써 마을의 저주는 풀렸을 텐데, 하늘을 덮을 만큼 빽빽한 검은 사철나무의 숲은 기묘하리만치 고요했다.
단지 조용한 것이 아니라, 소리라는 것을 빨아들여 적막한 공간으로 만드는 곳 같다고 할까.
사박거리는 발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더니, 호흡하는 소리와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귓전을 메웠다.
차디찬 돌방에 홀로 갇혀있었을 때도 제 숨소리가 이렇게 크게 들린 적이 없었다.
긴장해서 감각이 예민해진 것일까?
사비나는 숨소리와 심장 소리에 정신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미간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피부를 손끝이 문지르는 소리가 꼭 빗자루로 낙엽을 쓰는 소리처럼 부산스럽게 들렸다.
“카림. 얼마나 더 가야 하는 거니?”
앞서가는 카림에게 물었지만,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뼈만 앙상한 다리는 쉼 없이 움직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넓은 공간은 나오지 않았다.
숲의 가장자리까지는 아직도 먼 걸까. 사비나는 고개를 돌려 뒤따라오는 아페티트와 나자예프의 모습을 살피려 했다. 그런데 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카림, 잠깐만. 아페티트와 나자예프가 보이질 않아.”
앞서가는 카림을 불러 세우려 다시 몸을 돌린 사비나는, 방금 전까지 사박거리는 발소리를 내며 지나가던 아이의 모습이 사라진 것을 보고 당황했다.
“카림?”
주위를 둘러보아도 보이는 것은 검은 사철나무뿐. 카림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아페티트와 나자예프도, 누구의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카림? 아페티트, 나자예프!”
누군가에게 들키면 곤란하니 큰 소리를 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아는데도, 갑자기 주위 사람들이 사라진 까닭에 사비나는 당혹스럽게 소리를 높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디를 보아도 똑같은 풍경. 똑같은 검은 나무가 마치 장대에 꽂혀 늘어진 시체처럼 사비나의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두근. 두근. 요란한 심장 소리와 숨을 내쉬는 소리가 사비나의 귓전을 때렸다. 꼭 가슴 속에서 물이 차오르는 것처럼 서늘하고 갑갑한 감각이 엄습했다.
“다들, 어디에…….”
동쪽 첨탑은 무척 높아서 숲 건너편에서도 지붕이 보였는데, 숲으로 들어온 지금은 하늘조차 보이지 않을 만큼 나뭇잎이 빽빽하게 위를 덮고 있어서 위치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숲이 복잡하긴 하지만 이 정도로 넓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어떻게 된 걸까. 사비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현기증을 느끼고 뒤로 쓰러졌다. 나무에 걸려 넘어지지는 않았으나, 옷 너머로 느껴지는 나무껍질의 감촉이 기이할 만큼 섬뜩하여 얼른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아니, 일으켜 세우려 했는데 바닥이 그녀를 향해 일어났다.
“아……!”
바닥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쓰러졌다는 것을 깨달은 건 피부를 할퀴며 튀어 오른 납작한 잎사귀가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다시 땅에 떨어지는 것을 본 다음이었다. 사비나는 양손으로 바닥을 짚고 호흡을 골랐다. 몸이 무거운 것은 아닌데 이상하게 움직이는 게 힘이 들었다. 아니, 정확히는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고 할까. 몸이 그녀의 통제를 벗어나는 것 같다고 할까.
<그 오빠가 있을 때 나가지 않으면, 언니도 멈춰 버려요.>
문득 줄디즈의 경고가 떠올랐다.
나자예프와 함께 떨어진 공동묘지에서 벗어나기 전까지, 사비나는 이곳이 자신이 태어난 마을인 줄도 모르고 있었다.
사비나가 <외부인>이었을 때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나이를 먹을 수도, 이 마을을 벗어날 수도 있었지만, 만약 네 개의 핵을 전부 흡수하기 전에 자신의 출신을 알게 되었다면 사비나도 마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꼼짝없이 갇혀 있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핵은 내가 다 흡수했는데? 어째서…….’
어쩌면 자신은 큰 착각을 한 것이 아닐까.
마을 사람들이 저주에서 벗어나는 것만을 생각하고 자신을 생각하지 않은 것이 실책은 아닐까.
아페티트의 욕망의 핵을 흡수하면서, 사비나는 그녀가 가장 바라던 것을 얻었다.
사비나가 이름을 불러도 병에 걸리지 않고, 그녀에게 닿는 사람이 죽지 않는 것.
그렇다는 건, 시간을 멈추고 마을 사람들을 마을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만드는 저주를 흡수하면, 단순히 사비나의 저주의 힘이 강력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을 단위에 적용되던 저주가 그녀의 몸 안에 결집한다는 뜻이 된다.
그녀의 몸의 시간이 멈추고, 몸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는.
‘소리가…… 너무 커…….’
심장이 뛰는 소리가 지나치게 요란했다. 머리가 울려서 어지러울 만큼.
주위에 나무가 이렇게나 많은데, 사비나는 꼭 제 몸 하나만을 누일 상자에 들어간 것처럼 옴짝달싹도 못 하는 갑갑함을 느꼈다.
‘아니, 잠깐만. 만약 내 시간이 멈추고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된다고 해도…… 나자예프랑 아페티트는? 카림이 가까이서 보고 있었을 텐데, 왜 보이지 않는 건데?’
사비나는 정신을 집중하여 자신을 부르는 세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려 했지만, 귀를 기울일수록 숨소리와 심장 소리만 커질 뿐이었다.
소리를 흡수하는 적막한 숲.
하늘을 덮을 만큼 잎이 무성한 검은 사철나무.
걸어올 때는 축축한 진흙뿐이었던 길은 어느새 메마른 낙엽으로 빼곡하게 덮여 있어, 습기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이대로 몸이 굳어 버리는 걸까? 그러면 에르잔을 구하러 갈 수가 없는데……!’
에르잔의 이름을 떠올린 순간, 배 속에서 불길이 이는 것처럼 뜨거운 감각이 차올라 사비나는 몸을 비틀었다.
정확히는 그녀가 몸을 비튼 것이 아니라 그녀의 몸이 스스로 몸부림을 치는 것에 가까웠다.
아랫배에서 저릿한 감각이 느껴지고, 이어서 작은 바늘로 콕콕 찌르는 듯한 따끔거림이 느껴졌다.
“윽……!”
배앓이를 하는 것처럼 저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고통에 익숙한 사비나에게도 이런 종류의 통증은 생소했다.
배를 찌르는 듯한 통증에 겨우 적응했을 때는, 딱딱하게 굳어 움직이지 않을 것만 같던 하반신에 힘이 들어왔다.
아직 저릿한 손끝을 움직이자, 검지부터 새끼손가락까지 네 손가락이 한꺼번에 움츠러들던 것이 점점 손가락 하나씩을 놀릴 수 있게 감각이 되돌아왔다.
사비나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둔한 통증이 이어졌으나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주위에는 여전히 아무도 보이지 않았으나 쓰러지기 전처럼 제 숨소리나 심장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지는 않았다.
사비나는 커다란 나무에 손을 짚고 숨을 골랐다.
‘지금 내 안에 있는 것은 죽음의 저주, 욕망의 저주, 시간을 멈추는 저주, 가두는 거주…….’
사비나는 이제까지 가장 강력한 것이 죽음의 저주라고 생각했지만, 욕망의 저주에 가로막힌 것을 보면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닌 모양이다. 시간을 멈추고 가두는 저주에 일순 움직일 수 없게 되었지만 에르잔을 떠올린 순간 다시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욕망에서 출발해서, 분노와 증오를 거쳐 체념까지…… 그게 저주의 순환고리라고 그랬지.’
아페티트는 사비나가 <타인을 죽이지 않기를 욕망했기 때문에> 그녀의 힘이 통하지 않는 것이라 말했지만, 아페티트도 사비나와 같은 저주의 화신일 뿐 주술사는 아니다.
나자예프의 이름을 불러도 그가 다치지 않고, 카림의 손을 잡아도 아이가 화상을 입지 않았다.
사비나의 욕망은 벌써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그녀의 다음 욕망이 향할 장소는 어디인가.
“……에르잔……!”
늪 속의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