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 속의 불-110화 (110/189)

111화

21. 되돌릴 수 없는 것

많은 대화가 오가지는 않았다. 사비나는 타인과의 대화에 서툴렀고, 임무 외의 사적인 잡담에 그리 면역이 없는 건 에르잔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에게 지금 제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기분인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유창하게 설명하는 재주는 없었다. 그렇다고 분위기를 유쾌하게 바꾸는 농담도 할 줄 몰랐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답답하지는 않았다.

서로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몰라 말을 더듬거리고, 표현을 고쳐서 다시 말하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눈만 마주하고 있는데도 질리지가 않았다.

사람은 대화를 통해 서로를 알아 가지만, 침묵을 공유함으로써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존재하는 법.

처음엔 제가 말주변이 없어 사비나를 기쁘게 해 주지 못하는 거라며 내심 자책했던 에르잔은 어느새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는 일에도 미안함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시선을 마주하는 것만으로 사비나가 기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으니까.

“이렇게 가까이에서, 이렇게 오래 아가씨를 바라보는 건 처음입니다.”

“나도 그래요.”

사비나가 웃으며 손을 잡아 왔다. 비좁은 침대에 마주 보고 옆으로 누운 까닭에 몸을 움직일 수 있는 범위는 제한되어 있으니 불편해야 할 텐데 이상하게 편안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고 싶지 않아서 그렇다는 사실을 자각한 것은 한참 후였다.

늘 부지런하게 방을 청소하고 사비나가 먹을 식사를 준비하고, 주위를 정찰하며 길가의 잡초를 뽑고 자갈을 골라내던 에르잔은 의외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황>이 그렇게 이상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확히는 조바심을 내지 않게 되었다고 할까. 해야 하는 일이 없어도, 홀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볼 필요는 없다. 눈앞에 사비나가 있으니까. 그저 얼굴을 마주 보고, 그녀의 눈이 깜박일 때마다 긴 속눈썹이 내려갔다 올라오며 새까만 눈동자에 에르잔의 모습이 비치는 것과, 촉촉한 입술이 벌어지며 따스한 숨을 내뱉는 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행복해졌다.

“콘바야젠 백작께서 아가씨를 이 마을에 보내셨을 때는, 뭔가 일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름인데도 쾌청한 하늘이나 눈 부신 햇살과는 거리가 먼 우중충한 산골 마을. 높다란 사철나무로 빽빽하게 둘러싸인 까닭에 한낮에도 빛이 드는 장소보다 빛이 들지 않는 장소가 더 많은 이상한 곳. 폐가가 줄지어 늘어져 있고, 가축우리는 텅텅 빈 지 오래에, 농사를 짓기는 하는 건가 싶을 만큼 누런 잡초만 무성했던 이 마을은 도저히 환자가 요양을 할 만한 곳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런데……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아가씨께서는 확실히, 처음 뵈었을 때보다 상태가 좋아지셨습니다.”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손이 닿으면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하고, 가까이 가면 기겁하며 멀어지고, 잔뜩 몸을 웅크리며 시선도 대화도 접촉도 거부하던 사비나가 지금은 그와 이렇게 서로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거리에서 몸을 맞대고 있다.

사비나가 말을 어물거리거나 주어를 생략한 단답형으로 대답했던 건 어휘력이 부족해서도 지능이 떨어져서도 정신에 이상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그녀는 사실 누구보다도 대화를 좋아하는 인간이었다.

“에르잔이 있으니까요.”

“제가 더 아가씨를 잘 모셨어야 했는데…….”

“이제부터 잘하면 되잖아요.”

괜찮다. 충분히 잘해 줬다. 늘 들어왔던 말과는 달리, 이제부터 잘하면 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사비나는 배시시 웃으며 에르잔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가 사비나의 옆머리를 넘겨 주고 뺨을 쓰다듬어 주자, 사비나는 살짝 고개를 돌려 에르잔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간지러운 자극에 피식 웃음이 나와, 에르잔도 미소 지었다.

“사비나 아가씨. 식사를 하지 않으셔도 되겠습니까?”

“아까 먹었잖아요. 에르잔, 배고파요?”

“아닙니다. 아가씨께서…….”

“나는 에르잔 얼굴만 봐도 배가 부른데.”

누가 들어도 농담이라고 생각할 말을 진심으로 건네면서, 사비나는 에르잔의 손바닥에 쪽쪽 잔키스를 퍼부었다. 그에게 닿는 것이 좋아서 견딜 수 없다는 듯이 비비적거리며 품으로 파고들면서도, 에르잔이 몸을 일으키려 하면 정색하며 붙잡아 도로 눕게 했다.

“에르잔은 부상자잖아요. 움직이지 마세요. 푹 쉬는 게 최고라고요.”

“아가씨. 하지만…….”

“또 흥분해서 그래요? 내가 만져 줄까요?”

“……아닙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에르잔의 허리를 쓰다듬으며 아래로 내려가는 손을 부여잡자, 그녀가 눈을 가늘게 하고 웃었다.

“나는 에르잔을 만지는 것도, 에르잔이 나를 만져 주는 것도 정말 좋아해요.”

“사비나 아가씨…….”

“온종일 둘이서 이러고만 있었으면 좋겠다. 그쵸?”

사비나의 질문에 에르잔은 대답하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어색함과 수줍음을 동반한 반응에 다시 웃음을 터뜨린 건 사비나였다.

“휴식이 필요하다는 거, 정말이었나 봐요. 기분 좋아…….”

조용한 것에 익숙했으나, 사비나는 고독을 즐기는 성격이 아니었다. 오히려 불편하지 않을까 싶을 만큼 에르잔에게 밀착해 있기를 원했다. 질리지도 않는지 한참을 뚫어져라 얼굴을 바라보고, 뭐 달라진 것도 없는데 신기하다는 듯이 눈을 깜박였다.

이따금 손을 들어 에르잔의 뺨을 만지거나, 어깨를 쓰다듬거나, 가슴을 천천히 쓸어내리고는 눈가를 붉히며 웃기를 반복했다. 오가는 대화의 양은 분명 처음 만났을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는데, 어느새 에르잔도 사비나도 별다른 대화 없이 함께 있는 것을 어색하게 여기지 않게 되었다.

부모도 형제도 없는 에르잔은 문득 가족이 있다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하고 막연히 생각했다.

“사비나 아가씨. 이틀 후에 북쪽으로 간다고 하셨습니까?”

“네. 로스카옌 신부님이 데려다주겠다고 하셨어요. 북쪽의 핵을 품고 있는 사람을 설득해 만날 자리를 잡았다면서.”

그날 밤 로스카옌이 자리를 비운 건 마을의 북쪽에 다녀왔기 때문인가. 그런 줄도 모르고 열심히 마을의 동쪽과 서쪽을 돌아다니며 로스카옌을 찾았을 나자예프와 바르셀다를 생각하니 조금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으나 딱 거기까지였다. 에르잔은 나자예프도 바르셀다도 교회에 다시 찾아오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정확히는 거기까지 생각이 닿지 않았다.

그날 부상을 입은 오딜이 어쩌고 있을지, 카이라트가 무엇을 꾸미고 있을지, 카밀라라면 지금 당장 사비나를 부르러 와도 이상하지 않은데 왜 오지 않는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떠올랐다가 금세 흩어졌다.

“제가 함께 가야 하는데…….”

“마을 북쪽은 위험하지 않댔어요. 저주의 핵을 품은 사람도 바르셀다나 네나뷔스테처럼 괴로워하는 상태는 아니라서, 충분히 대화가 가능할 거라고 하시던걸요.”

마을 북쪽에 남은 핵은 <체념>의 핵이라고 했던가. 나자예프는 그곳을 <살아 있는 시체들의 공간>이라며 가까이 가는 것조차 껄끄러워했지만, 그만큼 무기력하고 우울해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면 공격적인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북쪽에는 거의 여자들만 모여 산다고도 들었고.

“사비나 아가씨. 북쪽의 핵을 흡수한 뒤에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

이번에는 사비나가 시선을 피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에르잔의 가슴에 의미불명의 동그라미를 그리며 뱅뱅 돌리다가 가만히 주먹을 쥐었다.

원래는 네 개의 핵을 흡수하고 마을 사람들을 저주로부터 구하고 나면, 죽을 작정이었다. 불사신인 그녀가 정말로 죽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에르잔의 정화의 불꽃에 타서 사라진다면 그것도 좋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어느새 사비나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죽음이 두려워서는 아니다. 죽으면 더는 에르잔을 만날 수 없는 것이 싫어서였다. 눈에서 빛이 사라져 그의 얼굴을 볼 수 없게 되는 것이 무섭고, 청각을 잃어 그의 음성을 들을 수 없게 되는 것이 무섭고, 감각이 사라져 그를 느낄 수 없게 되는 것이 지독히 두려웠다.

“아페티트를 아직 붙잡지 못했거든요. 그 사람을 찾으려고요.”

시간이 멈춘 마을에서는 어지간한 부상을 입어도 금방 회복하지만, 사비나가 네 개의 핵을 흡수해 멈춰 있던 시간을 원래대로 되돌리면 이제 부상으로 인한 고통이나 회복 속도도 평범한 사람과 똑같이 될 것이다. 크게 다치면 죽을 수도 있고, 평생 벗어나지 못하는 후유증이 남을 수도 있다.

사라진 아페티트를 내버려 두고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는 사비나의 목을 베었고, 카이라트의 눈과 혀에 상처를 입혔다. 시체를 조종하고자 했으나, 그것이 생각보다 힘들어 살아 있는 사람에게 주술을 심어 조종하는 쪽으로 방법을 바꾸었다고 했던가. 아페티트를 붙잡아 더 이상 저주를 걸 수 없는 몸으로 만들거나, 다른 대비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백작가로 돌아가실 생각이신지요?”

콘바야젠 백작가. 그녀가 돌아가야 할 장소. 아버지가 있는 곳.

사비나는 몸을 웅크렸다. 에르잔이 저주에 해를 입지 않는 체질이라 잠시 잊고 있었다. 마을의 저주를 흡수하면서 사비나의 저주의 힘은 더욱 강력해졌다. 이대로 콘바야젠 백작가에 돌아가면, 그녀는 더욱 강력해진 죽음의 화신으로서 아버지의 정적을 제거하는 데 이용당할 것이다.

“모르겠어요. 거기까지는 생각하지를 않아서…….”

원래는 죽을 셈이었다. 그러기를 바랐다. 에르잔의 정화의 불꽃에 타서, 비록 사라지지는 않더라도 어딘가에 숨어 영원히 고통 속에 몸부림치는 것이 이제까지 저질러 온 죗값을 치르는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죽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막막해졌다.

'죽지 않으면……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사비나는 이제까지 단 한 번도 미래를 그려 본 적이 없었다. 어제도 오늘도 사람을 죽여 왔으니 내일도 살인을 하게 되리라는 인식만이 그녀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사람을 죽이지 않아도 되는 미래. 자신이 살아 있어도 되는 미래는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에르잔은 황궁으로 돌아갈 거죠? 임무를 완수했으니 분명 공을 치하받을 거예요.”

“제 임무는 아가씨를 지키는 것입니다. 아가씨께서 귀환을 바라지 않으시는데 제가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어쩌려고요? 도망이라도 치려고요?”

“불편하지 않게 모시겠다는 말씀은 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허락하신다면…….”

“안 돼요.”

이 제국이 얼마나 넓은지는 모르지만, 황제의 대리인인 콘바야젠 백작의 권력이라면 젊은 남녀 두 사람을 찾아내는 것쯤은 일도 아닐 것이다. 사비나 혼자라면 아무도 다가올 수 없는 죽음의 늪을 만들어 그 속에 잠겨 있을 수 있지만, 에르잔은 평범한 인간이 아닌가. 세끼 밥을 먹고 잠을 자며 이동을 하려면 흔적이 남을 터인데, 아버지를 상대로 언제까지 도피 생활이 가능할지 알 수가 없다.

아버지가 보낸 사람들을 상대하다가 에르잔이 다치기라도 하는 날에는, 사비나는 도망치려 한 것을 죽기보다 후회할 것이다.

“나도 에르잔에게 좋은 걸 주고 싶거든요.”

“예?”

“귀찮고, 성가시고, 불명예스럽고…… 그런 거 말고. 뭔가 멋진 거. 근사한 거.”

그녀의 수발을 들거나, 가사 노동을 하거나, 민간인을 상처 입히는 그런 일이 아니라.

기사로서 명예로운 일, 황실의 기사로서 남들의 부러움을 사는 그런 일을 시켜 주고 싶었다.

아마 사비나가 무사히 저택으로 돌아간다면 아버지는 분명 에르잔의 공을 치하하며 그에게 상을 줄 것이다. 황궁에서는 그의 존재가 위협이 되니 어디 변방으로라도 보내 버리겠지만, 에르잔에게는 오히려 그쪽이 나을 터였다.

재물과 영지와 작위를 받고, 변방에서나마 에르잔이 편안하게 살 수 있다면.

‘다른 사람의 목숨을 이용한 대가는 나 혼자 지고 가면 돼. 나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어.’

좋아하는 남자를 위해서 하는 일이 사람을 죽이는 일밖에 없다니 자신이 한심스럽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사비나에겐 미래가 없었고, 그녀는 에르잔이 죽거나 다치거나 불행해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면 결국 백작가로 돌아가 다시 저주의 화신으로서 사람을 죽이는 일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 걸까.

‘난 역시 나쁜 사람인가 봐.’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다고 그렇게 외치던 주제에, 지금 사비나는 수많은 타인의 목숨보다 에르잔의 안전을 더 위에 두고 있다. 사비나는 가만히 한숨을 흘리며 에르잔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요. 에르잔은 에르잔이 원하는 일을 하면 돼요.”

늪 속의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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