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 속의 불-131화 (131/189)

132화

“……그건 카이라트의 말이 맞다.”

“뭐? 에르잔. 너까지 무슨 소리야?”

“사비나 아가씨께서 내게 말씀해 주셨다.”

콘바야젠 백작의 정체는 차치하더라도 사비나가 그의 딸임을 카이라트가 어떻게 알았을까. 사비나가 직접 이야기했는지, 아니면 북쪽의 핵을 흡수하면서 무슨 문제가 생겨 정체가 드러났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방금 카이라트의 발언으로 인해 에르잔이 이 마을을 떠날 수 없는 이유는 더욱 공고해졌다.

사비나를 죽음의 화신으로 만들기 위해 이 마을이 저주의 제물로써 희생당한 거라면, 진실을 알게 된 마을 사람들이 그녀를 과연 내버려 둘 것인가.

콘바야젠 백작이 사비나를 구하러 온다면 도리어 복수를 하려 들지 않겠나.

에르잔이 매서운 눈빛으로 쏘아보자, 카이라트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가 헛기침을 했다.

“에르잔. 오해하지 말고 들어 주십시오.”

“오해할 소리를 하겠다는 거로군.”

에르잔이 핵심부터 짚어 내자 카이라트의 턱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번에는 그의 입술이 경련하는 것을 에르잔도 놓치지 않았다.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우리가 사비나를 어떻게 하겠다는 건 아닙니다.”

“사비나 아가씨를 핑계로 콘바야젠 백작을 이곳에 소환하는 게 목적이라는 소리군.”

“……벌써 15년이나 지난 일입니다.”

카이라트의 말에 카밀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15년 동안 저주받은 몸으로 살아온 그녀는 사비나가 저주를 흡수하기 전까지 내내 고통스러워했다.

카이라트도 맹인인 채로 침대에 내내 누워 살아야 했으니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15년이나 지난 일이 아니라, 15년 동안 겪은 일 아닌가?”

“귀족이 된 알렉세이가 데려온 병사들로 이 마을은 벌써 한 번 지옥을 겪었습니다. 이제 와서 누가 감히 그를 상대로 복수를 계획하겠습니까?”

“그럼 콘바야젠 백작을 모셔오라고 내게 부탁하는 저의가 뭐지?”

“저의라니요. 저는 그저…… 사비나가 걱정되고…….”

자기가 말하면서도 너무 거짓말처럼 들렸는지, 카이라트는 꿀꺽 침을 삼키고는 에르잔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사비나의 저주가 폭주해서, 또다시 이 마을이 혼란에 빠지는 것을 경계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수도로는 돌아갈 수 없다.”

“에르잔!”

“사비나 아가씨를 위해서도, 이 마을 사람들을 위해서도 돌아갈 수 없어.”

환자가 요양을 할 만한 곳이라고는 도무지 생각되지 않는 저주받은 마을.

이곳에 도착했을 때 처음 느낌 당혹감을 에르잔은 잊지 않았다. 그러나 사비나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던 것을 기억한다.

콘바야젠 백작이 사비나를 이곳으로 보낸 이유는 마을의 저주를 흡수해 그녀를 더 강력한 저주의 화신으로 만들기 위해서니까.

‘카이라트의 말대로 아가씨께서 저주의 통제능력을 잃었다면, 오히려 이 마을 전체를 집어삼킬 정도로 부추기겠지.’

그건 비극이 일어나게 해서는 안 된다. 제 욕망 때문에 기사도를 저버렸다고 한들 에르잔은 잔인한 성품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죽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사비나 또한 원하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살인을 저지르고 싶지 않다고 울면서 매달리던 그녀의 얼굴이 그린 듯 선명하게 떠올라, 에르잔은 검의 손잡이를 거머쥐었다.

그가 검을 뽑을 거라 오해했는지, 카이라트가 굳은 얼굴로 한 걸음 물러섰다.

“에르잔. 그만두십시오. 무모한 짓을…….”

“나는 사비나 아가씨를 구하러 가겠다.”

“그러니까 그건 사비나가 원하지 않는다고…….”

“상관없다. 내가 그걸 원하니까.”

에르잔의 단호한 대답에 카이라트가 눈을 부릅떴다. 늘 힘없이 휘청거리던 다리가 땅바닥에 고정된 듯 경직되었다. 다만 그의 눈동자와 입술만이 쉼 없이 떨리고 있었다.

에르잔은 눈빛이나 표정만으로 사람의 속내를 파악할 만큼 인간관계에 노련하지 않았으나, 기사훈련소에 있을 적 이와 비슷한 광경을 본 적이 있다.

걸레 빤 물에 교관의 차를 우리고는 절대 탄로 나지 않을 거라며 낄낄거리던 동기에게 교관이 직접 마셔 보라는 말을 했을 때, 그의 표정이 저러했다.

“카이라트. 네가 뭘 계획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네 뜻에 따를 생각이 없다.”

“제가 아니라, 사비나가…….”

“사비나 아가씨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그리 큰 소리가 아님에도 에르잔의 노성에 마치 땅이 진동하는 듯했다. 카이라트의 뒤에 서 있던 여자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연장을 거머쥐는 것을 보고, 카밀라가 에르잔의 뒤로 숨었다.

“야, 에르잔…… 어쩌려고 그래? 여기서 우리끼리 싸우면 사비나가 더 곤란해질 텐데…….”

“민간인을 상대로는 싸우지 않는다.”

“그럼 어떻게 돌파하려고?”

“카밀라. 지금 당장 오딜의 거처를 향해 뛰어라.”

“뭐?”

에르잔은 검을 뽑지 않았다.

아니, 뽑는 모습이 보이지 않아 그렇게 착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와지직 하고 울타리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광장의 흙바닥이 깊게 파였다.

'역시 한 번 본 것만으로는 완벽히 따라 할 수가 없군.'

오딜의 속도에 맞추면 정확도가 떨어진다. 오딜은 깔끔하게 울타리만을 잘라 내고 베는 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는데, 에르잔의 검은 울타리가 박혀 있던 땅 전체를 무식하게 잘라 내 버렸다. 에르잔이 힘을 싣는 방향을 중간에 틀어버리지 않았더라면 검이 부러졌을 것이다.

“에르잔, 뭘 하는 겁니까!”

“오른쪽으로 물러나라!”

에르잔의 칼날이 우물 옆에 있던 거목을 베어 냈다. 쾌청한 낮의 태양 빛마저 가릴 만큼 잎이 무성한 고목나무가 마치 구름의 무게에 짓눌리듯이 아래로 몸을 숙였다.

“으, 으악!”

성인 남자의 팔 둘레로도 세 아름은 될 법한 고목나무가 기울기 시작했다.

짓눌리면 그대로 압사당할 거라 판단한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나무가 쓰러지는 방향을 피해 오른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퍼석!

기울어진 고목나무가 돌무더기를 지나 세 채의 집을 깔끔하게 작살 내 버렸다. 카밀라와 카이라트의 집, 그리고 그의 연구실까지 커다란 고목에 깔려 완전히 박살이 나 버렸다.

“에르잔! 이게 대체…… 어라?”

심장이 입 밖으로 뛰쳐나올 듯한 공포감에서 가까스로 벗어난 카이라트가 에르잔을 불렀을 때, 그는 이미 자리에 없었다.

나무를 쓰러뜨려 사람들의 주의를 돌린 사이에 어딘가에 몸을 숨긴 것이리라.

카이라트는 당황하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디지? 교회에 숨어 있나? 아니면 숲을 넘어서?’

기사의 은신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는 모르지만, 에르잔 정도로 덩치가 크다면 움직이는 모습을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

필사적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카이라트의 눈에 동남쪽의 숲을 향해 뛰어가는 카밀라의 뒷모습이 보였다.

‘오딜에게 원군을 요청할 생각인가!’

낭패다. 카이라트는 입안을 깨물었다.

아직 오딜을 설득하지 못했다. 올가를 강간해 아이를 배게 한 것이 알렉세이이며, 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사비나라는 것을 알리면 오딜이 죽기 살기로 알렉세이를 처치하리라 판단했다.

그래서 에르잔은 수도로 보내 버리고, 알렉세이가 이끌고 온 병사나 주술사들은 사비나의 저주로 죽게 만들고, 알렉세이는 오딜이 처단하도록 만들 셈이었는데.

에르잔과 오딜이 먼저 만나 버리면, 오딜의 제일 목적은 <알렉세이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올가의 딸을 구하는 것>이 되어 버린다.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이런 제길……!”

카이라트는 일어나서 뛰어가려다, 발목이 꺾여 도로 고꾸라졌다.

저주의 영향을 받는 동안은 걷는 것이 다소 불편할 뿐 힘들지 않았는데, 저주에서 벗어난 지금은 아직 다리 근육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아 빨리 뛸 수가 없었다.

“다들 카밀라를 쫓아가세요! 어서!”

카이라트의 다급한 외침에 갈 길을 잃은 듯 머뭇거리던 무리가 다시 동남쪽을 향해 움직였다.

에르잔은 나무의 그림자에 숨어 그것을 지켜보다가, 카이라트가 광장을 벗어난 것을 확인하고 다시 북쪽을 향해 뛰었다.

‘시간이 얼마 없어. 어떻게든 이 숲을 건널 방법을 찾아야 한다.’

정화능력을 사용할 수 없게 된 것은 어째서일까.

숲을 통과할 수 없다면 아까 카밀라가 알려준 그 우물 속에 뛰어들어서라도 북쪽으로 건너가야 할까.

지하의 물길이 얼마나 복잡할지 모르는데 그것은 너무 무모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지리를 모르는 자신이 마을을 완전히 빠져나갔다가 멀리 돌아 북쪽으로 진입하는 건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었다.

초조해진 탓일까. 제 거친 숨소리보다도 심장이 뛰는 소리가 유달리 크게 들려왔다.

저를 가로막는 검은 숲의 전경을 살피던 푸른 눈동자가 느리게 움직였다. 풍경 전체를 바라보던 시야가 한 점에 집중되면서 나뭇잎 하나하나와 나무껍질의 모양, 흙 알갱이의 색이 서로 다른 것까지 코앞에서 관찰하는 것처럼 선명하게 들어왔다.

나뭇가지 위를 기어가는 개미의 움직임을 좇던 에르잔의 눈동자가 수풀 너머에서 어색하게 흔들리는 검은 인영을 포착했다.

“누구냐!”

상당히 키가 작은 것으로 보아 사비나는 아니다. 그렇다면 마을의 어린아이일까? 어쩌면 도망쳤다는 아페티트일지도 모른다.

에르잔은 두 눈을 부릅뜨고 넘어갈 수 없는 검은 숲의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검은 숲속에서도 유달리 어두운 인영은 지친 듯 나무에 기댄 채 벌레처럼 몸을 꿈틀거리고 있었다.

높이에 비해 이상할 만큼 부피가 크다 싶더니만, 아무래도 키가 작은 어린아이가 아니라 어른이 주저앉은 모양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그다음이었다.

숨을 쉬는 것조차 버겁다는 듯이 불규칙하게 흔들리던 어깨 너머로 고개가 기울면서, 머리가 떨어졌다.

아니, 머리라고 생각한 어깨 위의 검은 무언가가 벗겨지면서, 어둠 속에서도 선명한 백발이 눈에 들어왔다.

“로스카옌 신부님……?”

***

반쯤 무너진 탓에 출구가 비좁기는 했으나 빠져나오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사비나는 카림을 안고 있는 아페티트와 죽을상을 하고 있는 나자예프를 뒤돌아보며 세 사람의 상태를 확인했다.

카림과 아페티트는 비교적 멀쩡하지만, 나자예프는 몸의 반쪽을 쓸 수 없는 탓에 불편해 보였다.

“아페티트. 카림은 내가 안을게요. 당신은 나자예프를 부축해 주세요.”

“……제가 나자예프를요?”

“사비나! 너와 내가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라고 해서 나에게 일탈을 강요할 셈이야? 너 외의 여자가 필요 없다고 해서 남자를 원한다는 뜻은 아니라고!”

나자예프가 무슨 오해를 했기에 저리도 억울한 표?ㅐ막?절규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목소리만은 여전히 큰 걸 보아하니 부축하지 않아도 제 몸 하나는 가눌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비나는 얼른 사과했다.

“미안해요, 나자예프.”

“사비나. 이런 일로 사과하지 않아도…….”

“나자예프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사비나. 죽는 소리를 하면서도 당신 앞에서는 허세를 부리는 것을 보니 진창에 여덟 번은 더 굴러도 될 것 같습니다.”

“야! 아페티트!”

나자예프의 절규를 깔끔하게 무시한 아페티트는 카림을 바닥에 내려 주었다.

아페티트가 어색했던 카림은 나자예프를 흘끔 보았다가, 얼른 사비나 쪽으로 달려갔다.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카이라트가 마을 사람들을 포섭했다면 광장 쪽에도 인원을 배치해두었을 겁니다.”

“아직 우리가 토굴을 빠져나간 줄 모를 테니 잠시 동안은 괜찮지 않을까요?”

“그 잠시는 실랑이하던 사이에 지나 버렸지요. 당신은 저주를 무기로 휘두를 수 없고 인원 차이도 명백하지요. 대책 없이 나갔다가 붙잡히면 아까의 반복일 뿐입니다.”

“에르잔도 붙잡혔을까요? 무리하게 벗어나려고 시도하다가 부상을 입으면 안 되는데…….”

“당신 개가 어떻게 움직일지는 주인인 당신이 알겠지요. 한 번밖에 만난 적 없는 제게 물어본들 제대로 된 대답이 나오겠습니까?”

환각을 볼 때는 의심스러울 만큼 다정했는데, 욕망의 핵을 잃어버린 아페티트는 상당히 말씨가 신랄한 편이었다.

사비나는 에르잔을 개 취급하는 아페티트의 발언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지금은 그와 말싸움할 여유가 없었다.

아직도 억울한 표정으로 뭔가를 중얼거리는 나자예프를 뒤로하고, 사비나는 카림에게 물었다.

“카림.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고, 숲을 빠져나가 몸을 숨길 만한 곳이 없을까?”

“숨을 곳이라고요?”

“응. 광장은 사방이 탁 트여 있어서 눈에 띄고, 나와 에르잔이 머물던 오두막에 갔다간 금방 잡힐 거야.”

에르잔을 붙잡았다면 교회에도 분명 감시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정 반대편인 남쪽까지 들키지 않고 가기란 너무나도 멀었다.

사비나의 질문에 카림은 회색 눈동자를 바쁘게 굴렸다.

사비나에게 손을 댔다가 화상을 입은 기억 때문인지, 아이는 아직 그녀와 한 걸음 정도를 남기고 떨어져 있었다.

“가면 안 된다고 했는데, 괜찮을까요?”

“응?”

카림은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사비나를 올려다보더니 손가락으로 숲 저편을 가리켰다.

“저쪽 첨탑에는 무서운 사람이 살고 있어서, 아무도 가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그곳에 숨으면 아무도 못 찾을 거예요.”

카림은 아페티트가 머무는 곳으로 오해하던 장소.

바르셀다가 지하에 감금되어 있던 출입금지 구역.

원래 이 마을의 교회가 있었던 곳.

동쪽 첨탑이다.

늪 속의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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