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22. 고해
「알렉세이. 너에게는 귀족의 피가 흐르고 있단다.」
그의 어머니는 자신을 쏙 빼닮은 첫째 아들에게 늘 그 말을 주문처럼 외웠다.
검은 머리에 붉은 눈동자를 지닌 세 형제의 어머니는 마을 내에서도 상대하려는 자가 없을 정도로 지독한 사고뭉치였지만, 늘 마을 밖의 세상을 꿈꾸던 상상력 풍부한 여인이기도 했다.
「어머니. 산 아래서는 우리 마을의 존재도 모른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우리는 산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잖니?」
험준한 산속에 위치한 작은 마을. 마을의 규모 자체는 그리 작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산 아래서부터 마을까지 오는 길은 무척 험난한 데다 맹수까지 어슬렁거리는 통에 이곳에는 여행객은커녕 세금을 걷으려는 관원조차 들르지 않는다.
마을의 호위대장을 주축으로 한 청년들은 주기적으로 맹수 사냥을 나섰다. 곰이나 늑대를 잡아 오면, 고기는 먹고 가죽은 벗겨 옷을 만들되, 이따금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짐승의 남은 머리를 박제하여 팔아 치우기 위해 산 아래 소도시를 방문했다.
박제한 짐승 머리를 팔아 치운 돈으로는 대체로 비축할 식량을 구매했지만, 종종 마을 사람들의 부탁을 받고 장신구나 서책 등을 사 오기도 했다.
글자를 아는 사람이라고는 교회의 신부만이 유일하던 시절, 알렉세이의 어머니는 매일 일과가 끝나면 늘 교회를 찾아가 글을 배우고는 했다.
그러나 문자를 더듬더듬 배운 정도로는 성서를 읽을 만큼의 교양을 쌓는 것도 무리였다. 그녀는 마을 청년들이 사 온 서책 가운데 그림이 많고 글자가 큼직한, 동화책을 주로 보며 마을 밖 세상에 대한 꿈을 키웠다.
종이에 그려진 삽화의 수가 점점 줄어들고 글씨가 작아지고, 제법 두꺼워진 서책도 읽을 수 있게 될 무렵에는, 그녀는 마을의 누구도 믿지 않는 허황된 소리를 늘어놓으며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너희들. 초야권이 뭔지 아니?」
영지민이 결혼식을 올릴 때 영주가 먼저 신부를 취할 수 있는 권한. 실제로 초야권은 사장된 지 오래된 문화이며, 존재할 당시에도 세금을 걷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 단어 그대로의 의미로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을 모르는 알렉세이의 어머니는, 이 마을도 분명 어느 귀족의 영지일 테니 초야권을 행사할 거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그저 이 마을이 너무 멀고 보잘것없어 관원이 방문하지 않을 뿐, 오가기 쉬운 곳에 위치했더라면 응당 영주님이 사람을 보내 마을 처녀를 데려갈 것이다. 그녀는 늘 그렇게 주장했다.
「영주님이 초야권을 행사하면, 난 영주님의 아이를 가질 수도 있어. 그러면 그 아이는 귀족의 피를 이어받는 거라고!」
허무맹랑한 소리였으나 그녀의 말에 반박하는 사람은 없었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무작정 밀어붙이는 그녀의 행동력에 기가 질린 까닭도 있지만, 무엇보다 산 아래 도시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너희는 도시에 가 봤으니까 알지? 영주님의 성은 어디에 있어?」
「시장은 다녀봤지만, 성은 글쎄…….」
「성문을 나설 때 멀리 높은 탑이 보였잖아. 그게 영주님의 성 아닐까?」
대부분의 마을 청년들은 이 마을이 어느 귀족의 영지인지 관심이 없었고, 어차피 마주할 일이 없는 귀족을 굳이 보러 성 근처를 어슬렁거릴 이유도 없었으므로 적당히 얼버무리고는 했다.
그러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꿈을 키운 그녀는, 어느 날 그 꿈을 실행에 옮기기로 작정하고 마을을 탈출했다.
힘 좋은 청년들도 무리를 지어 내려가지 않으면 산 아래 도시까지 온전히 오가기 힘들었다. 그녀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은 마을 청년들은 횃불을 들고 마을 주변의 숲을 탐색했지만, 그녀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일주일이 지났을 때 수색은 종료되었다.
그녀가 더 이상 살아있을 거라고 기대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내려가는 길도 모르면서, 산속에서 헤매다가 발을 헛디뎌 절벽에서 떨어지거나 늪에 빠지거나, 맹수의 먹잇감이 되지 않았을까. 의지할 가족조차 없었던 그녀를 위해 마을 사람들은 빈 관을 마련하여 장례를 치렀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고, 어느새 마을을 들쑤시고 다니던 꿈 많은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아무도 입에 올리지 않게 되었을 즈음, 그녀가 다시 나타났다.
서서히 불러 오기 시작한 배를 드러낸 채로.
「나, 영주님의 아이를 가졌어. 귀족의 아이가 태어날 거야.」
혼자서 산 아래 마을까지 어떻게 내려갔는지를 물어볼 때가 아니었다.
결혼할 남자도 없는데 어떻게 영주를 구슬려 하룻밤을 치렀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영주를 만나 하룻밤을 함께 했으며, 성에서 나오고도 마을 여관을 전전하다가 임신한 것을 확신했을 때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주장했다.
「아이가 태어나면, 영주님께 데려갈 거야. 그럼 나는 귀족의 아내가 되어 도시에서 살 수 있어!」
그녀를 임신시킨 것이 과연 귀족일지는 차치하더라도, 태어나 봤자 사생아인 아이를 인정할 리가 없었다.
만에 하나 사생아를 인정하여 양자로 들인다고 한들 그녀를 아내로 맞이할 리도 없다는 것을 마을 사람들은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장정들도 엄두를 내기 어려운 산 아래까지 혼자 다녀온 데다, 아이까지 가진 그녀가 광적으로 믿는 바를 정면에서 반박할 만큼 그들은 무정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의 침묵과 온정 속에서 그녀는 무사히 아이를 출산했다.
남자아이였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낳은 아이를 영주에게 데려갈 수가 없었다.
태어난 아이는 그녀와 관계를 가진 귀족이 아니라, 그녀를 쏙 빼닮았기 때문이었다.
「머리 색도, 눈 색도 나랑 똑같아…… 이래서야 믿지 않을 거라고!」
그녀는 절망했다. 태어난 아이를 돌보지 않고 방치했다. 아이가 죽을까 걱정했던 마을의 다른 여인들이 대신 젖을 먹여 키울 동안 그녀는 자포자기한 듯 아무 남자하고나 잠자리를 보냈다. 그 와중에 또 아이를 배었다.
둘째도 남자아이였다.
첫째와는 달리 생김새는 어머니를 닮지 않았지만, 검은 머리와 붉은 눈동자는 제 어미를 쏙 빼닮았다.
「아니야. 이게 아니란 말이야…….」
「어머니.」
절망하던 그녀의 시야에 제 어린 아들이 들어왔다. 겨우 두 살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알렉세이는 말문이 빨리 튼 데다 묘하게 어른스러웠다.
그녀는 알렉세이가 귀족의 피를 이었기 때문에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다며, 언제고 알렉세이의 비상함을 알아본 영주님이 그를 아들로 인정할 거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나자에프에 이어 바르셀다가 태어났음에도, 세 형제의 어머니는 첫째 아들만을 예뻐했다. 그의 외모가 자신을 쏙 빼닮아서인지, 아니면 정말로 알렉세이가 귀족의 피를 이어 자신을 이 마을에서 데리고 나가 줄 어떤 구원자로 인식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머니는 알렉세이에게 광적으로 의지했다.
얌전하고 조용한 알렉세이는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머리가 비상한 그는 글을 빨리 익혔고, 태도도 진중하며 자세도 반듯했다. 늘 귀족다운 몸가짐을 해야 한다고 어머니가 강조했던 탓일까, 알렉세이는 말도 없고 사람을 마주하는 것도 싫어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을 어려워하지 않았다.
「이 마을에서 귀족은 알렉세이, 너뿐이란다. 다른 녀석들은 전부 평민이거든.」
그림도 없고 글씨도 깨알 같은 서책도 술술 읽을 수 있게 된 알렉세이는 타인과 교류하는 대신 공부를 계속했다. 어머니는 그를 위해 자신은 읽을 수도 없는 서책을 사와 달라고 마을 청년들에게 부탁해 그만을 위한 서재를 꾸려 주었다.
「귀족들은 다들 서재를 가지고 있어. 이곳에 귀한 책을 모셔 두는 거란다.」
「어머니는 귀족의 서재를 본 적이 있으십니까?」
「본 적은 없지만, 책으로는 읽었거든.」
그녀가 알렉세이에게 어떤 것을 기대하고, 어떤 꿈을 꾸고 있는지 알렉세이는 모르지 않았다.
알렉세이는 제 어머니가 바라고 기대한 그대로, 귀족처럼 반듯한 청년으로 자라났다.
동생이지만 망나니로 악명이 자자한 나자예프와는 거의 얼굴조차 보는 일이 없었다.
비교적 순하고 사람을 잘 따르는 바르셀다는 알렉세이에게 몇 번 말을 걸었지만, 그때마다 알렉세이는 꼭 벌레를 보는 듯한 께름칙한 시선으로 바르셀다를 내려다보았다.
동생의 손 한번 잡지 않고, 머리 한번 쓰다듬어주지 않는 큰형에 대한 기대를 버린 바르셀다는 어느새 병들어 자리에 몸져누운 어머니를 찾아갔다.
「어머니. 저 왔어요.」
「알렉세이는……?」
「형은 서재에 있어요. 어머니를 보러 같이 오자고 했는데…… 거절했어요.」
「큰일 날 소리를 하는구나, 바르셀다! 알렉세이에게 병이 옮으면 어쩌려고 그러니?」
병상에 몸져누웠음에도 세 형제의 어머니는 첫째 아들만을 걱정했다.
아직 어렸던 바르셀다는 그것이 야속하면서도, 어머니가 주는 차별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알지 못하고 그저 속으로만 분을 삭였다.
어머니가 죽는 순간까지 알렉세이는 병문안을 오지 않았다.
세 형제에게는 아버지가 없는 까닭에 장례식에는 참석했지만, 그뿐이었다.
알렉세이는 어머니의 무덤에 흙을 끼얹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재로 돌아갔다.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도 무덤덤한 알렉세이를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물론이고, 어린아이였던 바르셀다마저 그렇게 생각했다.
올가가 누군지도 모르는 남자의 아이를 가졌다는 소리에, 알렉세이가 서재를 뒤엎기 전까지는.
늪 속의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