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꼭 불이 된 기분이었다. 밝은 빛을 띠고 있음에도 고정된 형태 없이 일렁이는 저주가 사비나의 주위를 에워쌌다.
욕망의 저주는 죽음의 저주와는 달랐다.
그것은 진득하고 음습하지도 않고, 무겁고 축축하지도 않았으며, 불쾌하게 온몸을 짓누르는 압박감을 전해 주지도 않았다.
뜨거운 것은 그저 한순간. 불길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폭발에 가까운 빛이 확 번지더니, 검은 진흙으로 가득했던 시야에 메마른 나무와 우거진 수풀이 싹을 틔우듯 자라나기 시작했다.
끝에서부터 조금씩 조금씩, 물감이 번지듯 숲의 모습이 검은 풍경을 덮어가는 모습은 무척이나 신기했다.
사비나는 제가 발을 딛고 있는 땅을 내려다보았다. 진득한 늪으로 변해 그녀를 빨아들였던 검은 늪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마치 이곳에 처음 도착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검붉은 흙이 그녀의 발밑을 단단하게 받치고 있었다.
‘성공한 건가?’
어릴 적, 죽음의 저주를 받아들일 때는 이성을 놓아 버리고 싶을 만큼 괴로웠는데. 어째서인지 욕망의 저주를 흡수하는 건 그리 괴롭지 않았다.
사비나가 저주에 익숙한 몸이기에 그런 것일까?
아니면 죽음의 저주와는 달리, 욕망의 저주는 본래 이토록 가볍고 산뜻한 것일까.
“사비나, 괜찮아?”
“나자예프, 나한테 손대면 안 돼요!”
“이미 댔는데 어쩌지?”
나자예프가 멋쩍게 웃으며 사비나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검게 물들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왼팔과는 달리 사비나의 어깨를 붙잡고 있는 그의 오른손은 멀쩡했다.
“어……?”
사비나와 접촉한 인간은 온몸이 썩어 들어가 죽게 된다. 마을의 시간이 멈춰 있던 때라면 모를까, 네 개의 핵을 흡수해 시간을 원래대로 되돌린 지금은 그녀의 몸에 닿아도 멀쩡한 사람은 에르잔 외에 존재하지 않는다.
카림도 사비나의 몸에 손을 댔다가 화상을 입었고, 페고라는 사비나의 머리카락을 쥔 것만으로 손바닥이 따끔거린다고 했으니까.
사비나를 안고 언덕에서 굴러떨어진 나자에프의 몸 반쪽은 여전히 저주로 검게 물들어 있는데, 어째서 지금 그녀를 만지는 손은 멀쩡한 걸까.
사비나가 동그랗게 눈을 뜨고 올려다보자, 나자예프가 민망했는지 손을 떼고 한 걸음 물러났다.
“이상한 생각으로 만진 거 아니야! 난 그냥, 걱정이 돼서…….”
“……다치지 않았어요?”
“저기, 사비나? 난 하는 일도 없이 서 있기만 했는데. 저주에 삼켜진 건 너였잖아.”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냐는 듯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피식 웃는 나자예프를 마주하고 나서야, 사비나는 제 어깨를 감싸 안았다.
“나, 나는 괜찮아요. 그렇지만 당신은…….”
“네가 괜찮으면 당연히 나도 괜찮지. 저 녀석도 괜찮을 거고.”
나자예프가 가리킨 방향에는 머리부터 바닥에 메다꽂힌 자세로 기절한 아페티트가 있었다. 머리카락 색깔이 꼭 피 색깔 같다고 생각했는데, 햇빛 아래서 보니 그냥 평범한 붉은 색깔이었다. 사비나는 기절한 아페티트에게 다가갔다가, 그의 저주를 제가 흡수한 상태라면 건드려서는 안 될 것 같아 도로 물러났다.
“미안해요, 나자예프. 나 대신 이 사람을…… 아!”
또 이름을 불러 버렸다. 사비나가 얼른 입을 가렸으나, 나자예프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늘어진 아페티트를 향해 다가가 풀어 놓았던 허리끈으로 아페티트의 양 손목과 발목을 포박했다.
“매듭이 안 풀리게 묶는 게 은근히 어렵네. 에르잔은 되게 쉽게 감았는데, 난 재주가 없나 봐.”
“나자예…… 아, 아니. 저기…….”
“사비나. 내 이름 불러도 돼.”
“네? 하지만…….”
“널 만져도 괜찮았잖아.”
그랬다. 분명 사비나에게 접촉한 것만으로 팔 한쪽이 썩어 들어가고, 이름을 불린 것만으로 배 속이 요동친다며 거북한 얼굴로 기침을 하던 나자예프가, 지금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은 아니다. 어쩐지 조금 서글픈 표정이었다.
“……나자예프.”
사비나가 주저하며 이름을 부르자, 나자예프가 손등으로 이마를 문지르더니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혈육의 정이라는 건가?”
“네?”
“난 네가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거든.”
처음엔 미인이라서. 그다음에는 어쩐지 희망을 줄 것 같아서. 이 삭막하고 지루한 일상을 깨뜨려 줄 신선한 구원자의 등장에 가슴이 설다.
하지만 사비나가 알렉세이의 딸이라면, 나자예프에게는 조카가 된다.
그렇다면 그녀에게 이끌렸던 제 마음은 사실 사랑도 무엇도 아닌 혈육의 정이었을 뿐이라는 걸까.
“안 어울리게 신사적으로 대했던 게 차라리 다행이야. 막 나갔으면 근친상간을 저지를 뻔했잖아?”
나자예프는 사비나 앞에서 단 한 번도 신사였던 적이 없으나, 사비나는 굳이 그 점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사비나가 왜 나를 밀어냈는지 알 것 같아.”
“나자예프…….”
“너는 나보다 감이 좋으니까, 은연중에 느꼈던 거지? 혈연이니까 이 이상은 가까워져서는 안 된다고.”
사비나가 나자예프를 밀어낸 이유는 그에게 호감이 없기 때문이었으나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
“사비나. 우리를 죽이러 온 거야?”
“네, 네?”
“바르셀다는 그렇게 생각하더라고. 알렉세이 형이 이유도 없이 주술사를 이런 곳에 보낼 리가 없다고.”
“아니에요, 나자예프. 나는…….”
또다시 이름을 불러 버려 흠칫했지만, 나자예프의 표정은 약간 씁쓸한 정도에서 변하지 않았다.
예전처럼 이름을 불린다고 내상을 입지는 않는 걸까. 사비나가 입가를 매만지며 당혹스런 표정을 짓자, 나자예프는 무릎을 탁탁 털고 도로 일어났다. 한쪽 팔을 움직일 수 없는 까닭에 자세가 비틀거렸으나, 사비나는 그를 부축하지 않았다.
부축해도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당신들에게 해를 끼칠 생각은 조금도 없어요. 정말이에요.”
“알아.”
나자예프는 꽁꽁 묶인 채로 바닥에 엎어진 아페티트를 일으켜 세우려다가, 제힘으로는 무리라는 것을 깨닫고 금방 손을 놓았다. 아페티트는 도로 바닥에 엎어졌다. 흙바닥에 그대로 얼굴을 파묻은 그가 숨을 제대로 쉴 수 있을지 염려되었으나, 저주를 빼앗긴 상태라면 함부로 자신이 만져서는 안 된다. 사비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나자예프의 눈치만 보았다.
“반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형의 피를 이어받았어도, 반은 내가 사랑하는 여자의 피를 이어받았을 테니까. 네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나도 알아.”
사랑하는 여자라. 올가를 말하는 것일까.
나자예프도 오딜도 사비나에게 몇 번이나 올가를 닮았다는 이야기를 했다.
카밀라로부터는, 올가가 임신을 했을 때 아이의 아버지가 알렉세이가 아니냐는 소문이 잠시 돈 적이 있다고 들었다.
헛소문으로 치부해 금방 사그라들었다지만, 만약 그게 헛소문이 아니라면.
“여기서 살았다고 그랬지?”
나자에프가 공터를 가리켰다. 사비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적에…… 엄마와 둘이, 이곳에 살았어요.”
“올가는 형을 꺼려 했으니까. 그래도 사실을 말하지 않은 건 의외네. 억지로 당한 거였으면 당연히 오딜한테 말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
“형한테서 도망칠 셈이었으면 이런 곳에 따로 나와 산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었는데. 올가도 너무 순진했어.”
나자예프는 혀를 찼다. 알렉세이가 사비나를 돌려받기 위해 마을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올가까지 죽이고 그녀를 데려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 군인들이 우리 집에 불을 지르고, 나를 아버지에게로 데려갔으니까…….'
휘황찬란한 성에서 마주한 검은 머리의 남자는 사비나에게 자신이 그녀의 아버지라고 말했다. 어린 사비나는 저를 둘러싼 상황이 너무도 무섭고 혼란스러워 의심 없이 그 말을 믿었다.
그리고 이 마을에 찾아와 알게 된 모든 사실이, 그녀가 알렉세이와 올가 사이에 태어난 아이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해. 엄마는 분명…….’
여덟 살의 그날보다도 더 어릴 적에, 사비나는 아버지를 본 적이 있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지닌 남자를 가리키며, 어머니는 그가 사비나의 아버지라고 말했다.
아버지라는 것을 밝혀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도, 자랑스러운 듯 그녀에게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얼굴도 모습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 아버지가 있었던 장소만큼은 분명히 기억이 난다.
눈부신 스테인드글라스 아래 그려진 색색의 벽화도.
“나자예프. 혹시 아버지가, 아니, 당신 형이 교회에…….”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사비나. 아, 그리고.”
나자예프는 사비나에게로 다가와, 답지 않게 진지한 음성으로 주의를 주었다.
“네가 알렉세이 형의 딸이라는 거, 오딜이나 바르셀다가 알면 큰일 나. 반드시 숨기도록 해.”
“네? 왜요?”
“뻔하잖아. 오딜은 길길이 날뛸 거고, 바르셀다는…….”
사비나를 알렉세이가 보낸 주술사로 여긴다면 그나마 경계하는 정도에서 그치겠지만, 그녀가 알렉세이의 딸이라는 것을 안다면.
혈육에게 버림받다 못해 죽기보다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던 바르셀다는 사비나에게 보복하려 들지도 모른다.
“바르셀다가 힘이 좀 좋거든. 에르잔도 아직 부상이 낫지 않은 상태고. 혹시라도 네가 위험해지면 큰일이잖아.”
“바르셀다가 나를 싫어하나요?”
“싫어한다기보다는…… 조심해야지. 나야 형한테 기대하는 게 없었지만, 바르셀다는 제대로 배신당한 셈이니까.”
만날 수 없는 알렉세이 대신, 그의 딸인 사비나에게 화풀이라도 할 거라는 뜻일까. 사비나는 바르셀다의 모습을 떠올렸다가 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픈 기억을 떠올리면 서로 괴롭겠죠? 말하지 않을게요.”
“그래, 잘 생각했어.”
나자예프는 사비나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그가 또다시 제 몸을 건드려 움찔 놀랐지만, 나자예프의 손은 여전히 멀쩡했다.
죽음의 저주와 욕망의 저주가 합쳐진 탓에 그녀에게 닿아도 저주에 물들지 않게 된 것일까. 아직 확신할 수는 없지만, 나자예프가 제게 닿아도 더는 저주에 물들지 않는 것이나, 이름을 불러도 괴로워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당장 어떻게 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럼 나자예프.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
“아페티트를 교회로 데려가야 하는데…… 내 몸이 이래서, 도저히 저걸 끌고 갈 자신이 없거든?”
나자예프는 아직도 기절해 있는 아페티트를 가리키더니, 목덜미를 쓸었다.
“바르셀다를 시키면 편하겠지만, 그 녀석이 지금 엄청 예민해진 상태라서…… 그렇다고 에르잔을 불러올 수도 없고. 로스카옌은 돌아가 버렸고…… 그냥 여기에 묶어 두고 나중에 데려가라고 해야겠어.”
“위험하지 않을까요?”
“위험한 건 당신이죠.”
수풀 사이에서 날카로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바사삭. 흔들리는 수풀 사이에서 검은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사비나. 당신은 이제 이 마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카이라트의 뒤로, 흉흉한 눈빛을 한 낯선 얼굴들이 늘어서 있었다.
늪 속의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