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 속의 불-111화 (111/189)

112화

“로스카옌 신부님이 빵을 새로 구우셨나 봐요. 뜨거우니까 조심해서 먹어요, 에르잔.”

“제가 아니라 아가씨께서 조심하셔야지요…….”

로스카옌 사제는 시간에 맞춰 식사를 가져왔으나, 두 사람을 방해하지 않고 문 앞에 놓아두고 가기를 반복했다.

에르잔은 그것이 못내 민망한 모양이었으나 사비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신성한 교회에서 남녀가 한 침대에 누워 온종일 비비적거리는 모습을 드러내는 건 분명 부끄러운 일이었으나, 사비나는 죄책감에 익숙했다. 로스카옌 사제에게 미안하고 민망한 마음은 있었다. 그러나 남부끄럽다는 이유로 에르잔의 곁에서 떨어질 만큼 사비나는 이성적이지 못했다.

‘저주의 핵을 전부 흡수하고 아페티트까지 찾고 나면 이 마을에서 떠나야 하니까…….’

마을 북쪽에 있는 체념의 핵을 흡수하고 나면 이 저주받은 마을의 멈춰 있던 시간도 흐르기 시작한다. 아페티트를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비록 이 마을이 넓고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였다고는 하나, 이 마을에서 평생을 살아온 이들에게는 어둡고 장애물이 많은 숲길 따위 아무런 방해도 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 이상, 아페티트도 이제는 매 끼니마다 식사를 하고 잠을 청해야 할 것이다. 작은 마을이니 낯선 생활의 흔적쯤은 금방 찾아낼 터였다. 사비나는 아페티트로 인해 누군가 다칠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해도, 그를 찾아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하지 않았다.

사비나가 조바심을 내는 원인은 다른 곳에 있었다.

‘에르잔과 이렇게 있을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걸. 조금이라도 더 함께 있고 싶어.’

그 사실을 떠올린 것만으로 코끝이 찡해져, 사비나는 얼른 눈을 깜박여 눈물을 털어 냈다.

사비나는 이 마을을 떠나기 전까지, 콘바야젠 백작가로 돌아가기 전까지, 일분일초라도 더 에르잔과 함께 있고 싶었다. 누군가 그들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거나 손가락질을 하거나, 불경하다거나 몰염치하다고 욕을 한다고 한들 상관없었다. 민망함이나 미안함 같은 상식적인 감정을 느끼기에 사비나는 너무나도 절박한 상태였다.

“에르잔. 나랑 같이 자는 거 불편하죠?”

“예? 아, 아닙니다!”

“침대도 비좁은데 나 때문에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거 알아요. 그런데…… 난 그래도 에르잔이랑 같이 있고 싶어.”

그와 한 뼘도 되지 않는 거리에 몸을 뉜 채, 사비나는 언제 꺼질지 모르는 촛불을 바라보는 듯이 애타는 시선으로 에르잔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에르잔은 사비나가 낮에도 밤에도 전혀 쉬지 않고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 조금 걱정되었으나, 잠을 재우려고 하면 사비나가 울 것 같은 표정을 해서 그럴 수도 없었다.

“아가씨께서는 쉬지 않으셔도 괜찮으십니까?”

“난 괜찮아요. 에르잔은 환자니까 든든하게 먹고, 푹 자야죠.”

서로 마음을 고백한 두 남녀가 한 침대에 누워 있는 시점에서 이미 푹 쉬기는 글러 먹었다는 사실을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일까. 사비나가 배시시 웃으며 에르잔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에르잔. 만져도 돼요?”

“사비나 아가씨…….”

사비나를 좋아한다고 고백했으면서, 이상하게도 에르잔은 그녀가 몸을 맞대 오면 곤란해했다.

탄탄한 몸을 더듬을 때면 움찔거리며 허리를 뒤로 빼고, 입을 맞추려 들면 어깨와 목까지 긴장시키는 것이 느껴졌다. 아랫배를 쿡쿡 찌를 만큼 부풀어 오른 그의 성기를 보고 성욕이 일어 그러나 싶었는데, 사비나가 손으로 애무해 욕구를 해소해 주려 하면 갑자기 질겁하면서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그렇다고 거부한다고 볼 수도 없는 것이, 싫어서 그러나 싶어 사비나가 멀어지려 하면 에르잔은 다시 그녀를 붙잡았다.

밀어내는 건지 끌어당기는 건지.

사비나는 에르잔이 왜 제 몸에는 손도 못 대게 하면서 밀어내지는 않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유를 물어도 에르잔은 얼굴만 붉힌 채 대답하질 못했다. 사비나는 곧 저 좋을 대로 해석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편이 그녀에게도 좋았기 때문이다.

“농담이에요. 얌전히 있을게요.”

사비나는 에르잔의 가슴에 이마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천상의 음악이 무엇인지 들어 본 적이 없기에 감히 비교할 수는 없지만, 그의 심장이 뛰는 소리보다 아름답지는 않을 것이다. 사비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매일이 오늘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오늘이 끝나지 않고 이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틀이라기엔 하루 낮을 사이에 둔 두 밤뿐인 시간은 금세 흘러갔다.

***

사비나가 눈을 뜬 것은 이제 막 동이 터오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그저 눈을 감고 있었을 뿐 잠들지 않았던 사비나와는 달리, 에르잔은 불편한 자세로도 어찌나 잘 자는지 품 안의 그녀가 꼼지락거리는 것도 알아채지 못한 듯했다.

‘에르잔. 잘 자네…….’

역시 온종일 사비나가 곁에 있어서 피로했던 걸까. 온종일 먹고 쉬고 잔 것밖에 없긴 하지만 사람에게는 보통 자기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들었다. 에르잔과 떨어지기 싫다는 이유로 부상자인 그를 너무 괴롭힌 것 같아, 사비나는 조금 가슴이 뜨끔했다.

‘그래도 상처가 덧나지는 않아서 다행이야.’

에르잔의 회복 속도는 순조로웠다. 사비나나 다른 저주받은 사람들처럼 금세 상처가 아물지는 않았으나, 붕대를 갈아 줄 때도 더 이상 피는 묻어나지 않았고, 때때로 상처에서 열이 나던 것도 잠잠해졌다.

사비나는 에르잔의 잠든 얼굴을 조금 더 구경하다가 살그머니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다녀올게요, 에르잔.’

에르잔을 깨우지 않기 위해 속으로 인사를 마친 사비나가 문을 열고 나오자, 복도에 정물처럼 서 있던 검은 그림자가 움직였다.

“일찍 일어나셨군요.”

“로, 로스카옌 신부님?”

밤을 새웠던 걸까? 로스카옌의 목소리며 행동에 졸음의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내내 에르잔과 방 안에서 붙어 있을 때는 무시할 수 있었던 현실을 자각하자, 사비나의 귀 끝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어, 죄송해요. 계속 식사를 가져다주셨는데 인사도 못 드리고…….”

“괜찮습니다. 그보다 옷을 갈아입으시는 게 좋겠군요.”

사비나는 로스카옌 사제가 내민 루바하를 바라보았다가, 제 몸에 걸치기엔 헐거운 하얀 로브를 내려다보았다. 에르잔의 붕대를 갈아 주면서 사비나도 몸을 닦기는 했지만, 이틀째 옷을 갈아입지 않은 탓에 청결한 차림새는 아니었다. 나자예프의 로브임에도 에르잔의 체취가 남아 있다는 사실에 묘하게 가슴이 간질거려, 사비나는 로스카옌 사제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옷만 받아들고 욕실로 향했다. 로스카옌은 가만히 복도에 서서 닫힌 욕실 문과 에르잔이 잠든 방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원하는 대로…… 그래.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해야지. 나처럼 되면 안 되지.”

주름 가득한 손이 덥수룩한 흰 수염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 사이로 금줄 목걸이가 얼핏 드러났다가 도로 자취를 감추었다. 씁쓸한 미소를 지은 채 로스카옌은 돌아섰다.

“작별은 이미 한참 전에 해야 했는데. 미루고 미뤄서 여기까지 왔는데도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다니…… 이래서야 더는 고해성사도 못 듣겠구먼.”

***

목욕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사비나가 교회 뒷문으로 나왔을 때, 그곳에는 의외의 인물이 함께 있었다.

“나자예프.”

“아, 안녕? 사비나.”

이름을 불린 순간 나자예프가 켁, 작게 헛기침을 하는 것을 보고 사비나는 합 입을 다물었다. 의식해서 부른 것은 아니기에 타격이 크진 않은 듯하지만, 나자예프는 이 마을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저주에 면역이 대단히 약했다. 사비나는 최대한 시선을 피하며 그에게 물었다.

“그…… 어쩐 일이에요? 이런 시각에.”

“북쪽에 간다며. 에르잔은 부상자라 같이 갈 수도 없고, 오딜도 그 꼴이니까 나라도 사비나를 지켜야지.”

“오딜은 괜찮아요? 사과하러 갔어야 했는데…….”

“에이, 그 정도 가지고 뭘. 몸은 멀쩡해. 정신이 대신 나간 거 말고는.”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사비나. 얼른 가자.”

나자예프가 말을 돌리며 손을 내밀자, 사비나는 얼른 양손을 뒤로 숨기며 로스카옌 쪽으로 붙어섰다. 그 모습을 보고 나자예프는 조금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가 손을 되돌리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랑은 손도 잡기 싫다는 거야? 이미지 회복까지는 아직도 한참 남은 모양이네.”

“아뇨. 그게…….”

사비나가 나자예프의 손을 잡지 않은 이유는 혹 그녀로부터 저주가 옮겨갈까 경계한 것이었으나, 워낙 쌓아 놓은 업보가 많았던 나자예프는 굳이 캐묻지 않고 순순히 포기했다.

“그보다 나자…… 아니, 당신은 괜찮아요?”

“왜, 어디가 안 괜찮아 보여? 지각하면 로스카옌이 쌩하고 가 버릴까 봐 밤은 새웠지만 몸은 멀쩡해. 네 다정한 한마디면 피로 같은 건 싹 날아가 버리거든. 기왕이면 손까지 잡아 줬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그게 아니라 그날…… 내가 이, 이상한 짓을 해서…….”

“아, 그거?”

나자예프는 멀리 보이는 동쪽 첨탑으로 시선을 향했다가, 재빨리 고개를 털고는 뒷머리를 긁었다.

“뭐 어때. 나한테 그런 것도 아니고.”

“…….”

“사실 나한테 해도 돼. 나 아픈 건 싫어하는데, 사비나가 해 주는 거라면 괜찮을 것 같거든.”

허리를 굽혀 얼굴을 가까이하며 웃어 보이자, 사비나는 움찔 몸을 굳히며 한 걸음 물러났다. 여전히 자신을 경계하는 사비나의 모습에 나자예프는 피식 웃었다.

“농담이야. 네가 그럴 리 없다는 거 알아.”

바르셀다는 사비나가 마을 사람들을 모두 죽일 거라고 말했다. 사비나를 이 마을로 보낸 사람이 알렉세이라면 틀림없이 증거를 인멸하려 들 거라면서. 네나뷔스테도 같은 말을 했던 것이 기억났지만, 나자예프는 믿지 않았다.

‘사비나는 누군가를 해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나자예프는 본래 제가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인간이었다.

저주를 피하고 있었다고는 하나 시간이 멈춘 마을에 남아 있던 영향일까. 나자예프는 주술에도 저주에도 면역이 없었지만 제게 해로운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능력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뛰어났다. 다른 것은 하나도 느낄 수 없는데 나쁜 예감만은 딱 들어맞는다고 할까.

호신용이랍시고 손도끼를 들고 휘두르며 돌아다녔지만, 정작 제가 위험에 처할지도 모르는 남쪽이나, 기분 나쁜 북쪽에는 발을 들이지 않았다.

아무리 나자예프가 신중함과는 거리가 멀다고 해도 겁은 많았으니까.

‘그런데 사비나한테서는 그런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단 말이지.’

사비나가 정말로 위협적인 존재라면, 그녀가 꺼림칙하게 느껴져야 마땅했다. 그러나 나자예프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사비나가 좋았다. 그녀의 외모가 아름답고, 첫사랑인 올가를 닮아서도 있지만, 그보다 좀 더 근본적인 이끌림이라고 할까. 사비나 곁에서는 마음이 편하고, 즐거웠다. 그녀가 외친 한 마디에 오딜의 손바닥에 구멍이 났음에도 그 믿음은 변하지 않았다. 멀어버린 줄 알았던 눈이 나은 이후로는 사비나가 제 이름을 부를 때마다 뱃속이 꾸물거리거나 목이 막히고는 하지만, 그녀의 당황하는 모습을 보건대 절대 일부러 그러는 것은 아니다.

‘이건 사랑의 콩깍지 같은 게 아니야. 내 생존본능은 무엇보다 정확하다고.’

걱정스러운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사비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나자예프가 씩 웃어 보였다.

“웃어, 사비나. 마지막 핵을 흡수하는 날이잖아. 하루의 시작이 기분 좋아야 좋은 운이 이어지지 않겠어?”

“아…….”

“나자예프가 하는 말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가씨. 저 녀석은 원래 깊게 생각하지 않고 아무 말이나 내뱉고는 하니까요.”

“저기, 로스카옌? 나 오늘은 한심한 짓도 안 했는데 왜 새벽 댓바람부터 대뜸 욕이야?”

“자네는 언제나 한심하니까.”

욕인지 농담인지 모를 소리를 주고받으며 로스카옌과 나자예프가 북쪽을 향했다. 사비나는 두 사람을 따라가며 흘긋 뒤를 돌아보았다. 에르잔이 잠들어 있을 교회의 첨탑이 조금씩 멀어졌다. 전소된 창고는 철거를 한 건지 까맣게 탄 흔적만 남고, 무너진 판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늪 속의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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