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 속의 불-109화 (109/189)

110화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던 적이 있다.

아버지인 콘바야젠 백작은 늘 사비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더없이 다정한 얼굴로, 더없이 잔인한 명령을 내렸다.

그런 사비나에게 사랑이란 불편한 감정이었고, 욕정은 더러운 것이었다.

누군가 제게 호의를 보이면 어색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카밀라가 저를 친구처럼 대할 때마다, 사비나는 어색해서 멀어지고 싶은 마음과 카밀라를 밀어내서 상처 입혀서는 안 된다는 마음 사이에서 갈등했다.

카밀라가 사비나에게 호의를 보이고, 가까이 다가오고, 그녀를 신뢰하는 말을 할 때마다 무거운 죄책감이 가슴을 짓누르며 자존감을 깎아 먹었다.

에르잔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고, 살을 맞대고 싶은 충동과, 자신과 같은 저주의 화신이 그를 탐내서는 안 된다는 정의 사이에서 갈등했다.

에르잔이 다가오면 기쁜 한편으로 불안하고, 밀어내도 되돌아오는 그를 마주했을 때는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감정에 혼란해졌다.

에르잔을 좋아하지만, 함께 있고 싶지만, 그건 자신의 욕심일 뿐이라고. 그러니 단념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려놓고도 미련을 버리지 못해 계속 그의 곁에 남아 있었다.

에르잔의 다정함에 기대어, 그의 순수함을 이용하는 자신에게 환멸을 느끼면서도, 함께 있는 순간의 달콤함에 중독된 것처럼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울면서도 그의 손을 붙잡고, 미안하다고 사과하면서도 그에게 안겼다.

“에르잔. 나는…….”

나는 당신이 좋아해도 되는 사람이 아니라고.

당신은 지금 속고 있는 거라고.

나에겐 그런 고백을 들을 자격이 없다고.

그렇게 말해야 하는데, 갑자기 입술이 파르르 떨리더니 울음이 터져 나왔다. 당혹스러워하는 에르잔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사비나는 억누른 신음을 흘리면서 어깨를 떨었다.

“에, 에르잔…….”

“사비나 아가씨. 왜 그러십니까?”

“……더…….”

“예?”

“한 번 더…… 말해 줘요…….”

마치 사냥꾼에게 쫓기다 겨우 동굴로 돌아온 어린 짐승처럼 사비나가 몸을 웅크리며 에르잔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춥지도 않은데 어깨가 덜덜 떨려 왔다. 입술을 깨물지 않았더라면 이가 딱딱 부딪혔을지도 모른다. 사비나는 눈을 감고, 에르잔의 심장 고동에 집중했다. 격렬하게 뛰는 뜨거운 소리가 마치 그녀에게 화를 내는 듯해, 덜컥 겁이 나 손으로 밀어내며 몸을 떼어 냈다.

그러나 단단한 팔이 다시금 그녀를 넓은 품으로 끌어당겼다.

“아가씨를 좋아합니다.”

“…….”

“저는 사비나 아가씨를 좋아합니다.”

에르잔은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좋아한다>고 말하면서도, 그는 호감의 종류가 얼마나 다양한지 파악하지 못했다. 맛있는 음식을 배부르게 먹는 것이 좋고, 편안한 침대에서 자는 것이 좋지만, 그 좋은 감정과 사비나에게 느끼는 감정은 달랐다.

분명 다른데도, <좋아한다>고 느꼈다.

“사비나 아가씨를 좋아합니다.”

“에르잔. 한 번 더…….”

“당신을 너무 좋아합니다.”

그저 앵무새처럼 똑같은 말을 반복할 뿐인데도 가슴이 벅차올라, 에르잔은 사비나를 꽉 끌어안았다. 사비나가 덫에 걸린 짐승처럼 버둥거렸으나 그것은 에르잔을 밀어내기 위한 행동이 아니었다. 너무도 격렬한 감정을 느꼈을 때 몸이 반사적으로 일어나는 반응이다. 사비나의 과거에 대해서는 몰라도, 그녀의 정체에 대해서는 몰라도, 그녀의 몸에 대해서만큼은 잘 안다고 자신하는 에르잔은 천천히 사비나의 등을 쓰다듬었다.

“나…… 내가, 나쁜 사람이라고 했잖아요.”

“그래도 좋습니다.”

“당신을 속이고, 거짓말을 하고, 이용하고…….”

“몇 번이든 속아 드리겠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나는 저주받은 몸이에요. 에르잔은 괜찮지만…… 이 마을 사람들은 저주에 익숙해서 큰 사고가 없었지만, 보통은 내게 닿으면 저주에 걸려요.”

사비나는 훌쩍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요. 아니, 내가 많은 사람들을 죽였어요.”

“……아가씨.”

“가문의 영광을 위해서, 아버지를 위해서 나는 사람을 죽여왔어. 살인자로…… 학살자로, 계속…….”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음에도 에르잔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사비나가 안쓰러워, 그녀를 달래 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더욱 부드럽게 등을 쓰다듬었다. 정수리에 입을 맞추고 뜨거운 숨을 흘려내자, 사비나가 윽, 하고 작게 신음하더니 긴 숨을 토해 냈다.

“나는 바보예요. 도망쳐야 했는데, 어떻게 하면 도망칠 수 있는지 몰라서 그냥 그대로 갇혀 있었어요.”

“사비나 아가씨.”

“죽었어야 했는데, 죽을 방법을 찾지 못해서 그냥 손을 놓고 있었어요. 목을 매도 칼로 찔러도 죽지 않으니까 쉽게 포기했어요.”

“아가씨.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나는 멍청하고, 게으르고, 겁도 많아서…… 목을 잘랐더라면, 죽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러지를 못했어요.”

“사비나 아가씨!”

너무 쉽게 죽음을 입에 담는 그녀의 말에 놀라 어깨를 붙들고 얼굴을 마주하자, 사비나의 감은 눈에서 투명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긴 속눈썹이 떨리며, 간신히 눈을 뜬 사비나의 검은 눈동자에 에르잔의 당황하는 얼굴이 비쳤다.

“사비나 아가씨. 죽어야 한다니, 그런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어떻게…….”

“나, 나는 나쁜 사람이라고 했잖아요. 죄를 많이 지어서…… 벌을 받아야 하는데…….”

사비나가 에르잔을 밀어내려는 듯이 손을 움직였다. 그의 넓은 가슴에 붉은 손톱자국이 사선으로 그어졌으나 에르잔은 사비나를 놓지 않았다.

“마을의 저주를 전부 흡수하고 나면, 죽은 듯이 혼자서 살려고 했어요. 아버지의 눈을 피해서…….”

에르잔의 정화의 불꽃에 타 죽고 싶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고, 사비나는 말을 얼버무렸다.

에르잔이 놀랄까 봐 그런 것은 아니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자신을 좋아한다는 그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때까지 조금만, 잠시만…… 당신을 속이자고 생각했어요. 에르잔이 옆에 있었으면 해서…….”

그가 또 자신 때문에 다칠지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의 곁에서 에르잔은 불행해질 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기적으로 그를 붙잡았다.

로스카옌의 말에 구원이라도 받은 것처럼 기대어 에르잔에게 매달렸다. 일종의 자기기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분명 조금만 욕심을 내려고 했는데, 그게 안 돼요. 멈출 수가 없어…….”

마을의 저주를 풀 때까지만 함께 있자. 저주를 흡수할 수 있는 조금 수상하고 이상한 여자지만, 그의 호위를 받는 처지니까 조금은 이기적으로 굴어도 되지 않을까. 에르잔도 그녀에게 봉사하는 일에서 보람을 느끼지 않을까. 그녀와 몸을 겹치면서 성적인 쾌감과 만족감을 얻지 않을까.

그러니까 조금은 더 그를 속여도 좋지 않을까.

자신의 욕심을 위해 그를 이용해도 좋지 않을까.

너무나도 좋아하는 에르잔을, 기만하며 상처입혀도 되지 않을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욕심을 부렸다.

“에르잔이 나를 원했으면 좋겠어. 나를 좋아했으면 좋겠어. 내가…… 내가 살인마에 학살자에 저주받은 죽음의 화신이라는 걸 알아도, 계속 내 옆에 있어 줬으면 좋겠어. 내게 닿는 걸 싫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가 만지는 걸 거부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에르잔이…… 에르잔이, 진짜 나를 알고도 여전히 좋아한다고 말해 줬으면 해요…….”

정리되지 않은 말이 조각난 채로 흘러나와 가슴을 찔렀다.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가장 아름답고 단정한 모습만을 보여도 모자란 것을, 제 가장 추악한 면을 드러내놓고 감히 애정을 요구하다니. 뻔뻔하다는 것을 아는데도 끝을 모르는 탐욕이 그녀의 목에 핏대를 세우고 욕망을 외친다.

어떤 자신이라도 그가 받아들여 주기를 바란다고.

“말해 줄 수 있어요?”

“…….”

“진짜 나를 알고도, 나를 좋아한다고 말해 줄 수 있어요?”

등을 감싸고 있던 에르잔의 손이 멀어지더니, 침대 시트에 몸이 억눌렸다. 에르잔의 얼굴이 너무 가까워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잘 파악할 수가 없었다. 다만 숨이 멎을 만큼 깊은 눈동자가 그녀를 주시하고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커다란 혀가 사비나의 입술을 핥았다. 따끔한 감촉과 함께 비릿한 피 냄새가 풍겼다.

분명 정신없이 떠들어 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언제 그렇게 씹어 댔는지 제 입술이 피투성이였다.

“좋아합니다.”

사비나의 피로 붉게 물든 남자의 입술이 아주 느리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또박또박. 한마디 한마디를 새기듯이.

“사비나 아가씨. 당신이 어떤 사람이든, 저는 당신을 좋아합니다.”

“내가 살인을 했는데도?”

“그래도 좋아합니다.”

“나 때문에 황태자 전하가 죽었어요. 황제 폐하가 칩거한 것도 그래서고. 당신이 충성을 바쳐야 하는 황실을 어지럽힌 게 바로 나라고요.”

“제가 충성을 바쳐야 하는 상대는 사비나 아가씨, 바로 당신입니다.”

에르잔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어쩌면 그녀에게 바치는 것이 충성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진작 날아가 버렸다.

사비나의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다른 건 아무래도 좋았다.

변절을 하든, 죄를 저지르든, 무슨 짓을 해서라도.

그의 생애에 처음으로 허락된 <있을 자리>를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아가씨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당신 곁에는, 저만 두셨으면 합니다.

차마 그 말만은 뱉지 못하고, 에르잔은 사비나의 눈가에 입을 맞추었다.

늪 속의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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