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 속의 불-120화 (120/189)

121화

“안전할 것 같다고?”

“그래.”

카밀라가 에르잔의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돌렸다. 태연한 척 입은 웃고 있지만, 잔뜩 긴장한 듯 양어깨가 추어올라가 있었다.

에르잔은 카밀라의 행색을 살폈다.

입고 있는 옷도 평범하고, 머리쓰개 아래로 내려온 머리카락이 덜 빗은 듯 삐져나오긴 했지만 지저분한 꼴은 아니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긴장하고 있는 걸까.

마치 무서운 적으로부터 쫓기다가, 겨우 숨을 곳을 찾아 몸을 웅크리고 숨죽이고 있는 짐승처럼.

“카밀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라.”

“뭘 말하라는 거야? 아무 일도 없어!”

“안전한 곳을 찾을 만큼 위험한 상황이라고, 방금 말하지 않았나?”

“위험한 상황이라기보단…….”

카밀라는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갑자기 소름이 돋았는지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소름 끼쳐서.”

“소름 끼친다고?”

“원래 우리 마을의 시간은 멈춰 있었잖아.”

카밀라는 여전히 에르잔과는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로, 녹색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리며 고개를 좌우로 기울였다. 긴장을 풀기 위한 동작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에르잔은 그녀의 태도를 문제 삼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돌아오니까…… 시간이 돌아오니까…… 끔찍해서.”

“끔찍하다니, 무엇이?”

“전부, 다.”

카밀라는 몇 번 눈을 깜박깜박하다가, 간신히 고개를 들어 에르잔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와 눈이 마주치자 얼른 다시 고개를 숙였다. 꼭 뭔가 잘못한 것을 들킨 아이처럼.

“익숙했을 때는 몰랐는데, 갑자기 저주의 영향에서 벗어나고 나니까……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카밀라의 작은 주먹이 떨리고 있었다. 그녀가 몸을 떠는 것이 두려움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뭔가 참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몸에 어떤 이상이 생겼나?”

“내 손 보여 줬잖아. 깨끗하다고.”

검댕이 묻어 있었는데.

에르잔은 그렇게 생각했으나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카밀라가 다시 고개를 털더니 에르잔의 옆으로 돌아와 한 걸음 정도를 남기고 어색하게 멈춰 섰다.

“막…… 기분이 이상해.”

“이상하다니, 어떻게?”

“모르겠어…… 화가 나고, 짜증 나고, 막 서러운데…… 가만히 있으면 집 안에서 미친 사람처럼 날뛸 거 같아서 여기로 달려왔어.”

저주에서 갑자기 벗어난 반동일까? 에르잔은 잠시 고민하다가 카밀라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뭐야?”

“네 머리카락을 한 올 뽑아 봐라.”

“머리카락은 갑자기 왜?”

“저주가 남아 있다면 내 손에 정화될 거다. 네 몸에 직접 손을 댔다가 화상이 입기라도 하면 곤란하니.”

“저주 같은 건 이제 없다니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불안하긴 했는지, 카밀라는 제 머리카락을 한 올 뽑아서 에르잔의 손바닥 위에 놓아 주었다. 에르잔은 제 손바닥 위의 구불구불한 갈색 머리카락을 노려보았다.

끝이 갈라져 있기는 했으나, 저주가 깃들지는 않았는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저주에서 해방되었다는 건 사실인가 보군.”

“그러니까 그렇게 말했는데…….”

“그런데 뭐가 그렇게 불안하고, 화가 난다는 거지?”

에르잔의 질문에 카밀라가 다시 목을 움츠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너무, 조용해.”

“조용하다고?”

“에르잔, 너 고목나무를 자르면 그게 어떻게 쓰러지는지 알아?”

뜬금없는 질문에 에르잔이 의아한 듯 눈을 깜박이자, 카밀라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양손으로 제 목을 감쌌다.

“끝까지 베어 내면 바로 무너질 것 같지? 안 그래.”

커다란 고목을 베어 낼 때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카밀라의 마을은 주위가 검은 사철나무로 빽빽하게 둘려 있었기에, 그녀는 어릴 적부터 나무를 베는 풍경을 보아 왔다.

“베이고 나서 잠깐은, 아주 조용해.”

멀쩡하다, 가 아니라 조용하다, 는 표현을 쓰면서 카밀라는 뒤를 흘끔거렸다. 마치 누가 엿듣고 있지는 않은지 확인이라도 하듯이.

“처음 기울어질 때는 아주 약간, 소리도 잘 나지 않을 정도로 천천히 움직이거든.”

베인 나무가 원래의 형태를 <조용히> 유지할 때.

그리고 아주 미약한 소리를 내며 천천히 기울어질 때.

그때까지는 아주 평온하다.

그러나.

“밑동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기울면, 갑자기 확 무너지거든.”

“……지금 그 소리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만.”

“지금이 딱 그 조용한 상태 같아서.”

나무를 베어 내고, 기울어진 나무가 폭싹 주저앉기까지의 짧은 고요함.

감당할 수 없는 폭풍과도 같은 것이 밀려오기 직전의 숨죽인 듯한 고요함이 카밀라를 불안하게 했다.

어서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조바심과, 벗어나면 더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뒤섞여 머리를 양쪽으로 잡아 누르는 것 같았다.

바로 교회로 뛰어오지 않았더라면, 에르잔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카밀라는 비명을 지르며 발작을 일으켰을지도 모른다.

처음 이 마을에 저주가 걸렸을 때, 저주를 받아들인 인간들이 괴로움에 몸부림쳤을 때처럼.

“너는 저주를 정화할 수 있잖아? 그래서 괜찮을 것 같았지.”

“……내게 그런 능력이 있다고, 사비나 아가씨께서 말씀하시긴 했지만.”

에르잔은 검은 숲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 예전에는 이 숲을 지나면서, 저주에 물든 나뭇가지를 꺾을 수 있었다. 꺾인 단면에 남아 있던 저주가 정화의 불꽃에 타들어 가면서, 약하게 금빛으로 빛났던 것을 기억한다.

그런데 왜 지금은 정화는커녕, 들어갈 수조차 없는 걸까.

“만약 뭔가 온다면, 이 너머에서 나타나겠군.”

에르잔 자신의 정화 능력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저주.

에르잔은 저주가 두렵지는 않았다. 자신에게 정화 능력이 있어서는 아니다. 자신이 다른 평범한 사람과 마찬가지로, 저주를 입고 얼마만큼의 고통을 짊어지더라도, 에르잔은 그것을 감당할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이겨 낼 자신도 있었다.

그를 두렵게 하는 것은 저주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사비나 아가씨께서 이 너머에 계실 텐데.”

마을의 북쪽, 사람들이 사는 구역은 이 검은 숲 너머에 있다고 들었다.

차라리 묵직한 저주가 들어앉은 것이 이 숲뿐이라면, 숲 너머는 이곳과 마찬가지로 안전하다면 그나마 나으련만.

만약, 숲 너머에도 이 정도로 강력한 저주가 퍼져 있다면.

“미안하다, 카밀라.”

“뭐가?”

“네 안전을 보장할 수 없어…… 나는 사비나 아가씨를 구하러 가야 한다.”

“너 등이 아직 안 낫지 않았어? 그리고 저 안으로는 못 들어간다며!”

“억지로라도 들어가 봐야지.”

만약 사비나가 안전한 상태면, 제가 또 저주에 노출되는 바람에 그녀의 걱정만 살지도 모른다.

괜한 짓을 한다는 의심도 있기는 했다.

그러나 에르잔은 더 이상 불안해하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제가 또다시 다치더라도, 사비나를 울리더라도.

그녀가 안전한 모습을 이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발을 들일 수 없다면 돌아서 가야 하는데…… 여기서 제일 빠른 길이 어디지?”

“그런 거 몰라.”

“모른다니?”

“원래는 이 마을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단 말이야.”

마을을 둘러싼 숲. 그 밖으로 나가지 못한 지 15년이다. 이제 와서 숲을 건너 밖으로 나갈 수 있다고 해서 길을 찾을 수 있을지 카밀라는 자신이 없었다. 맹수가 출몰하는 산속은 위험하기에, 오딜을 비롯한 장정 여러 명이 사냥을 나서는 거면 모를까, 카밀라는 숲 밖으로는 나가본 적이 없었다.

“알았다. 그럼 너는 여기 있어라. 내가 혼자 길을 찾아볼 테니.”

“잠깐만!”

카밀라가 에르잔의 옷깃을 붙잡았다. 저주에 의해 검에 타들어 간 옷자락은 카밀라가 잡아당긴 것만으로 일자로 죽 찢어져, 등 쪽의 상처가 일부 드러났다.

“힉! 미안!”

“……괜찮으니 놓기나 해라.”

“아니, 그게…….”

“또 뭐지?”

“숲 밖으로 나가지 않고도, 북쪽으로 갈 방법이 있기는 해.”

카밀라는 바쁘게 눈을 굴리다가, 교회와 제집 사이에 자리한 우물을 가리켰다.

“우리 마을 우물은 다 이어져 있거든. 동서남북, 전부.”

북쪽 우물은 메마른 지 오래라고 들었다. 서쪽 우물도 사비나가 저주를 흡수한 까닭에 더는 시체가 쌓여 있지 않았다.

“에르잔. 너 헤엄칠 줄 알아?”

***

아페티트가 한 걸음 사비나를 향해 다가오자, 그녀는 몸이 굳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페티트. 당신, 아버지와 무슨 약속을 한 거죠?”

“가장 사랑하는 것을 받아가겠다고 약속했지요.”

사비나. 사랑하는 나의 딸.

아버지가 늘 버릇처럼 중얼거렸던 말을 떠올린 사비나는 가슴이 싸늘하게 식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버지는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하며, 잔인한 명령을 내려왔다.

사비나는 자신을 고통 속으로 밀어 넣는 아버지를 원망했지만, 그렇다고 아버지를 완전히 미워할 수는 없었다.

그리 살가운 부녀 사이는 아니지만, 사비나에게는 유일한 가족이었다.

아버지가 제게 닿아도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몰랐더라면, 아마 그가 제게 닿으려 들면 피했을 정도는 되었다.

그런데 아페티트와 나눈 약속이 사실이라면.

‘처음부터 나를 이 남자에게…… 보내려고……?’

사비나는 눈을 가늘게 하고 아페티트를 바라보았다.

빙그레 웃는 입 모양이 기이했다.

그러나 처음처럼 압도되는 느낌은 없었다.

네 개의 저주의 핵을 자신이 가지고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에르잔의 정화의 힘에 의해 아페티트가 약해진 탓인지는 몰라도.

‘아니. 아버지는 나를 제물로 바치려고 이곳에 보낸 게 아니야.’

사비나는 나자예프에게 물러나라는 듯이 눈짓을 했다.

“아페티트. 이 마을의 시간이 멈춘 이후로, 아버지와 만난 적 없죠?”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요. 제가 원하는 건 당신뿐인 것을.”

“그럼 아버지가 나를 죽음의 화신으로 만들었을 때,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겠군요.”

사비나. 너는 정말 완벽한 아이란다.

그 어쩐 저주도 네 몸에 깃든 것보다 강력하지는 않을 거란다.

“당신이 아까 나자예프에게 한 말, 그대로 돌려줄게요.”

늪 속의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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