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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 속의 불-113화 (113/189)

114화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하얀 사람이었다. 흰 머리를 보고 막연히 노인일 것으로 상상했던 사비나는 앳되어 보이는 창백한 얼굴을 마주하고 조금 놀랐다.

알비노라고 하던가. 몸의 색소가 거의 없어 햇볕을 보기 힘들어하는 체질이 있다고 들었다. 눈앞의 사람도 그런 걸까.

‘어라? 내가 이걸 누구한테 들었더라?’

문득 떠오른 의문에 대답을 찾을 새도 없이, 창백한 입술이 벌어지며 처음 듣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시끄러워서 잘 수가 없어.”

“……네?”

목소리가 낮은 것도 아닌데, 묘하게 가라앉는 듯한 음성이었다. 사비나는 놀란 얼굴로 페고라를 바라보았다.

북쪽에는 여자들만 살고 있다고 들었는데, 페고라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가 없었다. 네나뷔스테는 어지간한 남자들보다 키가 컸지만 행색이나 목소리로 딱 여자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눈앞의 상대는 자신과 비슷한 나이로 보인다는 것 외에는 성별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하얀 속눈썹 아래로 보이는 엷은 보랏빛 눈동자가 초점을 맞추려는 듯 느리게 움직였다.

시력이 나쁜 것인지, 초점이 고정된 것과 동시에 페고라가 눈을 가늘게 했다.

“저주의 핵을 흡수하고 다닌 게 너지?”

사비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가, 상대의 시력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짧게 네, 하고 대답했다.

“어지러웠다가, 속이 거북했다가, 잠잠해질 만하면 이명이 들려. 너 때문이었구나.”

로스카옌 사제의 말이 기억났다. 네 개의 저주의 핵은 서로 연결되어 균형을 이루는 상태라고. 페고라는 이 먼 북쪽 탑의 지하에서도, 사비나가 세 개의 핵을 흡수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던 걸까. 저주의 핵을 흡수할 때 있었던 일을 떠올리자 사비나의 고개라 절로 수그러들었다. 자신도 정신을 잃을 만큼 요란한 사고를 일으켰으니, 저주의 핵을 품고 있던 페고라에게도 영향이 갔을 것이다.

“죄송해요. 다른 곳의 핵을 흡수하는 것이 더 급하다고 생각해서…… 당신에게 영향이 가는 줄 몰랐어요.”

“책망하려고 꺼낸 이야기는 아니란다.”

페고라가 손을 뻗었다. 사비나가 반사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나자, 옆에 있던 카림이 <가까이 오라는 뜻이에요.>라고 일러 주었다.

사비나는 머뭇거리며 페고라를 향해 다가갔다. 이제까지 봐왔던 세 명과는 달리, 페고라는 고통 속에 몸부림치지도, 울컥 치미는 격렬한 감정에 표정을 일그러뜨리지도 않았다.

체념의 핵을 품고 있기 때문일까. 페고라는 앉아 있는 게 고작이라는 듯 지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비나가 저주를 흡수하려 들면 거부하던 이들과는 달리, 페고라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

“저주는 어떤 식으로 흡수하는 거니?”

“접촉을 통해 빨아들일 수 있어요.”

“그냥 만지기만 하면 다 흡수할 수 있다고? 신기하구나.”

“약한 저주는 쓰다듬는 것만으로도 가능하고, 강력한 저주는…….”

바르셀다가 품고 있던, 뱀 모양의 <분노의 핵>을 흡수할 때는 팔에 난 상처를 이용했다. 아페티트가 사비나를 조종할 때는 피를 훔쳐 갔다.

사비나의 피에 깃든 죽음의 저주는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죽여 버릴 만큼 강력하지만, 같은 저주의 화신인 아페티트에게는 통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아마도 저주의 농도 자체는 아페티트 쪽이 더 짙기 때문이리라.

사비나는 페고라를 바라보았다. 페고라가 품고 있는 저주의 핵이 체념이기 때문인지, 그저 앉아 있을 뿐인데도 기운 없이 축 늘어져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무리 저주에 익숙하다고 할지라도, 저주의 화신이 아닌 이상 사람의 몸으로 저주를 감당하기란 버거웠다. 페고라가 저주에 짓눌린 상태이며, 저주의 화신은 아니라고 판단한 사비나는 솔직히 말하기로 했다.

“제 몸에 상처를 내면 피가 흘러나오거든요. 피에 깃든 저주의 농도가 제일 진해서, 강력한 저주도 빨아들일 수 있어요.”

“……그래, 알았다. 칼을 가져오려무나, 카림.”

페고라가 눈짓하자, 카림이 게처럼 옆으로 걸어가 먼지가 부옇게 낀 거울장의 문을 열었다.

잡동사니가 가득한 그 안을 뒤적이던 카림은 어렵지 않게 칼을 찾아냈다. 갈고리 모양으로 굽어 있는 칼은 군데군데 녹이 슬었음에도 날 끝만큼은 예리했다.

“페고라. 제 피에 닿으면 위험해요.”

“피로 흡수할 수 있다면서?”

카림에게 칼을 건네받은 페고라가 칼을 흔들어 보이자, 사비나는 다급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최후의 수단이에요.”

“최후의 수단?”

“제 피는 강력한 만큼 위험해요. 그…… 네나뷔스테 때는 접촉만으로 흡수할 수 있었거든요. 우선은 페고라, 당신 손을 잡는 것으로 먼저 시도해 볼게요.”

“그러렴.”

사비나가 몸을 사리는 거라고 생각했는지, 페고라는 조금 아쉬운 듯 칼자루를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다가 바닥에 내려놓았다.

사비나는 가만히 손을 뻗어 페고라의 손을 맞잡았다. 처음엔 온기조차 느껴지지 않던 손이 사비나의 손바닥과 맞닿는 순간 두근, 맥동하더니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읏…….”

“괜찮아요, 페고라. 저한테 다 넘긴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편히 가져요.”

페고라는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통스러운 듯 보였으나 참지 못해 날뛸 만큼은 아닌 것 같았다. 사비나는 눈을 감고 체념의 핵을 흡수하는 데 정신을 집중했다.

네나뷔스테나 바르셀다 때는 한시가 바쁜 상황이라 제대로 파악할 겨를이 없었는데, 상대가 이렇게 얌전히 있어 주니 자신 안으로 흘러드는 저주의 핵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축축하고, 진득해…… 알갱이? 아냐. 뭔가 물컹거리는 게…….’

증오의 핵은 가시 모양이었고, 분노의 핵은 뱀 모양이었다. 그리고 욕망의 핵은 분진 형태를 띠고 있었다.

체념의 핵은 어떤 형태일까.

고정된 형체가 없이 욱여넣는 대로 뭉그러지는 그것은 진흙보다도 더 입자가 고운지 까슬거리는 느낌 하나 없이 사비나의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소름이 끼칠 만큼 서늘한 것이 몸속으로 파고드는 느낌에 사비나는 헉, 숨을 헐떡였다가 입안을 깨물었다.

에르잔도 나자예프도 없는데, 여기서 정신을 잃어서는 안 된다. 꾸역꾸역 밀려드는 체념의 핵이 제 안으로 완전히 스며들 때까지 숨을 참고 있던 사비나는, 손끝에 거슬리는 감각이 사라지고 나서야 겨우 숨을 내쉬었다.

“후우…….”

몸이 천근처럼 무거웠다. 눈을 뜨려고 했는데 감은 눈꺼풀이 잘 올라가지 않았다.

이제까지 매번 저주의 핵을 흡수하면 기절했던 게 단순히 상처를 입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음을 깨달은 사비나는 어떻게든 의식을 놓지 않으려 입안을 깨물었다. 찌릿한 통증과 함께 비릿한 피맛이 입안에 퍼졌으나 덕분에 몸의 감각이 조금 되돌아왔다.

눈을 뜨자, 헤진 옷자락이 보였다. 앉아 있는 것조차 힘겨워하던 이는 어디로 가고, 페고라는 멀쩡하게 서서 몸을 풀고 있었다.

“신기하구나. 이렇게 금방 움직일 수 있게 될 줄이야.”

페고라는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켜고, 손목을 돌리며 손가락을 풀고는 작게 감탄했다.

“내가 그랬잖아요, 페고라. 누나가 안아준 뒤로 몸이 날아갈 듯이 가벼워졌다고.”

제 말이 맞지 않냐는 듯 으쓱하는 카림에게 페고라는 눈웃음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몸을 돌려 사비나를 바라보더니, 체념의 핵을 흡수한 탓에 몸이 무거워 아직 주저앉아 있는 사비나를 그대로 걷어찼다.

“아윽!”

“누나!”

카림이 깜짝 놀라 사비나에게 달려왔다가, 그녀의 옷자락에 손이 닿는 순간 비명을 지르며 떨어져 나왔다. 아이의 손바닥이 화상을 입은 것처럼 빨갛게 되어 있었다.

“카……아니, 나한테 닿으면, 안 돼…….”

“누, 누나…….”

사비나는 카림의 이름을 부르지 않도록 고개를 털고는 몸을 웅크렸다.

페고라에게 걷어차인 배보다도, 몸안으로 파고든 체념의 핵이 몸 곳곳을 찔러 대는 것이 더욱 아팠다.

아니, 찔러 댄다기보다는 꽉 막혀서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것 같다고 할까.

무리해서 움직였다간 피부가 찢어져 저주가 흘러나오거나 도로 토해 낼지도 모른다. 사비나는 이를 악물었다.

망연한 얼굴로 사비나를 바라보던 카림이 원망스러운 목소리로 페고라에게 물었다.

“페고라. 왜 누나를 때린 거예요?”

“내내 시끄러워서 잘 수가 없다고 했지 않니. 몸이 나으니 공연히 화가 치밀더구나.”

체념의 저주로부터 벗어난 페고라의 음성이 한층 날카로워졌다.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페고라는 바닥에 웅크리고 있는 사비나의 모습을 샅샅이 훑었다.

“이상하네. 내 손을 잡을 때까지는 멀쩡했는데, 카림은 왜 손에 화상을 입었을까?”

“평범한 사람은, 나한테 닿으면 안 돼요…….”

“저주를 입은 사람은 괜찮고?”

사비나는 힘들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주에 익숙한 사람은 사비나와 접촉해도 어느 정도는 견딜 수 있다.

시간이 멈춘 마을에서는 상처도 곧 나아 버리므로 사비나가 이름을 부르거나 그녀에게 닿아 상처를 입더라도 금방 낫겠지만, 네 개의 핵을 전부 흡수한 이상 이제 이 마을의 시간은 정상적으로 흘러갈 것이다.

상처를 입으면 낫기 힘들뿐더러 오염물질이 들어가면 상태가 악화될 수도 있었다.

“그럼 이제 우리 마을에 너한테 닿아도 되는 사람은 없겠구나.”

위화감이 들 만큼 담담한 어조에 순간적으로 심장이 쿵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사비나는 팔꿈치로 바닥을 딛고 상체만 반쯤 일으켜, 페고라에게 말했다.

“그…… 아이를, 어서 치료해 주세요. 내버려 두면 흉터가 남을 거예요…….”

“카림. 올라가서 자매들을 찾아가 화상을 치료해 달라고 하렴.”

“하지만 누나가…….”

“그대로 두면 손바닥이 짓물러 더 아프지. 네가 아파하면 돌아가신 엄마가 얼마나 슬퍼할까?”

돌아가신 엄마. 그 말에 카림이 어깨를 움찔 떨더니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페고라가 어서 올라가라는 듯 턱짓하자, 카림의 표정이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누나…….”

“괜찮아, 나는. 어서 올라가.”

고통에는 익숙했다. 페고라가 무슨 짓을 하든 사비나는 죽지 않으니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사비나가 힘들게 웃어 보이자, 카림은 코를 훌쩍이고는 얼른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타다닥. 아이의 빠른 발소리가 멀어지자 페고라가 빙긋 웃었다.

“이상할 정도로 태연하구나.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니?”

“아뇨…….”

페고라가 왜 자신을 공격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사비나는 놀라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맞닥뜨려도 그게 누군가 자신을 경계하거나 분노를 표현하는 거라면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만약 사비나에게 갑자기 호의를 보이거나 친근하게 다가왔다면 놀랐겠지만, 페고라의 반응은 조금도 놀랍지 않았다. 굳이 따진다면 자신을 두려워하며 멀어지는 게 아니라 걷어찼다는 사실이 조금 의외였다.

“네가 저주를 흡수해 이 마을을 구해 주었지. 도와주었는데도 나는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를 걷어찼단다. 그런데도 전혀 화가 나지 않은 모양이로구나.”

“……그러면 안 되나요?”

“이상하지. 아니, 수상하지.”

페고라는 바닥에 놓여있던 칼을 주워 들었다. 둥글게 굽은 칼날이 사비나의 왼쪽 눈을 향해 다가왔다.

“그만…… 내 몸에 상처를 입히면, 안 돼요.”

“그 반응이 수상쩍기 그지없어.”

눈을 찌를 듯이 다가왔던 칼날이 멈추었다. 그러나 페고라는 손을 거두어들이지 않았다.

“저주받은 마을에 어느 날 갑자기 구원자가 나타난다. 이상하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

“나를 비롯해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던 저주를 흡수하고, 마을의 시간을 원래대로 되돌려준다. 그래. 여기까지도 납득할 수는 있어. 하지만 이렇게까지 얌전하면 누구라도 의심하지 않겠니?”

“…….”

“지금 네 모습 말이야. 아무리 봐도 도와준 사람에게 배신당한 얼굴로는 보이지 않거든.”

칼날을 사이에 두고, 페고라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연한 보랏빛의 눈동자에 빛이 되돌아왔다. 그러나 반짝이는 생명의 빛이라기엔 지나치게 불길했다.

“그렇게 죗값을 치르고 후련해진 듯한 표정을 지으면, 우리 마을이 이 모양이 된 게 꼭 너 때문인 것처럼 느껴지잖니?”

늪 속의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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