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사비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박을 풀어주었다. 팔 한쪽을 쓰지 못하는 나자예프보다는 자신이 푸는 쪽이 더 나으리라 판단했지만, 묶는 것도 푸는 것도 그녀에게는 생소한 터라 어디를 당겨야 매듭이 풀리는지를 알 수 없어 결국 나자예프가 옆에서 가르쳐주었다.
“사비나가 귀족은 귀족이구나. 묶인 끈 푸는 것도 혼자서 못 하고.”
“미안해요…….”
“아니. 나무라려고 한 말은 아니야. 네가 고생 안 하고 귀하게 자랐다면 다행이지.”
사비나가 매듭을 푸는 방법을 몰랐던 건 콘바야젠 저택을 나서기 전까지 옷을 입어본 적이 그다지 없었기 때문이며, 귀한 대접과는 전혀 연이 없는 취급을 받고 자랐으나 굳이 말하지 않았다. 귀족 가문에서 주술사이자 저주의 화신으로서 아비의 정적을 제거해야 했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나자예프가 가늠하지 못하는 것이 차라리 다행이었다. 사비나는 자신이 경험한 끔찍한 일을 누군가가 알아차리는 것조차 싫어했으니까.
“피부도 곱고, 손에 굳은살 하나 없고, 손톱도 매끈하고…… 그런 걸 보면 알렉세이 형이 너를 아끼지 않은 건 아닌 것 같은데, 왜 널 이곳에 보냈는지 도무지 이해를 못 하겠어.”
사비나의 외모가 멀쩡한 건 어떤 상처를 입어도 금방 낫는 체질 덕분이었으나, 이번에도 사비나는 굳이 사실을 정정하려 들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아버지는 내가, 여기서 휴식을 취하는 게 좋을 거라고 했어요.”
“우리 마을은 휴양지와는 거리가 멀지 않아?”
기가 막힌다는 듯이 되묻는 나자예프와 사비나 사이에 냉큼 아페티트가 끼어들었다.
“이 아가씨는 죽음의 화신이니까요. 이 마을의 저주를 빨아들이면 저주의 힘이 강해지리라 판단한 거겠죠.”
“그게 무슨 휴식이야!”
“충전이라고 할까요? 아무리 강한 저주의 힘도 남용하면 언젠가 바닥이 나는 법입니다.”
“사비나를 물건 취급하지 마!”
“이 아가씨를 물건 취급한 건 제가 아니라 알렉세이입니다.”
나자예프와 아페티트가 왜 갑자기 언쟁을 벌이는 지는 알 수 없었으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남들이 주고받는 것이 달갑지 않았던 사비나는 두 사람을 만류했다.
“그만해요, 나자예프, 아페티트. 그보다 여기서 빠져나갈 방법을 찾아야죠.”
“아가씨의 개가 이곳에 있었더라면 힘으로 뚫고 나갔을텐데 말이죠. 아니, 하다못해 오딜이나 바르셀다였더라도 감시를 쓰러뜨리고 나가는 게 어렵지 않았을 텐데, 하필 함께 잡혀온 게 쓸모 없는 나자예프라서 가망이 없군요.”
“야, 아페티트. 내가 너보다는 키 크거든?”
“크면 뭘 합니까? 실속이 있어야지.”
“누가 들으면 너는 실속있는 줄 알겠다? 마을 사람들이 기피하는 건 너나 나나 마찬가지야!”
“기피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기는 했군요? 매번 노래나 흥얼거리면서 손도끼를 휘두르며 다니기에 멍청해서 모르는 줄 알았습니다.”
“야!”
“그만, 그만하라니까요!”
대책을 논의해야 하는데 왜 자꾸 말싸움으로 번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사비나는 우선 구슬리기 쉬운 나자예프에게 먼저 호소했다.
“나자예프, 그만 하세요. 지금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니잖아요.”
“이젠 우리라고 묶어주는구나, 사비나. 서로의 마음을 깨닫자마자 냉혹한 진실 앞에 가로막히다니 우리 운명도 참 얄궂다니까.”
“깨달을 마음 같은 거 애당초 없었으니까 저는 빼 주고요, 아무튼 얌전히 있으세요.”
약간의 감격과 서글픔이 담긴 촉촉한 눈빛을 외면하며 사비나는 아페티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페티트. 당신 힘으로는 여기서 빠져나가는 게 불가능한가요?”
“아가씨께서 제 <욕망>을 전부 가져가 버렸는데, 제가 무슨 수로 능력을 부립니까? 이제 전 그저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제게 욕망을 건네주신다면, 밖을 지키는 이들을 조종해 보이겠습니다만.”
“……그건 안 돼요.”
저주의 힘을 이용해 타인을 뜻대로 부리는 것이 아페티트의 목적인 이상, 누가 얼마나 큰 피해를 입을지도 모르는데 그에게 욕망의 저주를 되돌려줄 수는 없다. 사비나는 여기서 더 이상 희생을 늘릴 생각은 추호도 없없다.
“뭐, 저도 크게 기대는 안 했습니다. 제가 빠져나가기도 전에 아가씨의 <죽음>이 이곳을 덮어버리면 저도 사라지고 마니까요.”
사비나는 아페티트의 욕망을 흡수하기 전, 바닥이 녹아 늪처럼 될 정도로 짙은 죽음의 저주가 제 몸에서 흘러나오던 것을 떠올렸다. 죽음이 두려웠던 아페티트는 욕망을 포기하고 물러났지만, 욕망의 저주를 흡수할 때의 상태가 재현된다면 이 토굴은 사비나의 저주에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아페티트가 아무리 재빨리 도망치더라도 상당한 타격은 입을 것이고, 나자예프는 손 쓸 틈도 없이 죽게 되겠지.
“아페티트. 내 몸에 닿거나, 내가 이름을 불러도 저주에 걸리지 않게 된 것이…… 당신 욕망을 흡수한 것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욕망을 원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당신이 바라는 대로 된 것뿐이지요.”
“내가 죽고 싶다고 했는데, 불사의 몸이라서…… 저주가 상쇄되어 사라진 걸까요?”
사비나가 섬뜩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걸 보고 나자예프가 기겁했다. 그러나 그가 끼어들기도 전에 아페티트가 나긋하게 덧붙였다.
“아가씨의 욕망은 그게 아닐 텐데요.”
“하지만 나는 다른 건 바란 적이…….”
“가장 근본적인 욕망을 따르는 법이거든요, 저주라는 건.”
가장 근본적인 욕망.
아페티트는 시체를 움직이는 네크로맨서가 되기를 원했지만, 그가 진정으로 욕망했던 것은 <시체>가 아니라 무언가를 <조종>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페티트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이용해 타인을 꼭두각시처럼 부리는 힘을 얻었다. 다만 항시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것은 아닌 듯했고, 일회성인 듯했지만.
“아가씨께서 죽음을 욕망한 이유가 있겠지요?”
사비나가 죽고 싶어한 것은 살아있는 것이 괴로워서였다.
그녀는 늘 아버지에 의해 누군가를 죽이는 삶을 반복해왔으니까.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진 이유. 죽음을 열망하게 된 이유. 죽음에 대한 욕망보다 더 앞서 있는 것.”
사비나가 괴로워한 이유.
타인을 죽이는 힘을 지녔기 때문에.
그녀의 몸에 닿으면 살이 썩어들어가고, 그녀가 힘주어 이름을 부르면 병에 걸리며, 그녀의 피를 초상화에 묻히면 죽어버렸기 때문에.
“……나한테 닿아도, 죽는 사람이 없기를 바랐어요.”
“그리고요?”
“내, 내가 이름을 불러도 병에 걸리지 않기를…….”
“그게 아가씨의 욕망 아닐까요?”
아페티트의 지적에 사비나는 어깨를 움츠렸다.
그랬다. 사비나가 죽음을 원했던 것은 <죽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사람을 죽이는 삶을 반복하고, 그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절망해서였다.
이 마을에 와서, 자신의 저주가 누군가를 해치는 게 아니라 구하는 일에 쓰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얼마나 기뻤던가.
제 몸에 닿아도 병들거나 죽지 않는 에르잔을 만나 얼마나 행복했던가.
사비나가 진정으로 원한 것은, 그녀의 욕망은, 죽음이 아니었다.
자신의 힘 때문에 누군가가 죽지 않는 것이었다.
“그럼 어쩌죠? 아버지가 군대를 이끌고 오면, 막을 방법이 없어요. 게다가……!”
사비나가 더는 죽음의 화신이 아니게 된다면, 아버지에게 그녀의 이용 가치는 없다.
사비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믿지 않았다. 정확히는, 오해하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더는 사람을 죽일 수 없게 된 것을 안다면 그녀를 죽이고 다른 저주의 화신을 찾거나, 억지로 누군가에게 욕망을 떠넘기고 다시 죽음의 화신으로 되돌릴 것이다.
'나는 저주를 통제할 수 없어. 그리고 아페티트의 저주까지 흡수하면서 내 저주의 힘은 굉장히 강해졌으니까…….'
지금 사비나의 몸에서 죽음의 저주가 흘러나오지 않도록 꽉 틀어막고 있는 것은 욕망의 저주다.
이 욕망의 저주가 사라지면, 그 순간 폭발하듯 흘러나온 죽음의 저주가 이 마을을 집어삼킬 것이다.
15년 전, 그녀의 아버지에 의해 불에 타고 시체가 산같이 쌓여 시간이 멈춰버린 고향을, 이번에는 그녀의 손으로 끝장내는 비극이 일어날 것이다.
그것만은 막고 싶었다.
“어쩌죠? 내가 도망치지 않으면, 마을 사람들이 위험해질 텐데. 여기서 나갈 방법이 없으니…….”
“아가씨께서 살욕을 품으면 다시 사람을 죽일 수 있게 될 겁니다.”
“미쳤어요? 그럴 생각 없다고 했잖아요!”
“당신에게 죽으나, 알렉세이가 보낸 병사들 손에 죽으나, 어차피 죽는 건 매한가지인데요.”
“그렇게 놔두지 않을 거예요.”
“아가씨. 의지로 욕망을 제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답니다. 인간의 욕망은 결코 사라지는 법이 없지요.”
사비나에게 욕망의 저주를 건네줌으로써 이제 평범한 인간이 되었다고 말하면서도, 그녀를 바라보는 아페티트의 미소는 여전히 가면 같아고 음성은 농염했다. 사비나는 자꾸 제 귓전에 속삭이려 드는 아페티트를 밀어내며 자세를 바로 했다.
“내가 저녁까지 돌아가지 않으면, 로스카옌 신부님이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까요? 그럼 에르잔에게…….”
“카이라트가 나선 걸 봐서는 로스카옌도 붙잡혔을 것 같은데요.”
“네? 왜요! 로스카옌 신부님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진실을 알고도 침묵한 데다 저주를 완성하는 일에 가담하기까지 한 남자를 너무 싸고 도는 것이 아니신지?”
“하지만 로스카옌 신부님은……!”
“자기 고향도 아니고 친인척도 없는 마을에서, 15년 동안 홀로 늙어가며 저주를 관리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로스카옌도 알렉세이와 결탁하면서 뭔가 원하는 바가 있었다는 뜻이겠죠.”
“그게 뭔데요?”
“저야 모르지요. 로스카옌에게는 저주가 통하지 않아서 조종하지도 못합니다.”
저주가 통하지 않는다. 그 말에 사비나는 나자예프가 저주를 피하는 반지를 끼고 있을 때 사비나에게 닿아도 괜찮았던 것을 떠올렸다.
로스카옌은 사비나에게 직접 접촉한 적은 없으나, 그는 아버지가 목에 걸고 있던 것과 동일한 금줄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그 목걸이는 성물이라 어디에나 있고, 모조품도 많다고 그랬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이상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로스카옌은 이 마을 사람이 아니라 외부인이다. 그래서 시간이 멈추는 저주에 걸리지 않았다.
시간이 멈추는 저주에 걸린 마을 사람들은, 마을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그런데 외부인인 로스카옌은 왜, 마을 밖으로 나가지 못했을까?
그리고 이 마을 출신일 알렉세이는 왜, 마을 밖으로 나가서도 나이를 먹지 않았을까?
'아버지가 빠져나온 뒤에 마을의 시간이 멈춘 게 아니야. 아버지는…… 마을의 시간을 멈춘 뒤에 빠져나온 거야.'
제물을 술자로 착각하게 만드는 주술도구는 저주를 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저주의 반동을 피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주술도구를 착용한 이후로 덧씌워지는 저주는 통하지 않는다.
이 마을의 시간이 멈춘 것이 저주. 마을 밖으로 나갈 수 없는 것이 저주의 반동.
그리고 사비나가 얻은 <죽음의 저주>는, 분명 마을이 불타고 콘바야젠 백작가로 끌려가 아버지를 만난 다음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러니 아버지가 자신에게 닿아도 괜찮았던 거다. 나자예프도 반지를 끼고 있는 동안은 괜찮았던 거고.
'세상에……!'
사비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엉켜있던 실이, 끝을 잡아당기자 하나의 매듭이 되어 꽉 뭉쳐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럼 로스카옌 신부님의 목적은 뭐지? 무엇 때문에 이런 연고도 없는 마을에서, 홀로 저주를 감당해가며 아버지와 손을 잡았던 거야?'
솟아오른 의문에 대답해줄 이는 이 자리에 없었다. 사비나의 안색이 창백해진 것을 걱정한 나자예프가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려는 순간, 토굴 너머에서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늪 속의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