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사람의 피는 붉은 색이나, 저주가 깃들면 검게 변한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 피의 색깔이 검은색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다.
마치 모든 빛깔을 흡수한 것처럼 혼탁해져, 별 하나 없는 아득한 밤하늘처럼 어둠에 물들 뿐.
바람이 멈추었는데도 스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사비나는 제 무릎을 넘어 허벅지까지 감싸오는 축축한 저주의 늪을 느끼면서 아페티트를 올려다보았다.
새카만 저주가 그가 서 있던 나무 밑동을 야금야금 갉아 먹고 있었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에 묘한 불쾌감이 떠올랐다가, 사비나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흩어졌다.
“아가씨. 사람을 죽이면 저주의 힘이 더 강해진다는 것을 아십니까?”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이제까지 사비나가 15년 동안 해 온 일이 살인이었던 것을.
사비나는 대답하지 않았으나 그녀의 의중을 읽은 듯이 아페티트는 말을 이었다.
“자의로 사람을 죽이는 것과, 타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사람을 죽게 만드는 건 다르지요.”
아페티트의 음성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듯 다정한 음성.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웃지 않고 있었다. 사랑스러운 반려를 바라보는 눈빛도, 자신보다 약한 저주의 화신을 가엾이 여기는 눈빛도 아니었다. 스스로 악마라 칭할 만큼 뱀과 같은 웃음을 짓던 그는 더 이상 없었다.
“아가씨.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고 욕망한 적이 있습니까?”
“네.”
사비나는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았다.
자신에게 잔혹한 명령을 하는 아버지도, 제 살갗을 칼로 그으면서 음흉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감시병도, 그녀의 몸 위에서 썩어 문드러지는 몸을 꿈틀거리며 죽어 가던 이들도, 죽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사비나가 죽이고 싶다고 생각한 대상은 단 하나.
“나는 죽고 싶었어요.”
사비나가 유일하게 죽이고 싶었던 대상. 바로 자기 자신. 그러나 사비나는 자기 자신만큼은 죽일 수 없었다.
“그것이 당신의 <욕망>이로군요.”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이었죠. 그래서 체념했어요.”
“아뇨.”
아페티트는 사비나의 말을 곧바로 부정하며 허리를 숙여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가 발을 디디고 있던 나무 밑동은 어느 사이 새카만 저주에 먹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자세히 보지 않아도 아페티트의 발목이 저주에 잠겨 사라졌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아페티트는 조금도 괴로워 보이지 않았다.
사위가 어두웠다. 나자예프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몸을 사리는 성격이니 아마도 안전한 곳으로 도망쳤으리라. 다친 곳은 팔이지 다리가 아니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비나의 코앞에 아페티트의 얼굴이 다가왔다.
“인간은 말입니다. 욕망하는 것이 생겼음에도 그것을 가지지 못하면 분노하지요.”
알렉세이는 올가를 욕망했으나, 그녀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지자 분노하여 서재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분노는 그저 발산하는 것으로는 해소가 되지 않는답니다. 하지만 해소할 목표…… 그래요. 증오할 대상이 생기면 달라지죠.”
서재를 엉망으로 만든다고 분노가 풀리는 건 아니다. 올가를 제 곁으로 데려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알렉세이에게는 힘이 없었다. 귀족의 피를 이었다는 말을 듣고 자라며, 마을에서 가장 뛰어난 지식을 가졌음에도 알렉세이는 무력했다.
<내가 무력한 건 이 마을에서 자랐기 때문이야.>
어머니가 말한 대로 그가 귀족이었다면, 귀족의 성에서 귀족다운 대우를 받고 자랐더라면, 그는 원하는 것을 모두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지위와 명예와 재물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으나,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알렉세이의 생각은 거기까지 미치지 못했다.
“증오하여 짓밟고, 부수고, 불에 태우고, 모든 것을 없애버릴 수 있다면 좋으련만.”
알렉세이는 마을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콘바야젠 백작가의 힘을 이용해 군대를 일으켜, 지도에조차 존재하지 않는 이 작은 마을에 잔혹한 저주를 내렸다.
그러나 사비나는.
“당신은 그럴 수 없었지요.”
사비나는 그럴 수 없었다.
사비나는 죽을 수 없었다.
죽지 못한 사비나에게 찾아온 것은 평안이 아닌 체념이었다.
자신을 향한 분노로 몇 번이나 자해를 하고 자살을 시도한다고 한들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원하는 것을 절대로 얻지 못하리라고 판단한 사비나는 제 몸에 깃든 저주를 증오하는 것마저 체념해 버렸다.
“욕망에서 분노가, 분노에서 증오가, 그리고 증오에서 체념이. 이루지 못한 인간의 탐욕은 저주의 순환고리 안에 자신을 가두고 만답니다.”
사비나가 죽을 수 없었던 이유. 죽음의 화신인 그녀가 불사였던 이유.
끝없는 욕망의 순환고리 안에 그녀의 생명이 갇혀 있었기 때문에.
“가엾은 나의 아가씨.”
아페티트가 손을 뻗어 사비나의 양 뺨을 감쌌다. 환각일 때는 미온조차 느껴지지 않았는데, 아페티트의 손은 상당히 뜨거웠다. 마치 불이 붙은 것처럼.
흠칫거리는 사비나의 입술을 아페티트가 삼키듯이 빨아들였다. 벌어진 입속으로 들어오는 것은 혀가 아니라 진득한 저주였다. 점막에 들러붙어 끈적거리는 그것을 뱉어 내려 해도 떨어지지 않았다. 사비나는 그것을 꼴깍, 삼켜 버렸다.
삼키기 전의 입안을 꽉 채우던 불쾌한 감각이 거짓말처럼, 목 너머로 저주를 삼키자 입안이 텅 비었다. 사비나가 혀를 내밀자 입술을 뒤덮고 있던 낯선 감각이 멀어졌다.
“나를 거부하지 마십시오.”
빛을 내뿜는 황금빛 눈동자와 빛을 빨아들이는 검은 눈동자가 서로를 마주했으나, 그곳에 비치는 것은 없었다.
“나와 하나가 되면, 당신은 영원의 굴레 안에서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홀릴 듯한 악마의 속삭임이 귓전을 간지럽혔다. 몸속을 간질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으나 사비나는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어느새 주위가 까맣게 물들어 두 남녀의 몸을 에워싸고 있었다.
사비나와는 달리, 아페티트의 몸은 온통 검게 물들어 있었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두 눈동자를 제외하고.
“나는 당신의 욕망을 이루어 드릴 수 있답니다.”
진득한 어둠이 사비나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뺨과 입술에 불쾌하리만큼 축축한 무언가가 맞닿았다. 자신을 속박하고 있는 것이 저주인지, 아페티트인지 파악할 수 없었다. 사비나는 제 어깨부터 등허리까지 욱신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아페티트가 더듬고 있는 것이리라.
“내게 당신을 맡기세요. 그럼 나는 당신에게 평안을 드릴 테니.”
욕망의 악마가 그녀에게 가장 원하는 것을 주겠노라 속삭였다. 자신의 죽음. 죽으면 더는 사람을 죽이지 않아도 된다. 정화의 불꽃에 타들어 가며 평생을 괴로워하기보다, 잠들듯이 평온하게 죽는다면 그보다 편한 일은 없으리라.
“아페티트. 그렇게 유혹하면, 내가 당신의 저주를 흡수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나요?”
“나를 죽이면 당신은 더욱 괴로워질 뿐이죠. 하지만 내게 당신을 맡긴다면 평안이 찾아온답니다. 어느 쪽을 택하는 것이 현명한지는 명확하지 않습니까?”
“나는 현명하지 않아요.”
“일부러 어리석은 선택을 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그럼 아페티트가 말하는 <현명한 선택>을 할 이유가 없다고 정정할게요.”
제 입술과 뺨에 들러붙는 불쾌한 감각으로부터 고개를 돌리며, 사비나는 아페티트를 밀어냈다. 진흙더미가 되어 버린 그는 사비나가 밀어낸다고 밀려나지도 않았으나, 기이하게도 사비나는 자신을 감싼 늪과도 같은 저주가 갑갑하지 않았다. 늪 속에 잠겨 있으면 숨이 막히고 말도 할 수 없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의식은 또렷하고 말도 거침없이 나왔다.
이것은 그녀가 그 어떤 저주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가장 강력한 저주의 화신이 된 까닭일까.
“만약 내가 혼자서 이곳에 왔다면, 나는 당신을 내 <욕망>을 이루어 주는 구원자라고 여겼을지도 몰라요.”
사비나는 늘 하나만을 생각했다. 자신의 죽음만을.
만약 사비나가 조금 더 일찍 아페티트를 만났더라면, 그가 죽음이라는 <욕망>을 이루어 주는 화신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저주를 넘겨주었을지도 모른다.
“사람의 근본은 변하지 않습니다.”
“아뇨. 사람은 변해요. 내 시간은 멈춰 있지 않았거든요.”
15년 동안 시간이 멈춰 있던 마을에서는, 그들의 <욕망>이 변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사비나의 <욕망>은 이 마을에 온 그 짧은 사이에 변해 버렸다.
“내 욕망은 죽어서 편해지는 게 아니에요.”
“살인을 하고 싶지 않다고 하신 말씀, 거짓이 아닐 텐데요.”
“맞아요. 하지만 내가 가장 욕망하는 건 따로 있거든요.”
죽어서 사라지는 것보다.
사람을 죽이지 않는 것보다.
더욱 강렬하게 바라는 것.
사비나가 이 순간 가장 열망하는 것.
끝을 모르는 인간의 탐욕과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인간의 변덕이 합쳐졌기에 만들어진 새로운 욕망.
“내가 죽어 버리면, 에르잔은 공을 세우지 못하거든요.”
제 손을 더럽히고 그 어떤 오명을 뒤집어쓰더라도. 고통 속에 몸부림치며 영원을 떠돌게 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루고 싶은 것이 있다.
“아페티트. 당신은 죽음을 원하지 않지요?”
타인을 조종하고 싶어하는 아페티트. 욕망의 화신인 그는 죽음을 바라지 않는다. 죽는다면 더는 그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없게 될 테니까.
“나는 욕망을 원해요.”
마치 나무의 뿌리처럼, 덩굴처럼 진득하게 얽혀드는 저주가 그 순간 불꽃이 되어 타올랐다.
늪 속의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