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카이라트가 언제부터 자리를 비웠는지, 짚이는 바가 전혀 없나?”
“모른다니까! 내가 새벽에 사비나가 떠나는 모습을 보러 나갔을 때도 집에 없었어.”
“그럼 이틀 전에 교회를 나섰을 때부터 안 보였다는 건가?”
“그건 아닐 거야. 어제 로스카옌 신부님이 빵을 전해 주러 오셨을 때 바구니가 두 개였거든. 오늘 새벽에 마을 북쪽으로 사비나를 데려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니까, 아마 없어진 건 저녁이랑 새벽 사이…….”
대강 시간을 가늠하던 카밀라의 눈이 커지더니 입이 딱 다물렸다.
“에르잔. 내가 기억력이 나빠서 그러는데.”
“갑자기 왜 그러나?”
“카이라트가 네 개의 저주를 묶으면 어떻게 된다고 그랬는지 기억해?”
카이라트가 연구하던 불로불사의 주술은 본래, 네 개의 핵을 하나로 묶어 완성하는 주술이었다.
로스카옌이 하는 것처럼, 마을의 네 어귀에 두고 균형을 맞추어 시간을 멈추게 하는 것이 아니고.
“불로불사가 될 거라고 그랬지…… 하지만 사비나 아가씨께서는 원래 불사의 몸이라고 하셨는데.”
“불사에 불사가 더해지면 어떻게 되는 거야?”
그걸 물어본들 주술에 대해 문외한인 에르잔이 알 리가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다.
저주는 중첩될수록 농도가 진해진다는 것.
더욱 강한 저주에 흡수된다는 것.
“……사비나 아가씨!”
에르잔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
“실패작이라고요? 이 내가?”
아페티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픽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황금색 눈이 가늘어졌다.
“사랑하는 나의 아가씨. 반려라고 해서, 당신이 하는 모든 말을 귀엽게 여겨 넘어가 드릴 수는 없답니다.”
“귀여워해 달라고 한 적 없어요. 당신 반려가 될 생각도 없고.”
“당신의 의사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와 알렉세이는 벌써 19년 전에 계약을 맺었으니까.”
“아버지도 나를 그렇게 대했죠.”
아버지에게 사비나의 의사는 중요하지 않았다.
사비나가 아무리 싫어해도, 반항해도, 울면서 애원해도, 자해를 일삼아도 아버지는 늘 잔인한 명령을 내렸고, 그 명령을 거부할 방법은 없었다. 아버지의 손에서 벗어날 방법 따위는 없었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그녀를 물건처럼 다루는 아버지라면, 사비나를 거래하듯 누군가에게 넘겨주는 것도 있을 법한 일이지만, 아페티트에게는 아니다.
<내가 다시 부를 때까지, 그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으렴.>
내가 다시 부를 때까지.
아버지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사비나의 역할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아페티트에게 넘겨줄 셈이었으면, <이제 쉬어도 좋다>며 그녀를 떠나보냈겠지.
황제의 대리인이라고는 하나 황제가 된 건 아니었다. 공작 작위를 받는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제국에는 콘바야젠 백작가 외에도 아직 많은 귀족 가문이 있었고, 제국 밖에는 더 많은 나라가 있다. 목표까지는 아직도 머나먼 여정이 남아 있으니, 아버지에게는 반드시 사비나가 필요할 터였다.
누구보다도 강력한 가문의 주술사가.
자신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저주의 화신이.
계약이 아니라 혈연으로 묶어 놓을 수 있는 딸이라는 존재가.
“하지만 아페티트. 당신은 내 아버지가 아니에요.”
사비나는 나자예프에게 물러나라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끼어들 타이밍을 찾지 못해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서 있던 나자예프가 난처한 표정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의 기다란 몸이 비틀거렸다. 팔에 깃든 저주가 슬슬 몸에 퍼지기 시작한 걸까. 나자예프는 마을의 다른 사람들보다도 저주에 특히 취약하다. 이곳에서 아페티트와 대치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나자예프의 몸에 어떤 이상이 생길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초조함에 입안이 바싹 마르는 것을 느끼며, 사비나는 아페티트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당신에게 나를 강제할 힘은 없어요.”
“당신은 벌써 나에게 두 번이나 조종당했지요.”
아페티트가 붉은 머리카락을 한 올 뽑아내더니 싱긋 웃었다. 가느다란 핏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은, 마치 살아있는 뱀이 꿈틀거리는 모양을 닮았다.
'욕망의 핵은 분진이었는데, 아페티트의 머리카락은 움직이는 게 바르셀다가 품고 있던 분노의 핵과 비슷하네.'
분노의 핵으로 이루어진 뱀은 사비나의 피를 노리고 그녀의 몸속으로 흘러들었다. 아페티트가 피를 채취해 사람을 조종하는 것과 어떤 연관이 있는 걸까. 사비나는 붉은 머리카락의 흔들림을 주시했다.
“그걸로 내 피를 빼앗아, 나를 또 조종하려고요?”
“아까운 피를 흘리기 전에 얌전히 따르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나는 내 피가 별로 아깝지 않은데요.”
“이런.”
아페티트가 가볍게 혀를 찼다. 뱀처럼 꿈틀거리던 붉은 머리카락이 일자로 곱게 뻗었다. 길쭉하고 예리한 그것은 칼이라기보다는, 긴 바늘을 닮았다.
‘잠깐. 바늘……?’
욕망의 핵은 형태가 없는 분진.
분노의 핵은 뱀 모양.
증오의 핵은 가시 모양.
그리고 체념의 핵은.
‘진흙…… 아니. 꼭 액체 같았어.’
물보다 더 진하고 서늘하며 무겁게 축 가라앉는 그것은 마치 바닥이 보이지 않는 늪 같았다.
페고라가 시체처럼 늘어져 있던 모습을 떠올린 사비나는 제 손목을 깨물었다. 사비나의 힘은 보통 여자와 같았지만, 짐승처럼 날카로운 이빨이 없더라도 매끄러운 피부를 가르고 피를 내는 것쯤은 할 수 있었다.
그녀의 손목에서 주르륵 흘러내린 붉은 피가 바닥에 떨어졌다.
얼마나 큰 상처를 입어도 죽지 않는 사비나는 피를 흘리는 것도, 상처를 입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자해하는 것을 본 아페티트와 나자예프의 얼굴은 서로 다른 감정으로 일그러졌다.
“사비나, 뭐 하는 거야!”
“그 아까운 것을……!”
사비나는 제 손목에서 흘러내린 피가 바닥을 적시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예전이라면 저주가 깃든 피는 검은 연기로 변하여 산화했을 텐데, 네 개의 핵을 모두 흡수한 지금은 검고 진득한 액체가 바닥을 덮듯이 서서히 영역을 넓히고 있었다.
“더 뒤로 물러나요. 닿으면 위험하니까.”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제게 하는 말임을 안 건지, 나자예프가 움찔거리며 검은 그림자로부터 멀어졌다.
“사비나…….”
뒤통수에 눈이 달린 것도 아닌데, 그의 걱정스러운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 사비나는 나자예프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처음 바르셀다랑 마주쳤을 때는, 서로의 저주가 섞이면서 괴로웠어요.”
사비나는 나자예프를 돌아보지 않고, 아페티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네나뷔스테의 핵을 흡수하고 나서는, 몸속을 간지럽히는 거슬리는 느낌만 받았죠.”
페고라의 체념의 핵을 흡수했을 때는 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웠는데, 언덕에서 굴러떨어져 공동묘지를 지나 공터까지 온 지금은 몸이 무겁지 않았다.
“아페티트. 포기하고 당신이 지닌 모든 저주를 내게 넘겨요.”
“창고에서 있었던 일로 꽤 자신감을 얻으신 모양인데, 지금 당신 곁에 있는 건 그 충실한 개가 아니라 도움도 되지 않는 반몫짜리 망나니랍니다.”
“에르잔을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그리고 전 지금 다른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상태가 아니에요.”
“당신이 흘린 피를 이것에 묻히기만 하면, 얌전한 인형이 되어 버리는 건 당신 쪽이라는 걸 잊으셨는지?”
아페티트가 머리카락을 흔들어 보이자, 꼿꼿하게 몸을 펴고 있던 그것이 다시 살랑거렸다.
“아페티트. 내가 왜 당신 목소리에 이끌려 창고에 들어가고, 당신의 환영을 봤는지 아나요?”
“내 저주가 당신 것보다 더 강하다는 뜻이잖습니까.”
사비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아페티트는 그녀보다도 강한 저주의 화신이라고.
어쩌면 그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가 조종당한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사비나에게는 타인을 조종하고자 하는 욕망이 없었다.
아버지의 명령을 그렇게 거부하면서도, 아버지를 조종해 선한 사람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불가능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그녀에게는 누군가를 뜻대로 하고자 하는 욕망이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나, 아페티트와는 달리.
“나는 욕망의 저주를 이곳에 와서 처음 겪었어요.”
그래서 아페티트를 거역할 수 없었다. 마치 온몸을 그에게 조종당하는 것처럼 이끌려 참고로 들어가, 그의 환영을 보고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에르잔과 함께 욕망의 핵을 흡수하러 갔을 때조차 사비나는 창고에 가득한 열 구의 시체를 보지 못하고, 아페티트의 환영만을 보았다.
“당신과 내가 같은 존재라고 말했죠?”
사비나는 검은 액체로 뒤덮인 흙을 밟고 아페티트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분명 단단해야 할 바닥이 꿀렁거리는 것을 보고 나자예프는 제 눈을 의심했다. 아페티트가 서 있는 나무 밑동까지 점점 검은 액체가 다가오고 있었다.
“무엇을 하시려는 겁니까?”
“죽음의 화신인 내가 <욕망>을 거부할 수 없는데, 욕망의 화신인 당신이 <죽음>을 거부할 수 있을까요?”
물에 검은 잉크를 떨어뜨린 것처럼, 주위가 삽시간에 검에 물들기 시작했다. 불길이 번지는 속도보다도 빠르게 아페티트의 주위를 에워싼 죽음의 저주에 바닥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사비나!”
“다가오지 마세요!”
나자예프에게 소리친 사비나는 흔들리는 나무 밑동 위에서 균형을 잡으려 애쓰는 아페티트를 올려다보았다.
죽지 않는 사비나는 바닥이 가라앉는 늪 속에서도 버틸 수 있지만, 과연 아페티트도 그럴까.
“아페티트. 욕망의 저주를 나한테 넘겨요.”
“귀여운 허세를 부리시는군요. 당신이 사람을 죽이지 못하는 성미라는 것을 내가 모를 줄 알았습니까?”
사비나가 할 수 있는 최대의 협박이다. 아페티트가 정말로 위험해지는 것을 그녀는 바라지 않는다. 분명 죽음의 저주가 그를 덮치기 직전에 그녀가 저주를 거두어들이리라.
사비나가 이 마을에 온 뒤로, 아무도 죽이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 뛰는 것을 보며 아페티트는 그렇게 판단했을 것이다.
“아페티트. 당신이 이 마을에 온 이후의 내 모습밖에 모르는 모양인데.”
사비나는 무릎까지 잠긴 검은 늪 속에서 아페티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내가 아무리 죽이기 싫다고 발버둥 쳐도, 이 저주는 한 번도 내 부탁을 들어준 적이 없어요.”
사비나의 검은 눈동자에서 마치 물들인 색이 빠지듯, 검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늪 속의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