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 속의 불-116화 (116/189)

117화

“어……?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 집이라니?

나자예프는 제가 잘못 들었나 싶어 재차 물었다. 사비나는 여전히 그와는 시선을 마주하지 않고, 오두막의 잔해조차 남지 않은 풀밭 위를 거닐었다.

바람도 불지 않는데 진흙과 피가 엉겨 붙은 옷자락이 나부꼈다. 그녀의 흰 손가락이 마치 그림을 그리듯 허공을 가로질렀다.

“기억이 나요. 여기서 문을 열고 나오면 바로 저 나무가 보여서…… 여름에는 매미가 울고.”

“사비나.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언덕에서 굴러떨어지는 바람에 머리를 다치기라도 했나?”

나자예프가 사비나의 눈앞에서 손을 휘저어보자, 그녀가 겨우 고개를 돌려 나자예프와 눈을 마주했다.

그녀의 새까만 눈동자에 제 모습이 비치자 나자예프는 움찔 놀라 한 걸음 물러섰다.

“사비나. 너…….”

“마을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아요. 하지만 우리 집 앞마당은 확실히 기억이 나요. 여기서 놀고 있다가 엄마가 부르면 집으로 돌아갔거든요.”

“너, 귀족이 아니었어? 콘바야젠 백작가에 있었다면서…….”

“여덟 살 때, 우리 집이 불탔어요. 그리고 이상한 사람들이 나를 데려가서…….”

사비나는 자신의 어린 시절이 어땠는지 잘 기억해 내지 못했다.

하지만 마을이 불타고 괴한들의 손에 이끌려 짐처럼 끌려왔던 것만은, 그때까지 그녀가 경험했던 일 가운데 가장 충격적인 일이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떠올리려니 풍경도, 사람들의 모습도 흐릿할 뿐 구체적으로 연상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이곳은 기억이 나.’

사비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무와 숲으로 둘러싸인 가운데 풀이 자라지 않은 길이 있었다.

정확히는, 길이 아닌 곳에 억지로 나무와 풀을 베어 지나가느라 밑동만 남은 나무 위에 가느다란 가지가 몇 줄기 자라난 것이 보였다.

아마도 15년 전에 잘려나간 이후, 저주받은 토대 위에서 좀처럼 자라지 못하다가 간신히 싹을 틔운 것이리라.

“아마 이쪽 길일 거예요. 그 사람들이 나를 끌고 가는 바람에 엄마랑 떨어졌거든요.”

사비나는 잘 떠오르지 않는 기억을 애써 되새기기 위해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손바닥 위에 네모난 형체와 동그라미 두 개를 그렸다.

마차의 생김새였다.

“이렇게 생긴 마차를 타고, 처음 보는 호화로운 저택에 갔는데…… 거기서 아버지를 만났어요. 나를 딸이라고 부르면서…….”

“뭐? 사비나. 지금 아버지라고 했어?”

반쯤 무너진 돌더미를 들쑤시는 것처럼 불완전한 기억을 되짚어 가느라 그만 아버지의 조언을 깜박했다. 사비나는 아차 싶어 입을 가렸다가, 여기까지 온 마당에 숨겨봐야 의미가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냥 털어놓기로 했다.

“콘바야젠 백작은…… 내 아버지예요.”

사비나의 말을 들은 나자예프이 안색이 창백해졌다가, 파랗게 질렸다가, 그다음에는 흙빛이 되었다. 그의 표정이 이상하게 일그러지더니, 눈가를 비비다가 도로 고개를 털었다.

“아니, 잠깐. 잠깐만. 그러니까 지금, 사비나가 우리 마을 출신이었다는 거야?”

“이곳도 원래 마을이었다면서요.”

“그리고 그…… 콘바야젠 백작의 딸이고?”

“아버지가 나를 그렇게 불렀어요. 데려오는 게 늦었다면서…….”

턱에서 힘이 빠진 듯 나자예프의 입이 벌어지더니, 다물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왜 놀라요? 나자예프.”

“……어? 어어?”

“제 아버지인 콘바야젠 백작이, 당신 형일 수도 있다고 말한 건 나자예프였잖아요.”

“아니, 그렇지만! 그렇지만 사비나가 딸인 줄은 몰랐지! 그건 말이 안 되니까!”

“왜 말이 안 되는데요?”

“네가 알렉세이 형의 딸일 리가 없잖아!”

제 형인 알렉세이가 콘바야젠 백작일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하면서도, 나자예프는 사비나가 그의 딸일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하나도, 하나도 안 닮았어. 검은 머리 말고는, 정말로…….”

“어머니가 그랬어요. 내 머리카락은 아버지한테 물려받은 거라고.”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 흔한 것이 당연한 그 색을 어머니는 마치 세상에 아버지와 사비나 단둘만이 소유한 것인 양 강조해서 알려 주고는 했다.

“나자예프가 그랬잖아요. 내가…… 올가라는 사람을 닮았다고.”

어머니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얼굴도, 솔직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머니의 따스한 체온과 포근한 품은 기억이 나는데, 모습은 흐릿해서 기억이 나지 않았다.

군인들에 의해 피범벅이 된 끔찍한 모습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기 위해 일부러 잊어버린 것인지는 몰라도.

“아니, 그럼…… 그 소문이 사실이었다는 거야?”

나자예프는 믿을 수가 없었다.

올가가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고서도, 아이의 아버지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는 것을 다들 이상하게 여겼다. 하지만 캐묻지는 못했다. 산 아래에서는 이 마을의 존재를 아는 사람도 거의 없으니 외부인은 아닐 거라는 게 지배적인 의견이었다. 당연히 용의자는 마을 내의 청년들로 좁혀졌다.

하지만 오딜이 아무리 들쑤시며 협박을 해도 올가를 그렇게 만든 게 자신이라는 남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마을의 성인 남자를 전부 뒤집어 탈탈 털었는데도 꼬리가 잡히지 않자, 복장이 터져 미쳐가는 오딜과는 별개로 나자예프도 궁금해졌다.

대체 어떤 남자가 올가와 정을 통했을까.

강간당해 아이를 밴 거라면 상대 남자를 내버려 둘 리가 없고, 사랑해서 관계를 가진 거라도 결혼하지 않을 리가 없다. 이런 작은 마을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당시 겨우 15살이었던 나자예프도 그것을 알고 이상하게 여겼으니, 다른 마을 사람들도 궁금하게 여기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그때 아주 잠깐이지만, 제 형의 이름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적이 있었다.

“아냐. 그럴 리가 없어. 형이 올가를? 말도 안 돼. 다들 불가능한 일이라고 그랬는데.”

“왜 불가능한 일인데요?”

“그때 형은 열일곱이었단 말이야.”

“그렇게 어린 나이는 아니죠.”

“게다가 올가하고는 거의 말도 나눠 본 적 없는데…….”

“좋아했다면서요?”

사비나의 지적에 나자예프이 얼굴이 구겨졌다. 정곡을 찔린 자의 반응이라기엔 도리어 찜찜했다. 나자에프는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이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언덕에서 굴러떨어졌을 때부터 단정함과는 거리가 멀었던 검은 머리카락이 마구잡이로 헝클어졌다. 마치 그의 속마음을 대변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래. 형이 올가를 좋아했어. 그건 맞아. 나도 그렇고, 바르셀다까지…… 우리 형제는 취향이 똑같았으니까.”

“그런데 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어요?”

“형이 그런 짓을 했으면, 올가를 그냥 놔뒀을 리가 없으니까!”

늘 조용하고 얌전해 눈에 띄지 않아 별로 주의 깊게 보는 사람이 없었지만, 형제였던 나자예프는 알고 있었다. 알렉세이는 소유욕과 독점욕이 엄청난 인간이었다. 만약 올가가 자신의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와의 관계를 인정받으려 했을 것이다.

“강제로…… 그랬으면, 당연히 올가가 말을 했을 테니까.”

알렉세이가 올가를 좋아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나, 올가는 음침한 알렉세이를 꺼려 했다. 대놓고 들이대는 나자예프처럼 정색하며 뿌리치지는 않았으나, 수확철에 알렉세이가 함께 나와 일을 도울 적에는 갑자기 고해성사를 해야겠다며 교회로 피신할 정도였다.

올가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나자예프도 올가를 좋아했기에 알 수 있었다.

“적어도 이쪽…… 나나 형을 돌아볼 리 없다고 확신했어.”

만약 관계를 가졌다면 분명 강제적인 행위였을 터인데, 올가는 상대 남자를 감쌌다.

그래서 올가가 남자의 정체를 숨긴 시점에서 알렉세이는 용의자 선상에서 제외되었다.

“싫어서 감췄을 수도 있잖아요? 결혼하고 싶지 않아서.”

“가능성이 한 톨만큼이라도 있었으면, 형이 억지로 올가를 데려왔을걸.”

올가의 임신 소식을 접한 이후, 알렉세이가 서재를 엉망으로 만들었던 것을 기억한다. 나자예프는 제 형이 실연당해 정신이 나갔나 싶어 크게 염두에 두지 않았지만, 막냇동생인 바르셀다는 그 일로 꽤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형이었다면, 도망치는 올가를 붙잡아서라도 진실을 밝혔을 텐데.’

왜 밝히지 않았을까.

그리고 15년 전 마을이 불타고 사람들이 죽어가던 그때, 왜 올가를 구하지 않았을까.

형제간에 소원한 데다 별로 친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집에 사는데 아는 것이 하나도 없지는 않았다.

알렉세이는 <자신의 것>만큼은 끔찍하게 아끼는 성격이었다.

그가 올가를 자신의 것이라고 여겼다면, 그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인 사비나도 자신의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올가를 구하지 않았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거니와, 제 딸을 이 저주받은 마을에 보낼 리도 없다.

“아니야. 형은 아니야…… 사비나. 네 아버지라는 사람 말이야. 내 형과는 다른 사람일 거야.”

“그렇게 단정 짓다가 뒤통수를 거하게 맞아놓고서,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모양이로군요?”

어디선가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나자예프와 사비나가 동시에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았다.

잘려 나간 나무 밑동에서 간신히 도로 싹을 틔운 나뭇가지가 꺾여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사뿐히 올라선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피처럼 붉은 머리카락에, 황금색 눈동자.

이 마을에 온 뒤로, 아무도 만나지 못했으나 오직 사비나만이 마주했던 저주의 화신.

아페티트가 그곳에 서 있었다.

늪 속의 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