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 속의 불-114화 (114/189)

115화

저주의 핵을 흡수했다.

페고라에게 깃들어 있던 <체념의 핵>이 이 마을의 저주를 이루던 마지막 파편이었다.

저주의 핵을 사비나에게 넘겨주었으니 페고라의 눈에도 생명의 빛이 돌아와야 하는데, 어째서인지 그 눈은 맹수의 것처럼 흉흉하게 빛났다.

눈을 깜박였다간 눈꺼풀을 칼날에 베일 것 같아, 사비나는 눈조차 깜박이지 못하고 물었다.

“나를…… 알고 있었나요?”

“아니. 만난 건 오늘이 처음이지. 그런데도 보니까 알겠더구나.”

페고라가 입술을 비뚜름하게 올리며 웃었다. 만들어진 것 같은 미소였으나 눈빛은 싸늘했다. 그 시선을 마주한 사비나는 문득 저주의 핵을 품고 있던 나머지 세 사람을 떠올렸다.

뱀 모양으로 실체화한 저주로 사비나를 상처 입히고는, 그 피를 탐하려다가 괴로워한 바르셀다.

우물에서 나온 사비나를 마주하고 새파랗게 질려서 덜덜 떨던 네나뷔스테.

숲속에서부터 사비나를 유인하여, 반려라고 부르며 끌어당기던 아페티트.

저주의 핵을 품고 있던 사람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비나를 알아보았다.

“네가 <죽음>이라는 것을 말이야.”

흠칫, 사비나의 어깨가 떨렸다. 굳은 표정만으로 의심하던 것이 사실임을 알아차린 페고라가 칼을 휘둘러, 사비나의 머리카락 끝을 조금 잘라 냈다. 바닥에 푹 박힌 칼날을 경계로 잘려나간 머리카락을 집어 든 페고라는 미간을 찌푸렸다.

“머리카락이 이렇게 가느다란데도 닿은 부위가 따끔따끔하네. 금방이라도 베일 것 같아.”

“만지지 마세요. 위험하니까…….”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 왜 이곳에 왔을까?”

의문형이었으나 사비나에게 질문하는 것은 아니었다. 페고라는 스스로 답을 내린 듯 집고 있던 사비나의 머리카락을 땅에 떨어뜨렸다.

“아니. 어떻게 올 수 있었을까?”

시간이 멈춘 저주받은 마을. 마을의 구성원은 누구 하나 이 마을을 빠져나가지 못한다. 외부인인 로스카옌조차 세월의 흐름을 맞을 뿐 마을 밖으로 빠져나갈 수는 없었다.

누구도 나갈 수 없다는 것은 곧, 누구도 들어올 수 없다는 것.

‘그런데 눈앞에 쓰러진, 이 여자는 어떻게 마을에 들어올 수 있었을까?’

산 아래에 사는 사람들은 이 마을의 존재조차도 모르는데.

안다고 한들 이 울창한 숲에 뒤덮인 마을을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터인데.

로스카옌 사제는 <손님이 방문하기로 했다>며 고했을 뿐 다른 설명은 하지 않았다.

체념의 핵을 품고 있던 당시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했다. 페고라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대로 흘러가게 내버려 두었다. 움직이고 싶지도 않았고, 알고 싶지도 않았으며, 간섭하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그런데 체념의 핵을 벗어던지고 나니 비로소 의문이 떠올랐다.

“대답하렴. 너를 우리 마을로 보낸 게 누구지?”

페고라는 체념의 저주에 짓눌려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사비나를 내려다보며 눈을 가늘게 했다.

“우리 마을 사람들을 죽여서 만든 <저주>로, 너를 죽음의 화신으로 만든 게 누구냐고 묻고 있지 않니.”

“……네?”

“거짓말할 생각은 하지 말렴. 저주의 핵을 품고 있었으니까 알 수 있단다. 내가 지니고 있던 저주의 핵과 너를 이루고 있는 저주의 주술이 상당히 닮았다는 걸 말이야.”

사비나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녀는 이제까지 저주가 깃든 인간을 만난 적이 없었다. 기실 저주에 당하고도 살아남은 사람은 이 마을에 와서 처음 보았다. 자신 이외의 저주받은 인간을 본 적이 없기에 사비나는 상대가 평범한 사람인지, 저주를 품고 있는 사람인지는 구분할 수 있어도, 그 사람이 품고 있는 저주가 자신의 것과 닮았는지 아닌지는 판별할 수 없었다.

그런데 페고라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사비나를 내려다보며 손을 까딱했다.

“너를 이곳에 보낸 사람은, 우리 마을을 이 꼴로 만든 사람이란다.”

확신에 가득 찬 음성과 함께, 쓰러져 있던 사비나를 향해 다시 한번 발길질이 이어졌다. 사비나는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입술을 짓씹었다. 무심코 페고라의 이름을 불렀다간 그가 병에 걸릴 테고, 비명이라도 질렀다가는 지상에 있는 나자예프나 카림이 걱정하여 내려올지도 모른다.

체념의 핵을 흡수해 몸이 무거운 상태라는 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감각이 둔해졌기 때문인지, 페고라가 걷어차는 것은 그리 아프지 않았다.

“왜 대답을 안 하지?”

“……나는, 몰라요……!”

“정말로 모른다면 말할 수 있는 건 뭐라도 전부 토해 내는 법이지.”

사비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도 좋을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만약 콘바야젠 백작의 이름을 말한다면, 페고라도 그를 이 마을에 있던 알렉세이와 동일시할까.

“15년 동안 체념하여 시체처럼 있었다고 해서, 지금도 날 송장으로 여기지는 말았으면 하는구나.”

페고라가 휘두른 칼날이 사비나의 왼팔을 스쳤다. 감각이 둔한 와중에도 소름 끼치는 통증이 팔에서부터 목을 지나 머리끝까지 관통했다. 사비나는 몸을 굴려 벽에 몸을 바싹 붙이고는, 두 다리에 힘을 주어 일어났다. 다친 팔에서 피가 튀지 않도록 오른손으로 상처 부위를 억누르자, 둔했던 팔에 감각이 돌아오면서 쓰라린 감각이 불꽃처럼 피어올랐다.

“나한테 상처를 입히면 당신은 또 저주에 걸릴 거예요.”

“주술사의 예언인가?”

“아뇨. 경고예요.”

사비나는 숨을 몰아쉬며 왼손에 힘을 주어 주먹을 쥐었다. 다친 부위에 힘을 가하면 상처가 벌어지며 피가 흐르는 것이 당연하지만, 저주는 더욱 강한 저주에 이끌리는 법. 사비나가 살기를 품으면, 그녀의 피는 밖으로 흐르는 일 없이, 가장 짙은 저주를 향해 거슬러 올라간다.

“나한테 다가오지 마세요.”

“대답도 하지 않고 명령부터 하는구나.”

“바닥을 보면 그런 말이 안 나올걸요?”

페고라의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가, 놀란 듯 입이 벌어졌다. 사비나가 딛고 있는 바닥이 거뭇거뭇하게 물들더니, 마치 늪처럼 꿀렁거리기 시작했다.

흙이든, 돌이든, 생명이 깃든 거라면 무엇이든 다 죽일 수 있다. 나무를 베어 만든 널빤지라도 사비나의 피에 닿으면 순식간에 부식되어 바스러졌다. 사람이라면 몰라도 흙이나 물건에 깃든 생명력은 강하지 않기에 사비나가 손대도 급속도로 닳거나 사라지는 일은 없었지만, 지금처럼 의도적으로 살기를 내뿜을 때는 예외가 된다.

“뭘 하려는 거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요, 나는.”

말도 안 되는 현상을 목도한 페고라가 당황하여 굳어 버린 틈을 타, 사비나가 계단을 향해 뛰었다. 감각은 되돌아왔으나 몸이 무거워 뛰는 것이 힘들었다. 아래서 페고라가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사비나가 밟은 돌이 부식된 탓에 페고라는 벽을 짚고 경사를 따라 올라와야 했다. 거리가 벌어진 틈을 타, 사비나는 재빨리 지상의 입구로 향했다.

“사비나? 안 그래도 카림이 휙 가 버리길래 너는 언제 나오나 하고…… 헉! 어디 다쳤어? 팔이 왜 그래?”

“나자예…… 읍!”

지하의 탑에서 뛰어 올라온 사비나의 행색을 보고 놀란 나자예프가 다가오려 하자, 사비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뒤로 물러났다.

“나한테 손대지 마세요!”

“아니, 이상한 짓 하려던 거 아니거든? 나는 사비나, 너를 걱정해서……!”

“그게 아니라, 나한테 닿으면 안 돼요!”

나자예프는 시간이 멈춰 있을 때조차도 사비나가 이름을 부르면 그대로 타격을 받았다. 네 개의 핵을 모두 흡수해 시간의 흐름이 원래대로 돌아온 상태라면 그녀에게 닿는 순간 더욱 크게 해를 입을 것이다.

“핵은, 흡수했어요. 이제 돌아가야 해요…….”

“응? 벌써? 그런데 상처는 왜…… 페고라는 어쩌고 있어?”

“미안해요. 좀 막아 주세요!”

“사비나? 뭘 막으라는 거야?”

“거기 서!”

계단이 무너진 까닭에 거의 네 발로 기어 올라오느라 흙투성이가 된 페고라가 불쑥 튀어나오자, 나자예프는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기겁하며 뒤로 나동그라졌다.

“으아악! 깜짝이야!”

“읏……!”

시각은 아직 새벽이었다. 울창한 숲과 흐린 하늘 탓에 햇빛이 그리 상한 것도 아닌데, 내내 지하에 있다가 갑자기 지상으로 나온 페고라에게는 그마저도 눈부셨다. 페고라는 시야를 가득히 채우는 빛과 피부에 닿는 따가운 햇살에 적응하지 못한 듯 표정을 일그러뜨리더니,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자매들!”

덜컹.

덜컹.

덜컹!

비탈길을 따라 늘어서 있던 오두막의 대문이 순서대로 열리더니, 눈 밑이 퀭한 얼굴들이 문 너머로 고개만 살짝 내밀었다. 분명 저주에서 벗어났을 터인데도, 15년 동안 체념에 짓눌려 있던 이들의 눈빛은 그리 쉽게 생생해지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다른 방향으로 선명한 감정을 띠게 되었다고 할까.

‘이젠 다 틀렸어.’

‘우린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더 이상 달라지지 않을 거야.’

‘살든 죽든 어차피 마찬가지 아니야?’

‘우리를 내버려 둬.’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

무기력함에 짓눌려 있던 이들이 갑자기 저를 압박하던 체념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가장 먼저 느끼는 감정은 기쁨이나 상쾌함 같은 것이 아니었다.

‘나는 이제까지 뭘 하고 있었던 거지?’

현실을 자각하자 밀려드는 아찔함과 혼란스러움을 감당하기에 그들의 내면은 이미 너무도 처참하게 무너져 있었다. 마음을 다잡지 못하는 이들의 불안과 불만은 자연히 밖으로, 제가 아닌 다른 대상을 향했다.

“너 뭐야?”

“뭔데 여기 있어?”

퀭한 눈으로 고개만 빼꼼 내밀어 사비나를 쳐다보던 여자들이 하나둘 문밖으로 걸어 나왔다.

쟁반을 든 사람, 주먹을 쥔 사람, 신발을 벗어 든 사람…… 금방이라도 그녀들이 사비나를 공격할 것 같다고 판단한 나자예프는 얼른 양팔을 벌려 사비나의 앞을 가로막았다.

“다들 진정해! 사비나는 너희들을 구하러 온 거라고. 체념의 핵을 흡수해서 마을의 시간을 되돌려준 은인이란 말이야!”

“뭘 하려고 여기 왔어, 나자예프!”

“썩 꺼져! 재활용도 못 하는 폐기물 같으니!”

눈이 퀭한 여자들이 욕을 하며 나자예프를 향해 집기를 던지기 시작했다. 쇠굽이라도 박아 넣은 것처럼 무겁고 단단한 신발 밑창에 코를 후드려 맞은 나자예프는 꽥 소리를 지르며 긴 팔다리를 허우적거렸다.

“나자, 아니! 그, 피해요……!”

“아니야, 내가 막고 있을게! 사비나, 얼른 피해!”

이곳에 와서 한 일이라고는 대기하는 것밖에 없었던 나자예프는 지금 이 순간이 그녀를 지킬 유일한 기회라는 것을 직감했다.

“사비나! 얼른 도망…… 커헉!”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와, 나자예프 이 망나니 자식이!”

“남자 출입금지가 무슨 뜻인지 몰라? 가운데 다리를 세로로 찢어 줄까?”

손에 잡히는 집기를 전부 던진 이들이 하나둘 의자니 탁자니 하는 것을 끌고 나오기 시작하자, 나자예프는 기겁하며 사비나를 떠밀었다.

“사비나, 빨리! 빨리 도망가!”

“나, 나한테 닿으면 안 돼요!”

“빨리! 이러다 우리 둘 다 맞아 죽겠어!”

당장 목숨의 위협을 받는 것은 나자예프 하나뿐이지만, 나자예프가 고꾸라지고 난 다음에 그들의 분노가 가라앉지 않는다면 사비나 또한 위협을 당할 것이다. 나자예프는 사비나를 들쳐메고 뛰기 시작했다.

“아, 안 돼요!”

“그래, 안 되지! 나의 유일한 남성성을 이런 곳에서 어이없이 희생시킬 수는 없어!”

“내, 내려놓으라고요!”

“괜찮아. 나 다리 하나는 빠르거든? 내가 이래 봬도 우리 마을에서 제일 재빠른…… 어?”

나자예프의 어깨가 기울어지며 몸이 휘청거렸다.

급하게 달아나느라 균형을 잘못 잡은 것일까?

아니면 비탈길에서 발을 헛디딘 것일까?

북쪽 탑의 반대편은 급경사가 진 까닭에 사람이 다니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는 것을 미처 생각지 못했던 나자예프는 사비나를 부둥켜안은 채로 굴러떨어졌다.

늪 속의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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