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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 속의 불-121화 (121/189)

122화

“당신이 아까 나자예프에게 한 말, 그대로 돌려줄게요.”

“그대로, 라고 하심은?”

“함부로 단정 지었다가는 뒤통수 거하게 맞을 거라고 그랬잖아요?”

사비나의 대답에 아페티트가 눈을 가늘게 하고 웃었다. 온화하면서도 동시에 섬뜩함을 담아낼 수 있다면 저런 표정이 될까. 차가운 돌방에 갇혀 있을 때보다도 더욱 서늘한 무언가가 제 솜털을 갈질이는 느낌에 사비나는 가볍게 어깨를 들썩였다. 분명 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오고 있는데 기이할 정도로 적막했다.

아페티트의 머리카락이 가볍게 흔들리는 것을 보면, 저것은 환영이 아닌 게 분명하지만.

“사랑하는 나의 아가씨. 알렉세이는 약속을 지켜서 당신을 내게 보냈답니다.”

“아버지는 당신에 대해서는 내게 한마디도 말한 적이 없어요.”

“알렉세이는 불가능한 일에 매달리는 것을 싫어한답니다. 시간을 끌거나 다른 방법을 찾는다고 제가 당신을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을 테니, 결국 단념하고 당신을 내게 보낸 것이지요.”

“그럴까요?”

“아니면 왜 당신을 이곳에 보냈겠습니까?”

사비나의 두 눈이 아페티트를 지나, 그의 발이 디디고 있는 나무 밑동을 향했다.

남자의 무게에 짓눌려 꺾인 나뭇가지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아버지가 단념할 리가 없어.’

사비나를 버린다면, 그것은 그럴 수 있다.

아버지는 그녀를 사랑한다고 늘 말했지만, 그 접촉에서 애틋하거나 따스한 감정을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부모자식 간의 인연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아버지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정상적인 가족의 그것과는 한참 다르다는 것쯤은 사비나도 알 수 있었다.

그러니 만약 불가피한 상황에 닥친다면,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를 버릴 것이다.

‘하지만 내가 사라지면, 콘바야젠 가문은 저주의 화신을 잃게 돼.’

콘바야젠 가문에 주술사가 없어 사비나의 존재가 필요하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아버지가 사비나를 버리는 것은, 그녀보다 더욱 유용한 저주의 화신을 얻었을 때뿐이다.

처음 아페티트의 능력을 알았을 때는, 아버지가 사비나를 버리고 대신 아페티트를 가문의 주술사로 불러들이거나, 두 사람의 저주를 섞어 이지를 잃고 인형처럼 움직이는 어떤 존재를 만들려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아페티트, 당신. 글을 모른다면서요?”

“……악마가 되는 데 인간의 언어가 무슨 상관이지요?”

“아버지는 당신을 이용한 거예요.”

“서로 원하는 것을 위해 한 번씩 이용한 셈이지요. 쌍방 합의하에서라고 할까요.”

아페티트는 웃고 있었으나, 그 웃음에 확신은 깃들지 않았다. 문자를 모른다고 해서 지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비나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알아듣지는 못하더라도, 이상함을 감지하기는 했을 것이다.

“그렇게 내 아버지에 대해 잘 알고 있다면, 모를 리가 없을 텐데요?”

아페티트는 강력한 저주의 화신이다. 사비나가 아페티트를 처음 마주했을 때 이미 그에게 조종당하는 상태였다는 건, 그가 사비나보다 강한 저주를 품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또한 제 능력을 통제할 수 없는 사비나와는 달리 그는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사비나는 누군가를 죽일 수는 있어도, 그 사람의 죽는 방법을 결정할 수는 없다.

또한 죽이고 싶지 않더라도, 자신에게 닿으면 저주에 익숙하지 않은 인간은 전부 죽어 버린다.

사비나는 자신의 <죽음의 저주>를 통제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페티트는 통제할 수 있다. 나아가 누구를 어떻게 조종할지까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그런데 아버지는 어째서 아페티트를 이 마을에 가두고, 사비나를 데려왔을까.

사비나는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에르잔을 이곳으로 보낸 이유와 같겠지.’

저주가 통하지 않는 에르잔이 그 존재만으로 거슬려서 황실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보내 버린 것처럼.

아페티트는 누군가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화신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의 아버지는 일찌감치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더 강력한 저주의 화신인 아페티트를 포기하고, 뜻대로 다룰 수 있는 저주의 화신인 사비나를 새로이 만들어 냈다.

그리고 사비나로 하여금 이곳의 네 개의 저주의 핵을 흡수하게 만들어, 더욱 강력한 저주의 화신으로 만들었다.

콘바야젠 가문에 필요한 것은, 주술사가 아니다.

미래를 예지하는 자가 아니라, 미래를 바꾸는 자가 필요했다.

아버지가 원하는 그대로의 미래를 만들어 줄 존재가 필요했다.

아페티트가 얼마나 강력한 저주의 화신이든지 간에, 그는 아버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될 수 없다.

그는 <욕망의 화신>이니까.

“아페티트. 당신은.”

사비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한 마디 한 마디 힘을 주어 말했다.

“실패작이에요.”

***

바람이 습하면서도 추웠다. 맑은 날인데도 이상하게 공기가 무겁게 느껴졌다. 에르잔은 카밀라를 따라 서쪽 우물가로 향하면서, 이제까지 마을 안을 돌아다니며 익히 보아 왔던 풍경에 달라진 점이 없는지 면밀히 살폈다.

메마른 흙과 누렇게 잎이 변해 버린 잡초, 저주에서 벗어났음에도 나무껍질은 거무죽죽한 색을 띠고 있었고 잎은 오랫동안 햇볕을 받지 못한 것처럼 탁한 잿빛이 뒤섞여 있었다.

저주에서 벗어났으면 생기를 되찾아야 할 터인데, 건강해 보이는 카밀라와는 달리 마을의 풍경은 여전히 죽어 있는 상태였다.

‘사비나 아가씨께서 연못을 정화하셨을 때는 물이 맑아졌는데.’

검고 탁해서, 생명체라고는 무엇 하나 살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연못은 사비나가 저주를 흡수하자 투명한 빛깔로 바뀌었다. 저주로 일그러진 카밀라의 얼굴은 원래대로 되돌아왔고, 절뚝거리던 걸음걸이도 안정되었다.

그렇다면 저주에서 벗어난 이 마을에는 다시 생기가 돌아야 할 터인데, 적막한 마을의 풍경은 시간이 멈춰 있을 때보다도 더욱 기이하게 느껴졌다.

마치 무너지기 일보 직전의 상태 같다고 할까.

에르잔은 기이한 풍경을 보고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으나, 카밀라가 왜 안절부절못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메마른 우물 앞에 선 카밀라는 돌에 손을 짚고 고개를 숙여 아래를 확인하고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에르잔. 여기 있어. 네가 그냥 내려가면 도르래가 네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완전히 부서져 버릴 테니까, 내가 집에 가서 튼튼한 밧줄을 가져올게.”

“아니, 기다려라.”

에르잔은 집으로 돌아가려는 카밀라를 만류하고, 우물의 낡은 밧줄과 돌을 쓰다듬었다.

‘저주가 남아있다면 내 손에 정화가 될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퍼석!

에르잔이 우물의 벽돌을 손으로 움켜쥐자, 잿빛의 돌이 석회가루처럼 바스러졌다.

크게 힘을 준 것은 아니다. 힘을 주었다고 한들 에르잔에게는 돌을 가루로 만들 만큼의 괴력은 없었다.

그런데도 그의 손안에서 잿빛의 돌은 형체도 없이 무너져 내렸다. 까마득한 아래를 향해 시선을 내린 에르잔은 옆의 돌도 움켜쥐었다. 그러자 에르잔의 손안에서 돌은 힘없이 바스러졌다.

“에르잔, 뭐 하는 거야? 왜 우물을 부숴!”

“부수는 게 아니다.”

그저 붙잡기만 했는데 돌이 바스러지는 것을 과연 정상이라고 볼 수 있을까. 에르잔이 도르래에 감긴 밧줄을 손끝으로 쓸자, 밧줄이 버석버석한 소리를 내더니 도르래가 쿠르르 굴러가는 소리와 함께 상단에 고정되어 있던 두레박이 뚝 떨어졌다.

첨벙.

아래는 물이 고여 있었는지, 두레박이 물속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야, 에르잔. 너 지금…….”

“문제는 내가 아니라 여기에 있다.”

에르잔이 손으로 툭툭 건드린 것만으로 기둥이 기우뚱, 하더니 옆으로 꺾였다. 낡은 판자를 고정해 만든 지붕이 에르잔 쪽을 향해 떨어졌다.

“에르잔, 조심해!”

빠자작!

요란한 소리와는 달리 에르잔과 부딪힌 우물 천장은 마치 찢어진 종이처럼 조각조각 흩어졌다. 에르잔은 머리와 옷에 붙은 먼지를 툭툭 털어 냈다. 나무로 만들어졌다고는 해도 제법 무거워서 충격이 있었을 텐데, 에르잔은 아무런 타격을 입지 않은 듯했다.

“괘, 괜찮아?”

“나는 괜찮다.”

“어떻게 된 거야? 그거 좀 건드렸다고 우물이 왜 부서져?”

에르잔은 대답하는 대신, 미간을 찌푸린 채 까마득한 우물 속을 내려다보았다.

사비나는 저주만을 흡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에르잔은 저주만을 정화할 수 없었다.

그의 정화능력은 저주와 저주받은 대상을 구분하지 않고 태워 버려, 저주에 물든 꽃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네나뷔스테와 그 동생은 정화의 불꽃에 화상을 입었다.

‘나는 저주만을 정화할 수 없지만, 사비나 아가씨께서는 저주만을 흡수할 수 있었지.’

에르잔은 며칠 전 밤에 겪었던 일을 떠올렸다.

떡갈나무잎에 물든 저주만을 닦아 내서, 잎매가 도드라진 나뭇잎만이 선명하게 남게 만들었던 것을.

에르잔이 능력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면, 반대도 가능하지 않을까.

에르잔이 저주와 저주받은 대상을 분리해, 저주만을 정화할 수 있게 된 것처럼.

그 반대로, 사비나가 저주와 저주받은 대상을 분리하지 못하고, 전부 흡수해 버리게 되었다면?

“카밀라.”

“왜, 왜?”

“카이라트가 언제부터 자리를 비웠는지, 짚이는 바가 전혀 없나?”

늪 속의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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