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 속의 불-129화 (129/189)

130화

“이쪽으로 나가요. 토굴 밖에는 감시하는 사람이 있을 테니까.”

“이런. 빠져나가시려고요? 누가 확인하러 오면 어떡하시려고요?”

“그러니까 빨리 나가야죠.”

“이 아이가 미끼일 가능성은? 탑 밖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우리가 나오는 타이밍에 맞춰 완전히 매립시키려는 것일지도 모르지요.”

“카림은 그런 짓 안 해요.”

어머니가 죽은 연못 주위를 울면서 배회하던 어린아이.

제 어미를 구해 달라며 울면서 매달렸지만, 도와주지 않는다고 원망하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화가 나서 욕을 하지도, 제 몸에 깃든 저주로 공격하지도, 연못으로 떠밀지도 않았다. 카림이 사비나 일행을 속여 탑의 입구로 유인할 리는 없다.

‘카이라트는 에르잔과 로스카옌 신부님을 붙잡으러 갔을 거야. 혼자서는 무리니 분명 다른 사람들을 데려갔겠지.’

토굴을 감시하는 사람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알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 놓았겠지만, 이 북쪽 탑으로 빠져나간다면 멀찍이 떨어진 토굴 밖의 감시인은 그들이 사라진 것을 알아차릴 방도가 없다.

사비나는 쓰러졌다기보다는 마치 드러누워서 휴식을 만끽하는 중인 듯한 아페티트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아페티트. 카림을 안아 주세요.”

“제가요?”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았으니, 내 피가 카림에게 닿으면 무슨 영향을 미칠지 몰라요. 당신이 데리고 나오세요.”

“제가 왜 그래야 하지요?”

“같은 마을 출신이잖아요. 그럼 한쪽 팔도 못 쓰는 나자예프에게 맡기겠어요?”

“사비나. 내 품은 너 전용이야!”

나자예프는 필사적으로 의견을 피력하였으나 그 목소리는 사비나에게도, 아페티트에게도 닿지 못했다. 카림만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자예프를 흘끔, 쳐다보았다가 그의 검게 물든 한쪽 팔을 보고 히익, 하며 한 걸음 물러났을 뿐.

“우선 이곳을 빠져나가요. 에르잔에게 우리 상태를 알려야 하니까.”

“알린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저주에서 벗어난 인간을 불태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 한 명 죽여 본 적 없는 개가 칼을 휘두른다고 한들 몇 명이나 죽일 수 있을지…….”

“그만! 나가서 이야기해요.”

우선은 빠져나가는 것부터. 그리고 숲을 들키지 않고 통과해, 교회의 상황을 알아봐야 한다. 카이라트가 로스카옌 사제까지 감금한 상태라면 사비나가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은 카밀라와 오딜뿐인데, 두 사람이 과연 진실을 알게 된 후에도 사비나에게 도움을 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카밀라. 내 아버지가 이 마을에 있던 알렉세이가 아닐 거라며 카이라트 앞에서는 전면으로 부정했지만…….’

이렇게 증거가 속속들이 나오는 지금도 그럴까. 새벽에 자신을 보러 나왔다가, 알아보자마자 얼른 돌아가 버린 건 사비나를 경계해서가 아닐까. 마음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이 상황이 되어서도 카밀라가 자신을 신뢰해줄까. 친구라고 여겨 줄까. 사비나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카림은 나를 만나러 와 주었잖아.'

사비나가 처음으로, 자신의 힘으로 구해 낸 어린아이.

그녀에게 처음으로 <고맙다>고 말해 준 어린아이.

한동안 떨어져 이 마을 북쪽에 머무느라 이렇다 할 교류를 나누지 못했음에도, 카림은 사비나를 보자마자 그녀를 알아보았다. 페고라에게 얻어맞았을 때는 그녀를 걱정해 주었다.

“카림. 고마워.”

사비나는 계단을 오르려다 말고, 카림을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네 엄마를 구하지 못했는데도, 구해 줬다고 말해 줘서 고마워.”

“누나?”

“너를 상처 입혔는데도, 나를 걱정해 줘서 고마워.”

“……누나…….”

“모두가 나를 의심하고 경계하는데도, 나를 만나러 달려와 줘서 고마워.”

“사비나. 난 너를 의심한 적 없어!”

아직 바닥에 뻗은 채인 나자예프가 소리쳤으나 사비나는 카림에게 생긋 웃어 주고는, 서둘러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반쯤 무너져 내린 데다 군데군데 벽돌이 떨어져 엉망이 되었음에도, 옷이 더러워지거나 상처 나는 걸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는 듯이 재빨리 올라갔다. 사비나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지자 나자예프가 당황해서 일어났다. 아직 비틀거리는 그를 카림이 걱정스러운 듯이 바라보자, 아페티트가 카림을 훌쩍 안아 들었다.

“애들한테 걱정이나 끼치고. 한심하군요, 나자예프.”

“뭐야. 내가 언제 걱정을 끼쳤다고…….”

“아가씨도 카림도, 당신에 비하자면 한참 어린아이 아닙니까?”

“야, 아페티트! 나는……!”

아직 창창한 23살이라고 말하려다가, 나자예프는 딱 입을 다물었다. 15년간 시간이 멈춰있었다고 해서 정말로 세월이 흐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사비나 앞에서는 동년배라며 친근하게 굴었지만 그것도 그녀의 정체를 모를 때나 가능했던 일. 사비나가 알렉세이의 딸인 이상 그녀에게 이성으로 보일 리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물론 알렉세이의 정체는 사비나가 나자예프를 이성으로 인식하는가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지만, 나자예프는 혼자로 결론을 내리고 납득했다.

“말하지 않아도 내가 한심하다는 거 아니까, 얼른 카림이나 데리고 나가. 사비나가 부탁한 거잖아.”

“한심하기만 합니까? 멍청하지요. 하다못해 성격이라도 좋으면 몰라, 말도 행동도 경박할뿐더러 인성마저 재활용이 안 되는 폐기물인 것을.”

“너한테 듣고 싶은 말은 아니다? 아페티트 너도 만만치 않은 변태면서.”

“제가요?”

“그래! 너 한밤중에 이웃집에서 개나 양 슬쩍해 가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았어? 다 알아! 짐승을 데려다가……!”

“아이가 듣고 있습니다.”

“이제 와서 상식인인 척하네! 발정 난 난봉꾼은 내가 아니라 너한테 붙어야 하는 별명이야, 이 추잡한 변태야!”

“……발정이 났다고요?”

아페티트는 나자예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했으나, 굳이 물어서 그가 무엇을 오해하고 있는지 알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뭐라고 오해한들 정정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어느 쪽이든 카림에게 들려 줘도 괜찮은 이야기는 아닐 터였다. 아페티트는 나자예프를 무시하고, 계단으로 올라갔다.

“이런. 확실히 인간 몸으로는 걷는 게 힘드네요…….”

“언제는 인간이 아니었던 것처럼 말한다?”

“저주의 화신이었을 때는 근육을 사용할 일이 별로 없었으니까요.”

머리카락으로 타인만 조종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도 조종했던 걸까. 나자예프는 조금 궁금했으나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벽에 머리를 부딪치는 바람에 묻지 못했다. 아페티트에게 안겨 가던 카림이 놀라서 힉 숨을 삼켰다.

“혼자서는 계단도 못 오릅니까? 잡아 드릴까요?”

“됐거든? 나는 남자 손 같은 거 안 잡아.”

이마에서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나자예프는 오히려 홀가분하다는 듯이 피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 넘기고는, 벽을 짚으며 계단을 올랐다.

검은 머리에 붉은 피. 붉은 눈의 나자예프.

붉은 머리에 황금색 눈동자의 아페티트.

수십 년을 한 마을에 살면서 이토록 많은 대화를 나눈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입만 열면 서로를 욕하는 소리밖에 하지 않는데도 묘하게 대화하는 게 싫지는 않았다.

아. 타인과 이토록 솔직하게 속내를 보이는 대화를 나누는 게 얼마 만이었던가.

아마도 두 남자 모두 같은 것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아페티트와 나자예프가 서로를 욕하면서도 왜 즐거워 보이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카림은, 자신을 안고 있는 아페티트가 어색하다는 듯이 어깨를 움츠리고 얌전히 안겨 있었다.

24. 침묵의 시간은 끝났다

우물이 부서지면서 더 이상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을 확인한 에르잔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금은 형태를 멀쩡히 유지하고 있지만, 충격을 가한다면 집이든 울타리든 산산조각으로 부서질 것처럼 위험해 보였다.

에르잔의 힘이 강력하기 때문은 아니다.

15년 동안 시간을 멈추는 저주에 의지하느라 원래의 형태를 유지하는 법을 잃어버린 것처럼, 적막한 마을의 풍경은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덧없어 보였다.

“에르잔. 왜 우물을 부쉈어? 막히면 어쩌려고!”

“카밀라. 흥분하지 마라.”

부서진 우물을 가리키며 발을 쿵쿵거리는 카밀라를 진정시키려는 듯, 에르잔이 손을 내저었다.

“진정해라. 느낌이 안 좋아.”

그렇게 세게 친 것도 아닌데 우물이 부서졌다. 다른 건물들도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다.

어쩌면 사람도 충격을 받으면 급사할지 모른다. 에르잔은 꼭 터지기 직전의 풍선처럼 방방거리는 카밀라가 위태롭게 느껴졌으나, 그녀를 달랠 어떤 방법도 알지 못했기에 당혹스러웠다. 행동으로 진정시켰다간 혹 잘못 힘을 주어 다치게 할까 문제였고, 그저 말로 타이르기에는 에르잔의 언변이 그리 좋지 않았다. 결국 ‘진정하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에르잔이 진심으로 곤란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는지, 카밀라는 불평하던 것을 곧 그만두고 흠흠 목을 가다듬으며 치맛자락을 털었다.

“그래서 에르잔. 어떻게 하려고?”

“사비나 아가씨의 곁으로 가야 하는데…….”

“그러니까 우물이 유일한 길이었는데 네가 방금 막아 버렸잖아.”

에르잔은 마을 북쪽으로 가 본 적이 없었다. 원래 두 사람이 기거하던 동쪽 오두막이나, 지리를 알고 있는 서쪽 교회라면 모를까, 숲 밖으로 빠져나갔다가 어디에 어떻게 틀어박혀 있는지 알지도 못하는 마을 북쪽까지 돌아가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에르잔은 자신을 들여보내 주지 않는 검은 숲을 노려보았다.

‘대체 저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지?’

늪 속의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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