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 속의 불-115화 (115/189)

116화

“아윽!”

나자예프는 사비나를 보호하려 한 모양이지만, 도중에 부딪혀 팔에서 힘이 빠진 까닭에 사비나는 튕겨져 나가듯 떨어졌다. 시야가 회전하고, 머리와 등 뒤에 둔중한 충격이 가해졌다. 새까만 잎사귀 사이로 보이는 흐린 하늘이 빙글빙글 돌아갔다. 허억, 사비나는 크게 숨을 토해 내고는 나자예프를 찾았다.

“나자예프, 나자…… 읏.”

이름을 불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찾으려다 보니 반사적으로 이름부터 부르게 되어, 사비나는 혀를 깨물었다. 눈물이 찔끔 나올 만큼 따끔한 감각이 흐르고, 눈을 몇 번 깜박이자 어질어질하던 시야가 조금씩 정리되기 시작했다.

“사비나, 괜찮아? 정신 차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나자예프의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가 멀쩡한 것으로 보아 크게 다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사비나와 나자예프가 떨어진 곳은 거무튀튀한 반원형의 흙더미가 가득하고, 그 위로 잡초가 무성하게 자란 이상한 곳이었다. 사비나는 감각이 둔한 왼팔 대신 오른팔로 땅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어디…… 어디 있어요?”

“사비나. 나는 여기야!”

아래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숙여 아래를 보니, 사비나가 떨어진 흙더미와 바로 옆의 흙더미 사이에 끼어버린 나자예프의 모습이 보였다.

“너무 늘씬한 것도 이럴 때는 안 좋다니까. 하필이면 여기 딱 끼어 버릴 게 뭐람. 후우. 남자는 흉통이 두꺼워야 매력이 있다는데…… 사비나는 마른 남자는 싫어해? 근육을 키우는 게 좋을까?”

“그만 말하고 이쪽으로 빠져나오세요. 사람들이 찾아오면 금방 들킬 거예요.”

“으음? 그야 그렇겠지만, 이쪽으로는 안 올걸.”

“네? 왜요?”

“여긴 공동묘지거든.”

공동묘지?

그러고 보니 사비나가 앉아있는 흙더미를 비롯해서, 여기저기 산개해 있는 반원형의 흙더미는 무덤의 형태와 비슷했다. 비석 같은 것은 없지만, 설마 15년 전에 죽은 마을 사람들의 시신을 묻은 곳일까.

사비나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하하. 사비나도 유령이 무서운가 봐? 공동묘지 이야기를 하니까 바로 안색이 변하네.”

“묘지…… 무덤이면, 이러고 있으면 안 되잖아요!”

“괜찮아. 해도 떴으니까 유령은 안 나올걸. 나와 봤자 사람보다는 안 무섭겠지만.”

나자예프는 대수롭지 않게 지껄이며 사비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사비나는 그의 손을 잡고 일으켜 줄 수가 없었다. 흙더미 위에 앉아 있던 몸을 뒤로 밀어 비껴서서 고개를 가로젓는 사비나의 얼굴을 보고, 나자예프는 쓴웃음을 지었다.

“쌓은 건 힘들어도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라더니만. 이미지 회복 한번 하기 되게 어렵네.”

애초에 쌓은 이미지라는 게 있었는지도 불분명하지만, 사비나가 딱히 지적을 하지 않은 까닭에 나자예프는 혼자서 결론을 내린 듯 후우, 숨을 내쉬더니 흙더미에 푹, 손끝을 박아넣었다. 그러고는 악력으로 몸을 일으켰다.

“어휴. 머리만 망가진 게 아니라 옷도 엉망이네.”

“괜찮아요?”

“보기 좀 그렇지? 모처럼 사비나랑 데이트하는 거라 제일 잘 어울리는 옷으로 입고 나왔는데. 오늘은 날이 아닌가 봐.”

“그게 아니라, 당신 어깨가…….”

“음. 그러게. 부러졌나? 많이 아프지는 않은 걸 보니까 부러진 건 아니고 뼈가 빠졌나 본데.”

나자예프의 오른쪽 어깨가 기이하게 꺾여 있었다. 떨어지면서 팔이 빠진 모양이라기엔 심하게 주저앉은 형태가 이상했으나 통증이 별로 없는 것이 어디냐 싶어 나자예프는 두 다리로 일어섰다.

“다행히 다리는 멀쩡하네. 사비나가 묘지를 무서워하니 일단 여기를 벗어나야겠다. 가자, 사비나.”

나자예프가 손을 뻗었으나, 사비나는 그의 손을 잡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나자예프의 손을 거절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비나의 눈이 커지더니, 그녀가 창백한 얼굴로 다가와 나자예프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흙투성이가 된 옷자락은 사비나가 움켜쥔 것만으로 소매가 뚝 떨어져 나갔다.

“헉, 사비나! 여기서 하려고? 너무 성급하지 않아? 나야 좋지만!”

“당신, 팔이……!”

“응? 팔이 뭐? 괜찮아. 팔 하나쯤 못 쓰는 상태로도 할 방법은 많으니까.”

“농담 그만하고 당신 팔을 보라고요!”

농담이 아니었지만, 사비나가 울상을 지으며 소리치는 바람에 나자예프는 눈을 굴려 제 오른팔을 내려다보았다.

소매가 뜯겨나가고 드러난 팔에는 꼭 곰팡이가 핀 것처럼 검붉은 멍이 가득했다.

“헉…… 멍이 들었나? 별로 안 아팠는데. 이상하다.”

“어떻게 해…… 나 때문에…….”

“에이, 뭘 이런 걸 가지고 그래? 영광의 훈장인 셈 치지 뭐. 에르잔도 등짝이 다 벗겨졌는데.”

나자예프는 어떻게든 사비나를 달래기 위해 아무 말이나 뱉어 내고 있었으나 그녀의 표정은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팔에 상처를 입고 탑의 지하에서 뛰쳐나올 때까지만 하더라도 결연했던 검은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리더니, 이내 투명한 눈물을 또륵또륵 떨구기 시작했다.

“사비나! 울지 마, 나 괜찮아!”

“괜찮지 않아요!”

사비나는 울먹이며 뒤로 물러나다가, 발을 헛디뎌 나무에 등을 부딪히고 주저앉았다. 나자예프가 다가와 일으켜 주려 하자, 사비나는 비명을 지르며 거부했다.

“손대지 마세요!”

“아니, 나는 그냥 일으켜 주려고……!”

“나한테 닿으면 당신은 죽어요!”

협박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필사적으로 외치를 사비나의 표정에 깃든 감정이 거부나 혐오가 아니라 걱정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나자예프는 움직이지 않는 제 팔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검붉은 반점이 박힌 모양새가 징그러웠는데, 지금은 오른팔 전체가 검붉은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나자…… 제발, 나한테서 떨어져요. 이제 당신은 나를 감당할 수 없단 말이에요…….”

사비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커다란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나자예프는 그제야 사비나가 한 말의 뜻을 이해했다. 그녀가 오딜의 손바닥에 구멍을 낸 것처럼, 나자예프의 오른팔을 망가뜨린 것이다.

“미안해요. 당신이랑 떨어져서 도망쳐야 했는데…….”

“구멍을 내도 좋다고 말했더니만, 팔을 까맣게 물들여 놨네. 사비나 머리색이랑 비슷해.”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잖아. 그만 울어.”

한쪽 팔을 완전히 못 쓰게 되었음에도 나자예프의 목소리는 태연했다.

네나뷔스테를 상대할 때만 하더라도 칼에 베일까 봐 온갖 난동을 부리던 나자예프가 아니었다. 바르셀다의 저주를 흡수하러 갈 때, 이가 딱딱 부딪히는 소리가 나는 것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두려움에 떨던 나자예프가 아니었다.

제가 죽을까 봐 두려워하던 마을 제일의 겁쟁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자상한 얼굴로 사비나 앞에 서 있었다.

“등이라도 토닥여 주고 싶은데, 그러면 네가 싫어하겠지?”

“나, 나한테 닿으면 안 돼요…….”

“그러게. 팔 하나 남았는데 이것까지 못 쓰게 되면 곤란하지. 그럼 이거라도 붙잡아”

나자예프는 허리를 조이던 로브의 끈을 풀더니 사비나를 향해 내밀었다. 사비나가 물기 가득한 눈으로 올려다보자, 나자예프가 그것을 한 번 더 흔들었다.

“붙잡아, 사비나. 여기는 길이 나빠서 헛디뎌서 굴러떨어지기라도 하면 찾기 힘들거든.”

“…….”

“팔 하나로는 아직도 신뢰 회복까지 멀었나?”

어딘가 모르게 불길한 감정을 담고 있던 평소의 미소와는 달랐다. 저주에서 벗어났기 때문일까? 씩 웃는 얼굴에는 정말로 한 점 그늘이 없었다.

“미안해요…….”

“사과는 그만해. 네가 자꾸 사과하면 내가 할 말이 없어지잖아.”

“……네.”

고개를 끄덕인 사비나는 나자예프가 내민 줄의 끝을 살며시 부여잡았다. 그러자 나자예프는 반대쪽 끝을 손목에 감고 앞장서서 무덤 사이를 거닐었다.

“북쪽은 생존자가 많다고 들었는데…….”

“다 죽고 남은 게 저만큼이지. 하필이면 제일 무서운 사람들만 남았다니까.”

묘비도 없이 그저 흙더미만 쌓아 놓은 무덤의 수는 족히 서른 개는 될 듯했다. 연못에 빠져 죽은 사람과 우물에 빠져 죽은 사람들 외에, 이 북쪽 마을에서도 희생자가 나왔던 걸까. 크고 작은 무덤이 겨우 사람 하나 빠져나갈 간격으로 늘어서 있는 것을 보고 사비나는 아연해졌다.

“공동묘지라 함부로 들이닥치지는 않을 테지만, 거슬러 올라갔다가는 또 맞닥뜨릴 테니까. 돌아서 나갈 수밖에 없겠어.”

“숲을 빠져나가는 건가요?”

“아니. 이쪽도 원래 우리 마을이었거든.”

나자예프가 마지막 무덤과 수풀 사이를 헤치고 빠져나왔다.

그곳에는 공터가 있었다.

아니, 공터가 아니다. 버려진 지 오래되어 황폐해진 곳이지만, 사비나는 이곳이 어딘지 알 수 있었다.

“여기에…… 여기에도, 사람이 살았군요.”

“응. 이쪽에 있던 사람들은 다 죽었어. 올가도 여기 살고 있었는데…….”

버려진 땅에는 죽음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추억을 더듬듯 중얼거리며 걸어가던 나자예프는 뒤에서 팽, 줄이 당겨지는 감각에 뒤를 돌아보았다. 사비나가 멍하니 서 있었다.

“사비나. 왜 그래?”

“……기억이 나요.”

시간이 흘러 풍경이 달라졌어도, 자신이 머물던 장소를 알아보지 못할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그녀가 유일하게 기억하던 <어린 시절>이기에 더욱 명확히 알아볼 수 있었다.

“여기에 집이 있었어요.”

“그래. 원래 사람들이 살던 곳이라고…….”

“담장 대신 울타리가 여기에 처져 있고, 여기에 꽃이 심겨 있었는데…….”

어린 시절의 사비나가 유일하게 기억하는 풍경.

제집과 앞마당이 세상의 전부였기에,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는 풍경.

“여기에, 우리 집이 있었어요.”

늪 속의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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