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얼마만큼의 군대를 데려온다고 해도, 죽음의 화신인 당신을 상대로는 소용이 없겠지요.”
“나한테는 소용이 없어도, 당신들한테는 아닐 텐데요? 15년 전의 참극을 되풀이할 셈이에요?”
“아닙니다. 이번에 죽는 건 우리가 아니라 그들이 되겠죠. 당신이 있으니까.”
카이라트는 마치 사비나가 자신들을 구해 줄 거라고 확신하기라도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병사들이 우리를 죽이지 못하도록 막는 게 당신 역할입니다.”
부탁하는 태도가 아니다. 명령에 가까웠다.
사비나는 카이라트가 왜 이토록 자신만만하게 나오는 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비나는 병사들의 손에 사람들이 죽게 놔둘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을 사람들을 해치려는 병사들에게 저주를 걸어 죽게 만들 생각은 더욱 없었다.
“카이라트. 나는 더 이상 사람을 죽이지 않을 거예요.”
“궁지에 몰린 인간이 신념을 버리는 건 흔한 일이지요.”
“당신들이 병사들에게 공격당하면 내가 그들에게 죽음의 저주를 걸어서라도 지켜 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예.”
카이라트는 깔끔하게 수긍했다. 사비나는 어이가 없어 기가 찬 한숨을 내뱉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죠?”
“에르잔이 이곳에 있으니까요.”
에르잔의 이름을 거론한 것만으로 사비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본래도 속내를 감추는 데는 재주가 없지만, 정말로 알기 쉬운 성격이라고 생각하며 카이라트가 어깨를 으쓱했다.
“마을이 저주에 잠식되었을 때는, 에르잔의 존재가 위협적이었지요. 저주만을 따로 지우지 못하고 저주와 결합한 대상까지 태워 버리니, 그와 적대하는 건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죠.”
네 개의 핵을 사비나가 흡수함으로써, 마을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저주에서 벗어난 이들에게는 설령 에르잔이 정화의 불꽃을 직접 일으킨다 할지라도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할 것이다.
정화의 불꽃은 진짜 불꽃이 아니라, 저주가 깃든 대상을 태우는 불꽃이니까.
물론 체격과 완력 면에서 카이라트는 절대 에르잔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민간인에게 무력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기사도라고 한들, 그것은 어디까지나 민간인이 위협의 대상이 되지 않을 때에 한했다. 만약 마을 사람들이 사비나를 감금하고, 그녀를 인질로 삼으려 든다면 에르잔이 가만히 참고 있을 리가 없다.
머릿수가 많다고 한들 이 마을의 생존자 대부분은 여자다. 에르잔이 호락호락하게 당하지는 않을 터인데.
그렇게 생각하던 중, 사비나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기억이 있었다.
<오딜의 검술 실력은 저보다 뛰어납니다.>
마을의 호위대장, 오딜. 그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검술에 문외한인 사비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에르잔이 담담하게 인정했을 정도의 실력자임은 분명했다.
그는 약자를 괴롭히는 성품은 아니었으나, 올가를 닮은 사비나를 지나치게 싸고돌았다.
사비나가 식사 초대를 했을 때도 잔소리를 하더니, 그녀가 상처를 입은 것을 목도하고는 다짜고짜 에르잔을 폭행하지 않았던가.
‘에르잔은 지금 부상을 입은 상태인데, 만약 오딜과 맞붙는다면…….’
에르잔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그것을 자각하자 사비나의 안색이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
“에르잔을 어떻게 하려고…… 에르잔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거예요?”
“당신이 협조적으로 나와 준다면 아무 짓도 하지 않을 겁니다. 맹세하죠.”
카이라트가 손짓하자, 사비나를 비롯한 두 남자를 에워싼 무리가 거리를 좁혀 왔다.
“알렉세이가 도착할 때까지 얌전히 있어 주세요, 사비나. 그럼 당신도 에르잔도 무사할 테니까요. 물론 그쪽의 두 사람도.”
나자예프와 아페티트를 가리키며 카이라트가 건조한 어조로 덧붙였다. 그 담담한 말 속에 비열함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사비나는 둔하지 않았다.
그녀의 아버지가 다정한 음성으로 잔혹한 명령을 내리는 것보다도 더욱 치가 떨리는 말을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대답하시죠. 어느 쪽을 택할지.”
“사비나. 나는 괜찮아!”
나자예프가 애써 부담을 덜어 주려 했으나 어차피 저항은 무의미했다.
아페티트는 기절한 상태고, 나자예프는 한쪽 팔을 쓸 수 없는 데다 걸음걸이도 불편해 보였다.
사비나 혼자만 어떻게 무사히 빠져나간다고 다가 아니었다.
“나자예프. 당신을 죽게 할 수는 없어요.”
“사비나……!”
게다가 그를 데리고 기적적으로 탈출한다 할지라도, 아직 부상자인 에르잔을 데리고 이 마을을 빠져나가는 것이 손쉬울 리 없었다.
사비나는 장애물이 많은 숲에서 네나뷔스테에게 금방 따라잡힐 뻔했던 것을 떠올렸다. 사비나와 에르잔이 아무리 도망치려 한다고 해도, 이 산에 익숙한 마을 사람들은 금방 그들을 찾아낼 것이다.
“그럼 협조해 주시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카이라트가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가 가볍게 손짓하자 사비나를 향하고 있던 무기가 뒤로 자취를 감추었으나, 찌를 듯이 날카로운 시선만은 가시지 않았다.
***
사비나 일행이 갇힌 곳은 북쪽 탑과 공동묘지 사이에 자리한 토굴이었다. 카이라트와 마을 사람들은 사비나와 나자예프, 기절한 아페티트를 짐짝처럼 토굴 속에 던져 놓고 돌아갔다.
발소리가 멀어진 것을 확인한 나자예프는 얼른 무릎걸음으로 사비나에게 다가왔다.
“사비나. 왜 수락한 거야? 네가 여기 갇혀 있을 이유가 없잖아!”
“다른 방법이 없었어요.”
도망치려 한다면 나자에프가 크게 다쳤을 것이고, 제안을 거절한다면 에르잔이 위험해진다. 사비나는 카이라트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죽지 않는 몸인 그녀는 이런 습습한 토굴에 좀 갇혀 있는다고 불편을 느끼지는 않았다. 부적을 두른 천에 꽁꽁 싸여 운반될 때에 비하면 포박을 당한 것도 아니니 팔다리도 자유로웠다.
사비나는 습기가 비교적 적은 방향의 땅을 고르고, 붉은 치마를 반쯤 찢어 바닥에 깔았다.
“여기 앉아요, 나자예프. 움직이기 불편하잖아요.”
“지금 날 챙기고 있을 때야? 여기서 빠져나갈 방법을 찾아야지!”
“어떻게요? 입구에는 사람들이 지키고 있을 텐데.”
“그야……!”
입구을 통하지 않으면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 나자예프는 지금 몸의 절반을 쓸 수 없는 상태고, 사비나의 완력은 평범한 여자에 지나지 않았다.
말문이 막힌 나자예프는 고개를 숙이고 꿍얼거렸다. 내가 널 지켜야 하는데, 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으나 사비나는 모른 척했다.
“교회에서랑…… 아까 공터에서는 저주로 바닥을 녹였잖아. 그 힘으로 어떻게 안 될까?”
“아까는 카이라트 앞이라 약점을 잡힐까 봐 말하지 않았는데요.”
사비나는 조금 곤란한 듯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저주의 힘을 쓸 수가 없어요.”
“뭐?”
“나자예프. 내게 닿아도 괜찮았죠? 내가 이름을 불러도 아프지 않고.”
“응? 그랬지.”
“아페티트의 욕망을 흡수하면서…… 뭔가 내 몸에 이상이 생긴 것 같아요.”
“이상이라니, 어디 아픈 거야?”
사비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디가 아픈 것은 아니다. 바르셀다의 분노를 받아들였을 때처럼 고통스럽지도 않고, 네나뷔스테의 증오를 받아들였을 때처럼 간지럽지도 않았다. 페고라의 체념을 받아들였을 때만 하더라도 무겁게 몸이 가라앉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페티트의 핵을 흡수했을 때도 그랬는데.’
욕망의 핵이 분진 형태를 이룬 까닭에 폭발에 휩싸이긴 했지만, 폭발로 인한 충격 외에 다른 이상은 없었다. 분노나 증오, 체념을 받아들였을 때는 크고 작은 변화라도 느낄 수 있었는데 욕망의 핵을 받아들였을 때는 마치 원래부터 제 것인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페티트가 욕망의 화신이라…… 저주의 농도가 내 것과 비슷해서 상쇄가 되는 걸까? 아니면…….’
사비나는 어깨를 감싸 쥐었다. 자신에게 깃든 죽음의 저주는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이전처럼 멋대로 흘러나오지 않을 뿐이다. 사비나가 억제하려 해도 늘 밖으로 밖으로 넘쳐흐르기만 했던 죽음의 저주가 지금은 얌전히 잠들어 있다.
한 번도 스스로 저주를 내뿜으려 한 적이 없었던 사비나에게, 얌전히 잠들어 있는 저주를 끄집어내는 능력은 없었다.
“모르겠어요. 아직 안정이 되지 않아서일 수도 있고…….”
“아페티트가 뭔가 알지 않을까? 때려서 깨울까?”
“아뇨. 일단은 이쪽 상황부터 파악하죠.”
사위가 어두워도 사비나에게 주위를 파악하는 건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토굴의 벽과 바닥을 천천히 짚어 가며 깊이를 가늠했다.
“바닥에 지하수가 흐르는 것 같네요.”
“응. 원래는 이곳이 우물 자리였거든.”
“우물이라고요?”
“북쪽에도 우물이 있었거든. 그런데 15년 전에 그 일이 있고, 페고라가 틀어박힐 지하를 찾느라…… 물길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바닥을 막았어. 이 토굴도 아마 그때 생긴 거일걸?”
어쩐지, 북쪽 탑이라기에는 너무 장난감 성처럼 자그마한 생김새다 싶었다. 페고라가 체념의 핵을 안고 누워 있던 북쪽 탑의 지하는 사실 탑이 아니라 우물을 개조한 장소였을 뿐이다.
“그럼…… 원래는 이쪽 우물도 다른 우물과 이어져 있었겠네요?”
“그렇겠지. 물길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니까.”
서쪽 우물의 저주를 흡수하다가 빠져 버렸을 때, 사비나는 남쪽 우물까지 헤엄쳐 건너갔다.
그렇다면 이 토굴에서 지하수가 흐르는 곳으로 파고들어 가면, 물길을 따라 서쪽이나 남쪽으로 빠져나갈 수 있지 않을까?
사비나가 유심히 바닥을 고르는 것을 눈치챈 나자예프가 냉큼 덧붙였다.
“사비나. 설마 지하수로를 헤엄쳐서 빠져나갈 셈은 아니지?”
“안 될까요?”
“미쳤어? 얼마나 깊은데! 그리고 어디로 어떻게 물길이 뻗어 있는지도 모르잖아!”
사비나는 숨을 쉬지 않아도 죽지 않지만, 물속에서 방향을 가늠하는 법은 모른다. 물길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면 서쪽이나 남쪽 우물을 찾아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게다가 죽지 않을 뿐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니, 숨이 막힌 상태로 제대로 길을 찾을 수 있을 리도 없었다.
“그러네요. 물속에서 헤매다가 시간을 너무 지체하면…… 정작 에르잔은 만나지도 못하고, 우리가 제대로 있는지 감시하러 온 사람에게 내가 사라진 것만 들킬 테니까. 그럼 나자예프도 아페티트도 곤란해질 테니…….”
“아니. 그 전에 사비나, 네가 위험하다 생각은 안 해?”
“나는 괜찮아요.”
“나는 안 괜찮아!”
걱정하는 건지, 오기를 부리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자예프가 소리치자, 뒤에서 내내 웅크리고 있던 아페티트가 머리로 그의 등을 들이받았다.
“으악!”
“것 참, 시끄럽군요. 나자예프, 좀 얌전히 있을 수 없습니까?”
“아페티트. 깼어요?”
“원래 깨어 있었습니다. 움직이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을 뿐이지.”
아페티트는 빙글 몸을 굴려 사비나를 향해 등을 보였다. 나자예프가 허리띠로 손발을 묶어 놓은 것이 보였다.
“이래서야 서지도 앉지도 못하겠군요. 좀 풀어 주시겠습니까? 아가씨.”
늪 속의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