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예감이 좋지 않다.
사비나가 로스카옌 사제와 함께 마을의 북쪽으로 나선 것은 새벽 일찍일 터인데, 아직까지 숲 건너편에서는 한 사람도 나오지 않는다.
사비나나 로스카옌 사제에게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어서라면 도움이 되지 않는 나자예프나 다른 마을 사람을 보내 한마디 언질이라도 줄 터인데, 그러지 않는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카밀라. 너는 여기서 기다려라. 나는…… 오딜을 찾아가서, 숲의 반대편으로 돌아서 들어갈 방법이 있는지 찾아야겠어.”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검은 숲에서는 아무도 나오지 않았는데, 어느새 카이라트가 모르는 사람들을 이끌고 광장 쪽에 서 있었다.
“카이라트……!”
“어, 다들 무사한 거야? 어떻게 빠져나왔어?”
교류가 끊어졌다고 한들 시간이 멈춘 15년 동안 외모가 변하지 않은 까닭에 마을 사람들을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카밀라가 의아한 얼굴로 다가가자, 카이라트는 제 뒤에 선 여자들에게 물러나라는 듯이 손짓하고는 검은 숲을 가리켰다.
“북쪽 핵을 흡수하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에르잔. 당신은 바로 수도로 가서 콘바야젠 백작께 상황을 알리세요.”
“무슨 문제가 생겼다는 거지? 사비나 아가씨께서 혹시……!”
“사비나는 무사합니다. 다만 그녀가…….”
에르잔이 가장 걱정하는 바가 무엇인지 아는 카이라트는 서둘러 사비나의 안부를 전하고는, 말을 돌렸다.
“불어난 저주의 힘을 감당하지 못해서, 일대가 전부 죽음의 늪으로 변해 버렸어요.”
“뭐? 그럼 다른 사람들은? 로스카옌 신부님이랑, 나자예프가 같이 갔는데……!”
“이만큼의 인원을 이끌고 나오는 것도 필사적이었거든. 나자예프는…… 휘말려서 죽었어.”
“나자예프가 죽었다고? 그게 무슨 미친 소리야? 죽여도 안 죽을 놈이 왜 죽어?”
“카밀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카이라트가 상황을 감추기 위해 둘러댄 거짓말로, 나자예프는 물론 죽지 않았다.
그러므로 아무도 그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거나, 그걸 중요하지 않은 일로 취급하는 것 또한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러나 숲 너머 북쪽의 상황을 제 입맛대로 바꿔 전달하는 데 별 볼일 없는 남자의 죽음만큼 유용한 수단은 없었다.
카이라트는 평소 잘 보이지 않는 비통한 표정까지 지어가며 에르잔에게 고개를 숙였다.
“미안합니다, 에르잔. 나는…… 사비나가 사람들을 데리고 도망쳐 달라는 부탁을 들어주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듣지도 않은 말을 지어내는 카이라트의 눈동자가 바쁘게 굴러갔으나, 시력을 잃은 기간이 길었던 탓에 원래 초점이 불분명했던 카이라트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에르잔과 카밀라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사비나 아가씨는 그럼 북쪽에 계속 계시는 건가? 다른 희생자는?”
“모르겠습니다. 너무 상황이 급박해서…….”
“안 되겠군. 무슨 수를 써서라도 숲을 건너가야겠어.”
“에르잔, 기다리십시오!”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 숲으로 뛰어들려는 에르잔을 불러 세우기 위해, 카이라트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을 사용했다.
“당신이 절대 숲을 건너오지 않게 해 달라고, 사비나가 부탁했습니다!”
“사비나 아가씨가?”
“정화 체질이라고 해서 만능은 아니지요. 그 사비나도 통제를 잃을 만큼 위험한 저주니까요. 사비나는, 에르잔 당신이 다치지 않도록 말려 달라고 내게 부탁했습니다.”
“아가씨께서, 부탁했다고…….”
“예. 당신이 숲으로 뛰어들었다가 또다시 다친다면, 사비나가 얼마나 상처를 입을지 알지 않습니까.”
“…….”
에르잔도 알고 있었다. 사비나가 에르잔을 걱정하는 것은 그저 그녀가 다정한 사람이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그녀를 감싸고 등에 부상을 입었을 때, 사비나가 두 눈이 빨개지도록 펑펑 울었던 것도 기억하고 있다.
그러니 카이라트의 말대로, 죽음의 저주가 스스로 통제할 수 없을 만큼 강해진 상황이라면 에르잔이 오지 못하도록 막을 테지만.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요. 에르잔은 에르잔이 원하는 일을 하면 돼요.>
에르잔이 원하는 일을 하면 된다고.
그래도 된다고, 사비나는 분명히 말했다.
의무보다 욕망을 앞세우는 인간은 자신을 합리화하는 명분을 찾는다.
그날 사비나가 칭얼거리듯 속삭인 말은 에르잔이 그녀의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 타당한 명분으로 탈바꿈했다.
그녀가 속삭인 말을 변명 삼아 의무를 내버리다니, 스스로도 저열하다는 자각이 있었으나 에르잔은 자신의 욕망을 감추지 않았다.
사비나. 그의 주인.
에르잔이 있어도 되는, 유일한 장소.
그녀를 잃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가령 에르잔이 지금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고, 그저 콘바야젠 백작가로 한시바삐 달려가 도움을 요청하는 것만이 사비나를 구하는 유일한 방법이라 할지라도.
에르잔은 도움을 요청하러 떠나기보다, 사비나를 구하러 가고 싶었다.
저주에 살점이 녹고 뼈가 으스러져 죽게 되더라도 그녀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사비나 아가씨. 저는…… 더 이상 당신의 기사가 아닙니다.’
주군의 명령보다 자신의 욕망을 우선시하는 자는 더 이상 기사가 아니다.
에르잔은 기사도를 지키기보다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이기를 바랐다.
합리와 논리와 이성은 욕망의 불꽃을 앞에 둔 부나방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했다. 에르잔은 검을 허리춤에 갈무리하고, 카이라트를 내려다보았다.
“수도로는 돌아갈 수 없다.”
“……뭐라고요?”
“사비나 아가씨가 어떤 상태인지를 봐야 해. 콘바야젠 백작께 연락을 취하는 것은 그다음이다.”
“에르잔. 사비나는 당신이 숲을 넘어오지 않기를 바란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들이 아니라, 콘바야젠 백작의 힘입니다.”
카이라트의 말에는 타당한 명분이 있었다. 저주에서 겨우 벗어난 마을 사람들.
저주를 정화할 수는 있으나 어째서인지 검은 숲에는 진입할 수 없는 에르잔.
저주에 익숙한 로스카옌 사제는 행방불명인 지금 상황에서, 사비나를 구할 수 있는 것은 콘바야젠 백작밖에 없다.
그는 사비나의 아버지면서, 저주의 화신로서의 그녀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또한 황제의 대리인이다. 콘바야젠 백작이라면 권력을 이용해 수많은 병사와 주술사를 동원하여 사비나를 구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문의 영광을 위해서, 아버지를 위해서 나는 사람을 죽여 왔어. 살인자로…… 학살자로, 계속…….>
자신의 딸을 저주의 화신으로 만드는 비정함은 차치하더라도, 권력을 쥐는 데 가장 중요한 가문의 주술사를 호위하는 데 에르잔에게는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았다.
겨우 얼굴을 두어 번 봤을 뿐인 신예기사에게 보물과도 같은 존재를 덜컥 맡기는 행태는 수상쩍기 짝이 없었다.
사비나는 자신이 불사신이며, 자신에게 닿는 이들은 저주에 익숙한 자가 아닌 한 모두 죽음에 이르기 때문에 걱정할 일이 없다고 그랬지만.
그녀가 딸이라는 사실조차 숨기고 있던 콘바야젠 백작이 사비나를 구하고 과연 조용히 물러날까.
‘비밀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한 사람도 남김없이 죽이고 말겠지.’
에르잔에게는 저주가 통하지 않지만 그도 부상은 입는다. 수많은 병사들을 상대로 난투를 벌인다면 과연 목숨을 부지한 채로 생환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사비나가 구한 마을이다. 사비나가 구한 마을 사람들이다. 그들을 죽게 하고 싶지 않았다.
사람을 죽이는 것밖에 하지 못한다며 스스로 자책하던 그녀가, 처음으로 사람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희망과 행복을 얻게 해 준 장소다.
그녀가 일궈 낸 소중한 장소를 엉망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떠날 수 없다. 마차도 없이 수도까지 다녀오려면 시일을 많이 소요할 텐데, 그사이에 아가씨께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 않나.”
“에르잔. 사비나는 죽음의 화신입니다. 저주의 통제능력을 잃었다고 해서 죽음에 이르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확신하지?”
“그건 제가, 오랫동안 주술 연구를 해 왔으니…….”
“이 작은 마을에서 연구자료를 훔쳐 간 도둑이 누구인지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마을의 시간이 멈춘 원인마저 확신하지 못한 채로 15년을 허비하고, 친동생마저 기만한 네 말을 무슨 수로 확신할 수 있나?”
에르잔의 지적에 카이라트의 얼굴이 구겨졌다.
에르잔은 자신이 떠날 수 없는 이유를 대기 위해 떠오르는 것을 말할 뿐이었으나, 깊이 생각하거나 요령을 피우지 않아도 바로 쏟아 낼 수 있다는 건 그만큼 명확한 진실이라는 뜻이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던 카이라트가 잠시 주춤한 사이, 내내 끼어들 타이밍만 엿보고 있었는지 카밀라가 뛰쳐나와 삿대질을 했다.
“그래. 카이라트, 네가 뭘 안다고 명령질이야? 에르잔이 수도에 다녀오는 데 며칠이나 걸릴 줄 알고? 그사이에 저주가 퍼지면 우리는 싹 다 죽는 거야!”
“카밀라. 나는 가장 합리적인 방식으로 최선의 대안을 말했을 뿐이야.”
“합리고 뭐고 다 필요 없으니까 숲으로 들어갈 방법이나 찾아! 나자예프까지 죽고, 사비나가 얼마나 궁지에 몰렸으면 너한테 그런 부탁을 했겠어?”
물론 마을의 불한당인 나자예프는 죽어 없어져 주는 편이 차라리 마을의 평화에 도움이 되는 존재였으나, 사비나는 그런 쓰레기 같은 인간에게도 자비를 베풀었다.
자신의 힘이 폭주한 탓에 나자예프가 목숨을 잃었다면 그녀가 얼마나 자책할까.
게다가 로스카옌 사제까지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하니, 지금 숲 너머에서 사비나는 홀로 감당할 수 없는 저주에 짓눌려 불안해하고 있을 것이다.
카밀라는 또다시 저주에 걸리는 게 두려웠다.
당연히 죽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자신을 구해 준 사비나가 혼자서 무서워하는데, 에르잔을 수도에 보내 놓고 손 놓고 있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사비나가 우리 마을을 구해 줬잖아. 그럼 우리끼리라도 뭘 어떻게 해 봐야지!”
“카밀라. 우리 힘으로는 할 수 있는 게 없어.”
“해 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알아? 저주에 한 번 걸렸다 풀려났으면 뭔가 달라지는 게 있어야 할 거 아니야. 넌 은혜라는 것도 몰라?”
예의는 없어도 양심은 있었던 카밀라는 사비나를 두둔했다.
그녀가 저주의 힘으로 교회 바닥을 썩게 만들고, 오딜의 손바닥에 구멍을 내는 등 무시무시한 힘을 사용했던 건 사실이다.
그래서 문득 사비나가 두렵게 느껴져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멀리서 떠나는 모습만 바라보았다.
그러나 사비나가 두려운 것과, 그녀의 도움에 감사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사비나가 구해준 목숨이잖아. 이 지긋지긋한 지옥에서 우리를 꺼내준 게 사비나잖아! 에르잔한테 떠넘기지 말고 뭐라도 방법을 찾아! 그게 한평생 주술연구만 하다가 우리 마을을 이 꼬라지로 만든 네가 해야 하는 일 아니야?”
“우리 마을이 이렇게 된 건 사비나 때문이야!”
쏘아붙이는 카밀라에게 진저리치듯 고개를 털며 카이라트가 고함쳤다.
카밀라는 잠시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깜박였다가, 카이라트가 아차 싶어 혀를 차는 것을 보고서야 안색을 창백하게 했다.
“그게, 그게 무슨 소리야?”
“사비나는 알렉세이, 우리 마을을 이렇게 만든 콘바야젠 백작의 딸이야. 자기 딸인 사비나를 죽음의 화신으로 만들기 위해, 알렉세이가 우리 마을을 제물로 바친 거라고.”
“아니, 잠깐만. 딸이라니? 그냥 신세를 지고 있다고…… 그, 그보다! 그 알렉세이가 이 알렉세이랑 같은 사람인 줄은 어떻게 아는데?”
도망친 알렉세이가 귀족이 되었다는 것도, 그 귀족이 보낸 주술사 사비나가 단순한 친척이나 피보호자가 아닌 피붙이라는 것도 예상치 못했던 카밀라는 말을 더듬으며 뒷걸음질을 치다가 에르잔의 발을 밟았다.
에르잔은 그녀의 실수에 반응하는 대신, 조용히 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건 카이라트의 말이 맞다.”
늪 속의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