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카이라트. 뭘 하려는 거예요?”
“네 개의 핵을 전부 흡수한 당신을 보내 버리면, 알렉세이를 다시는 잡을 수 없으니까요.”
카이라트가 손짓하자, 흉흉한 눈빛의 여자들이 사비나와 나자예프, 아페티트가 서 있는 장소를 둥그렇게 에워쌌다. 15년 동안 자신을 짓누르던 체념으로부터 간신히 벗어난 그녀들은 지금 당장 이 치미는 감정을 어떻게든 쏟아 내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는 듯, 무기를 꽉 부여잡고 있었다.
“기다려, 카이라트! 사비나의 아버지가…… 콘바야젠 백작이, 우리가 아는 알렉세이가 맞다는 증거는 없잖아?”
“어라. 방금까지 인정하던 사실을 부정하는 겁니까?”
나자예프가 앞을 막아서며 항변하자 카이라트가 그를 비웃었다.
“나자예프. 당신 형이 콘바야젠 백작이라는 증거는 몇 가지나 댈 수 있지요.”
카이라트는 가만히 서서 오른손을 올렸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어 가며 증거를 대기 시작했다.
“첫째. 이 마을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것.”
지도에조차 표시되지 않는 이 마을의 존재 여부를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산 아래 도시만 하더라도 <저 산골 어딘가에 마을이 있다> 정도만 알 뿐이고, 그마저도 15년 동안 교류가 끊겼으니 기억에서 사라졌다고 봐도 무방하리라.
비록 그 존재감이 희미하여 세금을 걷으려는 관리도 방문하지 않는 마을이지만, 그래도 교회가 있기에 교구에서는 사제를 보내왔다. 본래 이 마을에 있던 신부가 치매에 걸렸다는 사실을 뒤늦게 안 것도, 노환으로 거동이 불편하지 않을까 걱정되어서 교구에서 사제를 보내온 덕분이니까. 그들 가운데 로스카옌만이 남고 나머지는 치매에 걸린 신부를 데리고 돌아갔다.
“둘째. 교구를 통해서가 아니라 로스카옌 신부님께 직접 연락을 했다는 것.”
로스카옌은 15년 전 그날, 이 마을의 시간이 멈추면서 외부와도 완전히 단절되었을 거라고 말했다. 외부인인 자신마저 저주에 얽매여 있기에 이 마을을 벗어날 수 없어, 교구에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다고 했던가.
당시에는 그 말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더 이상 마을을 찾아오는 이가 없는 것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15년 전의 참극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로스카옌 혼자서 남들보다 두 배의 나이를 먹는다는 사실도 교구에서는 알 리가 없다.
그러니 아직 50대일 로스카옌이 왕성하게 활동할 거라고 판단했을 터. 굳이 사람을 보내 교회가 잘 운영되고 있는지 보러 올 이유가 없으리라고 판단했다. 마을의 규모가 그리 큰 것도 아니니 교구에서 의무감으로 파견하는 사제에 그렇게 신경을 기울일 리가 없으니까.
그러니 이 마을에 새로운 사제가 방문하는 것은 아마도 4, 50년 후, 로스카옌이 노환으로 죽을 나이가 되어야 외부인이 방문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15년 만에 방문자가 찾아왔다.
단순히 산속을 헤매다가 발을 들인 것도, 산 아래 마을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온 것도 아니다.
로스카옌이 외부에 연락을 취할 방도는 없으니 외부에서 로스카옌에게 연락을 취해야 하는데, 로스카옌의 소재지를 알고 있는 것은 그를 파견한 교구뿐이다.
그런데 교구를 통하지 않고, 로스카옌에게 직접 연락을 넣었다.
그건 이 마을의 존재를 처음부터 알고 있는 자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방법이다.
“셋째. 이 마을이 저주에 잠식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
“잠깐, 카이라트! 사비나는 이 마을에 대해 모르고 방문했다고 했거든? 넘겨짚지 마!”
“사비나는 <주술사>고, 에르잔은 <정화술사>지요. 저주에 잠식된 마을이라는 것을 몰랐더라면, 왜 이러한 인선을 보내왔을까요?”
“에르잔은 그냥 정화 체질을 타고났을 뿐이야. 정화술사가 아니라고!”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지요.”
이 마을의 저주는 평범한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눈이 멀었어도, 몇 명이나 되는 마을 사람들이 저주로 괴로워하다 죽어 가는 소리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외부인이라고 한들 이 마을에 들어서면 반드시 저주에 물든다. 그것을 견뎌 내고 적응할지, 아니면 감당하지 못하고 병에 걸려 죽을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넷째. 사비나가 이 마을을 구할 목적으로 방문한 게 아니라는 것.”
만약 사비나가 주술사로서 선한 목적을 가지고 이 마을의 저주를 어떻게든 할 요량으로 방문한 거였다면 우연히 방문한 외부인 행세를 할 이유가 없다. 도리어 수상하게 여겨져 경계를 살 뿐이니까. 마을 사람들의 신임을 얻고 저주를 해주하는 일에 몰두하기 위해서는 차라리 처음부터 자신이 주술사임을 밝히고 도움을 요청해야 했다.
반대로 그녀가 악한 목적을 가지고 방문했다면, 저주만 흡수하는 게 아니라 저주에 잠식된 이들의 목숨까지 빼앗아 더욱 짙은 저주를 완성했을 것이다. 저주와 결합한 대상을 불태워버리는 에르잔의 힘을 이용한다면 이 마을을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없애 버리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사비나는 에르잔에게 마을 사람들을 죽이라 명하지도 않고, 그들을 괴롭히던 저주만을 거두어들인 뒤 조용히 물러났다.
지도에도 없는 저주받은 마을에, 우연히 방문한 주술사와 정화술사가 단지 요양을 위해 산골 마을을 찾았을 뿐이라고 말한다.
카이라트는 에르잔이나 사비나가 거짓말을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눈이 보이지 않을 적 카이라트는 카밀라의 숨소리나 발소리만으로 그녀의 건강 상태를 체크할 수 있었다. 만약 사비나든 에르잔이든 그에게 거짓말을 했다면, 호흡이나 어조만으로 위화감을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
거짓말이 아니라면, 사비나와 에르잔을 이곳으로 보내야 할 이유가 있었던 건 당사자인 그들이 아니라, 그들을 이곳으로 보낸 콘바야젠 백작이라는 뜻이 된다.
“다섯째. 이 마을의 저주가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
카이라트의 지적에 나자예프와 사비나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사비나. 당신에게는 말한 적이 있지요? 내가 연구하던 주술은 네 개의 주술을 한데 엮는 것이라고.”
욕망. 분노. 증오. 체념.
네 개의 주술을 하나로 엮으면 불로불사의 주술, 생명을 탄생시키는 주술이 나타나지 않을까하는 마음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구에 몰두했다고 그랬다.
그러나 막상 15년 전,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가며 만들어 낸 저주는 그가 연구했던 형태가 아니었다.
네 개의 저주를 한데 묶는 것이 아니라, 네 명에게 나누어 단지 균형을 이루는 상태로 유지하는 것.
“처음에는 뭔가 다른 목적이 있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지요. 가령 시간을 멈추어, 노화를 방지해서 젊음을 유지한 채 오래 사는 것이 목적이라거나.”
“그럼 아니라는 거야?”
“단지 그게 목적이었다면 네 개의 핵을 흡수하고도 살아 있을 수 있는 저주의 화신을 보냈을까요? 흡수하는 과정에서 잘못했다가는 균형이 깨져 버리는데.”
그랬다. 로스카옌이 말하지 않았던가. 네 개의 핵은 서로 균형을 이루는 상태라, 한 명이라도 죽거나 저주의 핵을 정화하면 나머지 세 사람도 죽게 된다고.
“처음부터 뭉치는 게 목적이었던 겁니다. 다만 이제까지는 방법이 없어 중단된 상태로 남겨 둔 것뿐이죠.”
연구 자료를 도둑맞고, 자신이 연구하던 대로 마을에 저주가 걸렸음에도 카이라트가 범인을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했던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 연구 자료를 토대로 저주를 만들려 했다면, 네 개의 핵을 분명 한데 모아야 했을 터인데, 어째서 네 명에게 나누어 심어 놓기만 하고 끝냈을까.
그것이 시간을 멈추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단지 네 개의 핵을 보통 사람의 몸에 심었다가는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건 사비나가 세 개의 저주의 핵을 흡수했을 때였다.
“그리고 마지막 증거. 사비나, 당신이 우리를 죽이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게 무슨 해괴한 소리야? 사비나가 살인을 하지 않는 게 어떻게 의심받는 이유가 된다는 거야!”
“사비나는 이 마을이 저주받은 것도 모르고 방문했고, 저주의 핵을 흡수하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고 받아들였지요. 그녀에게 목적이 없다는 뜻이지요.”
“그러니까 그게 왜……!”
“정확하게, 알렉세이의 수법이지 않습니까?”
아페티트를 구슬려 그를 저주의 화신으로 만들고도 성에 차지 않아 마을의 시간을 멈추어 그를 가둔 뒤, 새로운 저주의 화신을 보내 마을의 저주를 흡수해 원하는 바를 완성한다.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으면서, 사람을 이용할 때는 그가 이용당하는 줄 모르게 이용한다.
교활하고 음험하면서도 겁이 많은 알렉세이가 쓸 법한 방식이다.
“겁이 많은 사람은 신중한 법이지요. 나자예프 당신은 비정상이라 모르겠지만.”
“잠깐. 지금 아주 자연스럽게 화제가 내 욕으로 넘어갔는데?”
“그리고 자신이 완전히 고지를 점령했을 때, 본색을 드러냅니다. 알렉세이라는 이름을 바꾸지 않았다는 게 그 증거지요.”
“……알렉세이는 흔한 이름이라고, 카밀라도 그랬잖아.”
“우연히 겹칠 가능성은 이미 사라지지 않았나요?”
이 마을의 존재를 알고, 교구조차도 연락을 하지 않는 로스카옌에게 직접 연락을 취하며, 저주의 화신을 보내 임시방편으로 멈춰 두었던 저주를 완성하고자 하는 콘바야젠 백작.
조용하기에 티가 나지는 않았으나, 귀족의 피를 이었다는 이유로 알렉세이가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는 것을 카이라트는 모르지 않았다.
“보여 주고 싶었겠지요. 마을 안에서는 존재감조차 희미했던 자신이 지금 이 자리에 있노라고.”
“형한테 그런 과시욕이 있다고는 생각해 본 적 없는데. 그랬으면 평소에 더 잘난 체를 했겠지.”
“마음이 변한 이유가 생긴 거겠지요?”
카이라트가 사비나를 가리켰다.
“올가가 딸을 데리고 숨어 버렸으니까.”
정말로 올가를 임신시킨 것이 알렉세이라면, 왜 그녀가 알렉세이를 고발하지 않았는지는 카이라트도 알지 못한다.
다만 그 일로 인해 알렉세이가 어마어마하게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으리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다.
서재를 엉망으로 만들었다고 바르셀다가 그러지 않았던가. 알렉세이가 범인이 아니라고 믿었음에도 마을 사람들 모두 알렉세이가 분노를 표출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가 올가를 짝사랑하고 있었으니, 화가 나서 이상행동을 하다가 잠적한 거라고 여겼다.
“어쩌면 보여 주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죠. 죽은 올가에게.”
“카이라트. 넌 형제도 아니면서 너무 알렉세이 형을 다 이해한다는 듯이 말하는데?”
“당신이 모자라서 뻔히 보이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요?”
나자예프에게 말하면서도 카이라트의 시선은 사비나로부터 벗어나지 않았다. 오랜 기간 눈이 먼 까닭에 탁하다고만 생각했던 눈동자에 이채가 감돌았다. 확신. 아니, 맹신하는 자의 눈빛이다. 더는 변명이 통하지 않을 거라고 판단한 사비나는 나자예프의 옆으로 돌아 나왔다.
“나자예프, 그만. 카이라트를 설득하는 건 무리예요.”
“사비나! 하지만…….”
“그래서 카이라트. 내게 뭘 하려는 거죠?”
한때는 혼자서 걷는 것조차 어려워했던 카이라트가, 지금은 무리를 이끌고 와 사비나를 에워싸고 압박하고 있다.
아버지 대신 사비나에게 마을을 엉망으로 만든 복수라도 하려는 걸까?
“당신에게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네?”
“하지만 이 마을에서 떠나게 둘 수는 없어요. 당신이 이곳에 있어야 알렉세이가 찾아올 테니까.”
“오지 않을 수도 있죠.”
“아뇨. 반드시 올 겁니다.”
카이라트의 확신을 담은 말을, 사비나는 부정할 수 없었다.
확실히 그랬다. 아버지는 그녀를 버리지 못할 것이다. 물론 부녀간의 정 따위가 있어서는 아니다.
콘바야젠 가문에는 강력한 주술사가 필요하고,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존재는 사비나 외에 없다.
그러니 사비나가 아버지의 호출에도 응답하지 않고 돌아가지 않는다면, 아버지는 분명 그녀를 찾으러 이곳에 방문할 것이다.
'나한테 닿아도 괜찮은 건 아버지뿐이니까, 날 데려갈 셈이라면 직접 오는 수밖에 없겠지만…….'
사비나가 마을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를 짐작하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아버지가 혼자서 찾아올 거라고 생각해요?”
그저 귀족 가문의 후계자가 된 것만으로 마을 하나를 쑥대밭으로 만들 병사를 이끌 수 있었다.
황제의 대리인인 지금이라면, 마을이 아니라 이 산 전체를 지도에서 없애버리는 것도 가능하리라.
“얼마만큼의 군대를 데려온다고 해도, 죽음의 화신인 당신을 상대로는 소용이 없겠지요.”
늪 속의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