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 속의 불-112화 (112/189)

113화

‘어라?’

수풀 사이에서 가느다란 인영이 흔들렸다. 멀어서 표정은 잘 보이지 않지만, 자그마한 체구에 서툴게 묶은 머리쓰개 아래로 구불구불한 갈색 머리카락이 보였다.

“카밀라?”

거리가 멀어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을 리 없는데, 사비나가 이름을 부르자 카밀라는 파드득 몸을 떨며 수풀 너머로 도망쳤다. 마치 처음 두 사람이 만났을 때 그랬던 것처럼.

그때와는 달리 다리가 나은 카밀라는 재빨리 우거진 나무 사이로 모습을 감추어, 더는 보이지 않았다.

‘배웅하러 온 걸까? 아니면…….’

늘 용건도 없이 불쑥 찾아와 사비나에게 말을 걸던 카밀라였는데, 사비나가 교회 바닥을 썩게 만들고 오딜의 손에 구멍을 낸 후로는 카밀라도 찾아오지 않았다. 카이라트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사비나의 위험성을 깨달아, 경계하는 걸까?

그날 밤까지 카이라트에 맞서 사비나의 편을 들던 카밀라의 태도가 갑자기 바뀐 까닭을 알 수 없었으나, 사비나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평범한 사람이 그녀를 피하는 건 당연했다. 이제까지 사비나에게 친근하게 다가오던 카밀라가 이상한 거였다.

“사비나. 왜 그래? 안 따라오고.”

“아, 미안해요. 갈게요.”

뒤늦게 사비나를 수상하게 여겨 정찰하러 온 건지, 아니면 여전히 친구로 생각하지만 께름칙한 점이 남아 다가오지 못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누군가에게 외면당하고 모욕을 듣고 버림받는 데는 익숙했다. 누군가 사비나에게 향하던 호의를 갑자기 거두어들여도, 그녀는 이유를 전혀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녀가 주어진 현실에 수긍하는 데 납득가는 이유 같은 건 필요하지 않았다. 현상을 파악하면, 사비나는 금세 포기했다.

‘어차피 저주의 핵을 흡수하고 나면 이 마을에서 내가 할 일은 더 이상 없는걸. 아페티트를 붙잡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까…….’

마을에서 떠나는 날이 곧 콘바야젠 저택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그리고 에르잔과 헤어지는 날이다.

마을의 저주를 흡수하고 사람들을 구하겠다던 목표를 품고 이제까지 달려왔음에도 불구하고, 사비나는 에르잔과의 이별을 생각하는 순간 괜히 가슴이 아파졌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걱정하지 말자. 원래 나한테 미래 같은 건 없잖아. 지금만 생각하면 돼.’

만약 <미래>를 정말로 없앨 수 있다면, 죽 현재에만 머물러있을 수 있을까.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얼핏 떠올랐다가 흩어졌다. 사비나는 차가운 새벽 공기에 섞인 저주의 냄새를 따라 걸었다.

***

마을의 동쪽과 서쪽, 남쪽 가장자리를 숲이 둘러싼 것과는 달리, 생존자들이 모여 산다는 마을의 북쪽은 들어가는 입구가 숲으로 가로막혀 있었다.

“오래 전에는 여기까지가 이 마을 영역이었어.”

“이 숲으로 들어가기 전까지요?”

“응. 내가 태어나기도 전 얘기지만.”

원래는 숲을 울타리 삼아 그 안쪽에서만 살았으나, 모종의 이유로 여자들이 자기들만 살 곳이 필요하다며 숲의 건너편에 터를 잡고 집을 지어 살기 시작하는 바람에 마을의 규모가 넓어졌다고 나자예프는 설명했다.

“그러고 보니 오딜의 집도 숲속에 있었는데…….”

“나무가 우거져서 누가 들여다볼 일도 없고, 소음도 막아 주니까. 그게 편하다나? 나는 잘 이해 못 하겠지만 아무튼 그렇대.”

“나자예프. 자네가 이해할 수 있는 게 있기는 한가?”

“나 바보 아니거든?”

로스카옌의 무심한 듯 냉철한 지적에 울컥 나자예프가 화를 내며 옆의 나무뿌리를 발로 퍽 찼다가, 닭 울음소리를 내며 발을 감싸 쥐었다.

“으아, 아파! 로스카옌, 뭐 하는 거야!”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나무를 발로 걷어찬 건 자네 아닌가?”

“네가 화나게 하니까 그런 거잖아! 우씨, 신발이라도 좀 더 튼튼한 걸 신고 올걸…….”

“나자…… 음, 괜찮아요? 많이 아픈가요?”

“응? 괜찮아! 나 튼튼해. 걱정하지 마, 사비나.”

제 발로 걷어차 놓고 아프다며 성질을 부리던 망나니가 사비나 앞에서만 상식인인 척하는 꼴을 바라보며 로스카옌은 눈을 흐리게 했다. 로스카옌은 나자예프가 사비나에게 허튼소리나 성희롱을 하지 못하도록 옆구리를 꼬집었다. 떫은 소리를 내며 로스카옌을 향해 씩씩 다가오는 나자예프를 숲의 밖으로 유인하는 건 간단했다. 로스카옌은 그치고는 상당히 빠른 걸음으로 숲을 빠져나왔다.

“일찍 오셨네요?”

“카림?”

잿빛 머리카락에 회색 눈동자. 팔다리는 여전히 앙상하지만 옷은 비교적 깨끗한 것으로 갈아입은 카림이 세 사람을 향해 고개를 까딱 기울여 인사했다.

“오랜만이에요, 누나.”

“아, 응…….”

만나기로 미리 약속을 잡은 만큼 누군가 마중을 나올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그게 카림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사비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끄덕이자, 카림은 로스카옌에게로 쪼르르 다가가 긴 소맷자락을 붙잡더니, 나자예프를 가리켰다.

“로스카옌 신부님. 저 형은 왜 데려왔어요? 남자는 여기 들어오면 안 된다고 했는데.”

“데려온 게 아니라 저놈이 따라온 거란다. 그리고 남자가 아니라 망나니니까 괜찮아. 짐승 같은 것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전해주렴.”

“그래요? 그렇구나.”

카림은 납득한 듯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반응에 상처를 입은 나자예프가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냐며 항변했으나 그럼 돌아가라는 말에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그렇게 치면 로스카옌도 남자잖아. 카림도 남자고!”

“노인과 어린아이는 언제나 예외가 되지.”

나이로만 따지자면 로스카옌은 노인이 아니고 카림은 어린아이가 아니었으나 나자예프는 차마 그 점을 지적하지 못하고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사비나는 나자예프에게 뭔가 위로의 말이라고 건네려 했지만, 로스카옌이 재촉하는 바람에 반쯤 끌려가듯이 뒤를 따랐다.

처음 이 마을에 도착해서 보았던 풍경과는 사뭇 달랐다. 비록 저주의 기운이 곳곳에 스며든 것은 동일했으나, 비탈길을 따라 늘어선 오두막은 폐가가 아니라 사람이 사는 흔적이 곳곳에 묻어나왔다.

카림은 깡총거리며 비탈길을 올라가면서, 발에 채는 돌멩이를 휙 집어 들어 던져 버렸다. 중간에 하나가 잘못 튀어나가 나자예프의 이마를 직격했으나 너무도 사소한 사고였던 까닭에 셋의 걸음을 멈추지는 못했다.

“로스카옌 신부님. 이곳에는 사람들이 꽤…… 많이 살고 있는 것 같은데요.”

“총 스물한 명입니다.”

“그렇게나 많아요?”

동쪽과 서쪽, 남쪽의 인구를 모두 합친 것보다 배는 더 많은 숫자였다. 사비나는 왜 마을의 북쪽에만 생존자가 이렇게 많이 몰려있는지 의아해하는 한편, 그렇게 많은 생존자가 있었기에 연못의 뼈를 추려내 장례를 치를 수 있었구나 하고 납득했다.

그러나 이상하긴 했다. 분명 집 안에 사람이 살고 있는 것 같은데, 스물한 명이나 살고 있는 장소라기엔 지나치게 고요했다.

아무리 체념하여 무기력해진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장소라도 인기척 정도는 나야 할 터인데, 생활감이 있는 오두막의 모양새와는 달리 안에서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이런 곳에서 카림이 계속 지냈던 걸까.

사비나는 조금 의아해졌다.

“카림. 그동안 잘 있었…… 어디 아프지는 않니? 이렇게 일찍부터 돌아다녀도 돼?”

“어차피 이곳에서는 할 일이 없는걸요. 다들 움직이기 힘들어해서, 제가 옆에서 시끄럽게 구는 것보다는 밖에서 재주넘기라도 하는 게 더 나을 거랬어요.”

“……누가 그런 말을 했는데?”

“페고라가요.”

“페고라?”

누군가의 이름일까? 사비나가 고개를 갸웃하자, 로스카옌이 설명을 덧붙였다.

“북쪽의 핵을 품고 있는 사람입니다. 좀처럼 밖으로 나오지 않는 까닭에 카림을 통해 연락을 취했지요.”

“아…… 그럼 로스카옌 신부님께서 직접 만나신 건 아니네요?”

“예. 하지만 확실히 만나겠다는 대답을 보내왔으니 아가씨를 박대하지는 않을 겁니다.”

“로스카옌. 나는?”

“자네를 박대하지 않는 사람이 이 마을에 있던가?”

자연스럽게 나자예프를 배제하며 로스카옌은 사비나를 언덕의 끝에 있는 탑으로 안내했다. 아니, 이걸 탑이라고 불러도 좋을까.

벽돌을 빼곡하게 둘러쌓아 튼튼하게 만든 것과는 별개로, 꼭 어린애가 만든 장난감 성 같은 규모였다.

동쪽 첨탑은 탑만 뚝 떼어 놓은 형태였고, 서쪽 첨탑은 말 그대로 교회에 붙어 있는 구조물이었는데, 이 탑은 허리를 숙여야만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입구가 좁았다.

어린아이인 카림이나 날씬한 사비나라면 모를까, 로스카옌이나 나자예프는 들어가다가 도중에 몸이 낄 것 같았다.

“로스카옌 신부님, 이곳은…….”

사비나가 당황한 얼굴로 돌아보자, 로스카옌 사제는 흰 수염을 쓸어내리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저는 여기까지 아가씨를 모시고 온 것으로 역할이 끝났습니다. 나자예프가 밖에서 대기하고 있을 테니, 아가씨께서는 카림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뭐? 나 여기 계속 서 있어야 해?”

“싫으면 나와 함께 돌아가겠나?”

“그럼 내가 여기 온 이유가 없잖아! 난 사비나를 지키러 온 건데!”

“그래. 그러니 자네는 여기를 지키고 있게나.”

“내가 무슨 집 지키는 개인 줄 알아?”

“자네보다는 개가 낫지.”

로스카옌은 나자예프에게 얌전히 있으라는 듯이 손짓하면서, 사비나를 재촉했다. 사비나는 얼떨결에 두 남자에게 인사를 하고 카림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와아…….’

규모도 작고 입구도 비좁아서 과연 사람이 셋이나 들어갈 수는 있나 염려했던 것과는 달리, 안쪽은 아래가 깊이 파여 있었다.

사비나가 허리를 펴고 일어나도 위로 손을 뻗을 수 있을 정도로 천장이 높아졌다. 작은 마을인데, 이런 규모의 요새를 지하에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 사비나는 조금 당황했다.

“누나. 바닥을 조심해야 돼요.”

“으응.”

카림이 밟은 널찍한 돌을 똑같이 따라 밟으며 아래로 내려왔다. 지하이기에 햇빛은 들지 않았지만, 아래에서 불을 밝히고 있어 내려가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데려왔어요, 페고라.”

마지막 계단을 남겨두고 한 번에 두 계단을 폴짝 뛰어내린 카림이 고개를 옆으로 삐딱하게 기울이며 인사하자, 내내 누워 있던 하얀 인영이 비스듬하게 몸을 일으켰다.

늪 속의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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