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 속의 불-119화 (119/189)

120화

23. 마지막 비밀

따스하고 포근했던 옆자리가 싸늘해진 것을 느끼며 에르잔은 눈을 떴다.

암막커튼 너머로 보이는 햇살이 밝았다.

‘이런. 설마 내가 대낮까지 잔 건가?’

불현듯 몸을 일으킨 에르잔은 창가로 걸어가 커튼을 걷었다. 완전히 파랗게 물든 새벽하늘이 쏟아질 것처럼 매달려 있었다.

이 마을에 온 뒤로는 늘 흐린 구름 사이로 간간이 햇볕이 내리쬐는 하늘만 보아 왔다. 이렇게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을 보는 건 에르잔도 오랜만이었다.

그것이 마을의 저주가 사라진 덕분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에르잔은 다급히 침대로 다가가 시트를 짚었다.

사비나는 몇 시에 일어나 나가 버린 건지, 그녀가 누워 있었을 제 옆자리가 싸늘했다.

주름을 펴느라 어설프게 끝만 당겨 놓은 시트가 우그러져 있었다.

에르잔을 깨우지 않기 위해 조심조심 자리를 정리했을 사비나를 떠올리니 가슴이 시큰해져, 에르잔은 가슴 한중간을 쓰다듬으며 이유 모를 적적함을 달랬다.

“사비나 아가씨…….”

“에르잔!”

“으와앗!”

노크도 없이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온 것은 카밀라였다. 에르잔은 막 침대에서 일어난 까닭에 아직 속옷 차림이었다. 그가 당황하여 시트를 들어 제 몸에 덮어씌우자 카밀라는 입을 헤 벌리고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방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았다.

“걱정해서 찾아왔는데, 아주 깨가 쏟아졌나 봐?”

“그게 무슨…….”

“왜. 아주 가슴팍이 울긋불긋하던데?”

“……카밀라!”

에르잔이 당황해서 소리치자, 문 너머에서 꺄르르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하긴. 사비나 허락도 없이 남의 남자 몸을 보면 안 되지. 괜찮아, 에르잔. 나 기억력 나쁘거든? 금방 잊어버릴 거야.”

카밀라는 대수롭지 않게 둘러대는 듯했으나 목소리는 한껏 들떠 있었다. 저를 배려하는 듯한 그 목소리에 괜히 더 얼굴이 뜨거워져, 에르잔은 서둘러 옷을 주워 입었다.

‘사비나 아가씨 앞에서도 추태를 보였는데, 이젠 다른 사람 앞에서마저……! 부상을 입었다고 너무 늘어져 있었어.’

귀까지 뜨끈뜨끈하게 열이 올라 있었으나 손등으로 뺨을 철썩! 두드리자 민망한 기분은 조금 가시는 듯했다. 에르잔은 옷차림을 정돈하고 문 너머를 향해 물었다.

“카밀라. 무슨 일인가?”

“에르잔. 옷부터 입지그래?”

“……다 입었다.”

“아, 정말? 그럼 문 다시 열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카밀라의 손이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걸쇠가 낡아 언제 부서져도 이상하지 않을 나무문을 요령 좋게 연 카밀라는 까치발을 떠도 한참 고개를 들어 올려야 마주 볼 수 있는 에르잔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것 봐.”

“뭘 말인가?”

“내 손 말이야. 깨끗하지?”

카밀라의 손바닥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청결한 정도를 묻는 건가?’

에르잔은 오딜이 제 손을 검사했을 때처럼 카밀라의 손을 눈으로 훑었다.

낡은 문고리를 잡아 돌리느라 카밀라의 작은 손에 검댕이 조금 묻어 있었다.

“손바닥에 묻은 게 눈에 보이지 않는 건가? 손을 씻는 게 좋을 것 같다만.”

“야! 누가 지금 그거 물어봤어?”

깨끗한지를 물어보기에 검뎅이 묻었다고 솔직하게 답변해 준 것뿐인데, 카밀라가 역정을 내며 바닥에 발을 쾅 굴렀다. 에르잔의 가슴팍에도 닿지 못할 만큼 조막만 한 체격인데 어찌나 힘이 좋은지, 그녀가 발을 구른 자리를 따라 바닥의 나무판자에 쩍 금이 갔다.

“저주가 풀렸다고!”

“저주가?”

“그래! 넌 정화술사라면서 그런 것도 몰라?”

“나는 정화술사가 아니다.”

저주를 정화하는 체질을 타고나긴 했지만, 에르잔은 정화술사가 아니었다. 제 뜻대로 저주만 지울 수도 없고, 저주와 저주가 아닌 것을 구분하는 안목도 아직 모자랐다.

다만 카밀라의 안색이 한층 밝아진 것은 알 수 있었다. 사비나가 저주를 흡수해 얼굴과 다리를 원래대로 되돌려주었을 때도 낯빛이 약간 어두웠는데, 지금은 볕에 살짝 그을린 듯한 건강한 색을 띠고 있었다.

“아무튼, 사비나가 네 개의 핵을 전부 흡수한 모양이야. 혹시나 해서 발가락을 바늘로 찔러 봤는데, 피가 멎어도 상처 자국이 남아 있는 거 있지? 예전 같았으면 금방 사라졌을 텐데!”

왜 자기 몸에 그런 짓을 하는지 에르잔은 이해할 수 없었으나, 카밀라가 너무 열성적으로 떠들어대고 있었기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날이 완전히 밝지 않았는데…… 사비나 아가씨께서 벌써 핵을 흡수하신 건가? 그런데 왜 돌아오지 않으셨지?’

지금 오고 있는 중인 걸까?

에르잔은 문앞을 가로막고 있는 카밀라를 훌쩍 들어올렸다.

“엄마야! 에르잔, 너 뭐 하는 거야?”

“미안하다. 문 앞을 가로막고 있으면 내가 지나갈 수가 없어서.”

카밀라를 사뿐히 바닥에 내려 준 에르잔은, 그녀를 돌아보지 않은 채로 간단한 사과만 건네고 바로 복도를 지나 뒷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차가운 새벽바람이 살갗을 때리자, 달아올랐던 두 뺨과 귀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에르잔, 너 뭐야? 사람이 말을 거는데 그렇게 금방 가 버리는 게 어딨어!”

“이야기라면 카이라트에게 해라.”

“미쳤어? 내가 왜 카이라트랑 이야기를 해!”

“그럼 나자예프라든가…….”

“나자예프는 사비나 따라갔을걸? 걔 누구 뒤에 달랑달랑 붙어서 따라가는 거 잘해.”

에르잔은 카밀라의 신랄한 표현을 지적하는 대신 푸른 눈을 가늘게 했다. 확실히 카밀라는 건강하고 밝아진 듯했지만, 어딘가 이상했다.

“정말로 저주가 풀렸다고?”

“응. 시간이 멈춰 있던 게 흐르기 시작한 게 확실해. 말했잖아. 바늘로 찌른 자국이 안 없어졌다고.”

“그렇다면 저 숲은 뭐지?”

에르잔이 가리킨 방향은 북쪽. 울창한 검은 사철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자리에, 그림자와는 다른 거뭇한 무언가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어……? 그러게. 저게 뭐지?”

“저주를 흡수하는 과정에서 뭔가 문제가 생겼는지도 모르겠군. 나는 우선 사비나 아가씨께 가 보겠다.”

등의 상처는 아물지 않았지만, 몸을 움직이는 데 제약을 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약간의 쓰라림은 차라리 잠을 깨우기에 딱 좋았으므로, 에르잔은 망설이지 않고 북쪽 숲을 향해 뛰었다.

“어? 에르잔! 잠깐만!”

“……읏!”

북쪽 숲으로 향하던 에르잔이 마치 뭔가에 가로막힌 듯 뒤로 밀려났다. 그가 입고 있던 옷 소매가 검게 물들더니, 바삭바삭한 가루가 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에르잔의 피부에는 상처 하나 없지만, 그의 옷을 삽시간에 재로 만들어 버린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저주……?”

“에르잔, 괜찮아?”

“다가오지 마라, 카밀라. 이 숲은 저주에 물들어 있어.”

에르잔은 자신을 밀쳐 낸 그림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황금빛으로 불타 바스러져야 할 저주는 오히려 에르잔의 손을 잡아먹을 듯이 사나운 소리를 내며 휘몰아쳤다.

“이게, 대체……?”

“에르잔. 왜 그래?”

“내 정화 능력이 듣지를 않아. 어째서……?”

제 능력이 약해진 건지, 아니면 그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저주인 건지는 알 수 없으나,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것을 정화해야 한다.

이 극도로 농밀한 저주의 숲 너머에 사비나가 있다는 사실이 에르잔을 다급하게 했다. 그는 몇 번이나 그림자를 손으로 헤집으려 했지만, 그것은 마치 연기와도 같이 에르잔의 손 사이로 빠져나가, 보란 듯이 그의 옷자락을 태워 버렸다.

긴 소매가 떨어지고 바지의 무릎에 구멍이 크게 나고 나서야 에르잔은 제힘으로 이것을 어찌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로스카옌 신부님도 사비나 아가씨와 함께 계실 텐데…… 카밀라. 카이라트는 집에 있나?”

“뭐야. 카이라트는 왜 찾아?”

“카이라트는 주술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까. 이 숲이 어째서 나를 가로막는지도 알고 있을 게 아니냐.”

“글쎄. 카이라트가 그런 걸 알까? 안다고 해도 안 알려 줄 것 같은데.”

입을 열게 할 방법이라면 얼마든지 있다.

사비나의 앞에서는 정도를 걷는 기사의 모습만을 보여 왔지만, 에르잔이 정도를 지키는 것은 굳이 비상식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아도 제가 하려는 일에 지장을 받지 않기 때문이지, 그것을 할 줄 몰라서가 아니었다.

“카이라트를 만나야겠다. 일단 집으로 찾아가야겠군.”

“카이라트는 집에 없어.”

“없다고? 외출이라도 한 건가?”

“나야 모르지.”

카밀라가 눈을 굴리며 어깨를 으쓱하자, 에르잔은 속이 답답해졌다. 동생들을 아끼는 네나뷔스테가 특이한 건지, 카밀라는 카이라트가 없어져도 전혀 걱정하지를 않았다.

아니, 카이라트가 숨기고 있던 진실을 듣기 전에는 사비나에게 그를 치료해 달라고 매달렸을 정도니, 남매간의 정이 없지는 않을 터인데.

아무래도 그때 얻은 배신감이 꽤 오래 남아있는 것 같았다.

에르잔은 미간을 찌푸렸다.

“카밀라. 단순히 저주가 풀린 모습을 내게 보여 주려고 나를 찾아온 건가?”

“음…… 그래, 맞아. 그럴 수도 있지. 왜?”

기분 탓일까?

카밀라의 녹색 눈동자에 불현듯 공포심이 떠올랐다 사라진 것 같았다.

“카밀라. 뭘 숨기고 있지?”

“뭐야. 내가 뭘 숨긴다고 그래?”

저주에서 벗어났기 때문일까. 불안과 걱정을 견디기 위해 애써 밝은 모습을 유지하던 카밀라가, 지금은 무척 위태로워 보였다.

한껏 부풀어 올라, 언제 터져버릴지 모르는 풍선처럼.

“말해라, 카밀라. 사비나 아가씨께 해를 입히려는 거라면 너라도 용서할 수 없어.”

“그런 거 아니야. 나는 그냥.”

거기서 말을 끊고, 카밀라는 에르잔을 향해 바짝 다가왔다.

“네 옆에 있으면, 안전할 것 같아서.”

늪 속의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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