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탄탄한 남자의 상체 위로 부드러운 여체가 엎어지더니, 말캉한 두 개의 살덩어리가 아무렇게나 짓눌려 뭉그러지는 느낌이 들었다. 익숙해지려야 익숙해질 수가 없는 자극적인 감촉에 헉, 에르잔은 숨을 삼켰다. 바닥에 부딪힌 등에서 느껴지는 통증보다 제 가슴에 느껴지는 따스하고 말랑말랑한 감촉이 더욱 선명하다는 게 황당할 따름이었다. 에르잔이 긁힌 신음을 내며 고개를 돌리자, 사비나가 허겁지겁 상체를 일으켰다.
“미안해요, 에르잔! 내가……!”
정신없는 와중에도 사과부터 하고 보는 사비나의 말을 자르듯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에르잔. 무슨 일인가?”
문밖에서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공은 로스카옌 사제였다. 그저 안부를 묻는 단조로운 목소리였으나 두 남녀가 움찔 굳는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그도 그럴 듯이, 지금 두 사람의 모습이 오해받기 딱 좋은 상황이었으니까.
부상 치료를 받고 잠든 에르잔과 알몸의 사비나가 함께 뒹굴다 침대에서 떨어진 모습은 모로 보아도 건전하거나 자연스러운 상황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떻게 설명해도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 뻔했다.
이전에도 사비나는 에르잔과 정사 후에 로스카옌을 마주친 적이 있으니, 그가 두 사람의 관계를 모르지는 않겠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달랐다.
게다가 에르잔은 그조차도 모르고 있었으니.
“에르잔?”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로스카옌의 목소리에 심장이 쿵 내려앉는 느낌이 들어, 에르잔은 입안을 깨물었다.
차라리 정말로 엄한 짓을 하는 중이었더라면 억울하지라도 않을 것을!
머릿속으로 어처구니없는 상상이 스쳐 갔으나 에르잔은 입을 열지 못했다. 딱딱하게 굳은 에르잔의 푸른 눈과 난처한 표정의 사비나의 검은 눈이 서로의 모습을 불안하게 비추었다.
“에르잔. 들어가겠네.”
방문을 두드리던 로스카옌의 노크 소리가 멈추고 문고리를 잡아 돌리는 소리가 들리자, 사비나가 다급하게 가로막았다.
“들어오지 마세요!”
막 열리기 직전이었던 문이 그대로 멈추더니, 돌아갔던 문고리가 원래대로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느리지만 뭔가 대단히 유감스러움을 표하는 한숨이 들리더니, 발소리가 조금 멀어졌다. 분명 문이 닫혀 있는데, 로스카옌이 황당한 얼굴로 방 안의 두 사람을 향해 눈살을 찌푸리는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아차!’
그제야 사비나는 제가 실수했음을 알아차렸다.
로스카옌이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면 에르잔에게 말리게 했어야 했는데 당황해서 그만 제가 먼저 소리를 내고 말았다.
분명 혼자서 잠들었을 에르잔의 방에서 사비나의 목소리가 들렸다는 것만으로도 기함할 일인데, <들어오지 말라>는 말까지 들었다.
로스카옌이 방 안에서 있었을 일을 어떻게 오해한다고 한들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건 명백했다.
“아니, 저기…….”
“……식사는 문 옆에 놓아두겠습니다. 기도실에 있을 테니 용무가 있다면 불러 주십시오.”
로스카옌은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고했다. 그러나 그의 음성에 설명할 수 없는 곤혹스러움과 불유쾌함이 섞여 있다고 느끼는 건, 두 사람의 마음에 켕기는 점이 있기 때문일까. 사비나도, 에르잔도 입을 열지 못했다.
대답조차 듣지 못했음에도 로스카옌 사제는 다시금 보채는 일 없이 큼, 하고 목을 가다듬고는 기도실로 향했다. 평소에는 걷는 소리가 그리 크지 않았는데, 멀어지는 발소리가 똑똑히 들리는 것으로 보아 두 사람을 확실하게 안심시켜주기 위한 의도적인 행동으로 보였다.
그래서 더욱 부끄러웠다.
사비나가 붉어진 얼굴을 어쩌지 못하고 가만히 굳어 있는데, 에르잔이 조용히 그녀를 불렀다.
“사비나 아가씨.”
“아…….”
흠칫. 하얀 어깨가 떨리더니 가녀린 목을 타고 검은 머리카락이 흘러 떨어졌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제 가슴을 간질이는 감각에 에르잔이 가볍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가 깊이 숨을 내쉬었다. 사비나가 걸터앉은 에르잔의 복근이 꿈틀거리더니 허리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에르잔. 아직 움직이면 안 돼요.”
“하지만 아가씨께서…….”
“내, 내가 일어날게요. 무리하지 마세요.”
에르잔이 몸을 긴장시키며 그녀로부터 벗어나려는 듯이 움찔거리는 것이 부상 때문이라고 착각한 사비나는 얼른 몸을 일으켰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도로 고꾸라졌다.
“아윽!”
“아, 아가씨!”
에르잔의 위에 도로 엎어진 사비나가 작게 신음하며 고개를 털자 에르잔의 심장이 크게 울리더니 커다란 손이 가느다란 허리를 부여잡았다. 사비나가 놀라 자세를 고칠 틈도 주지 않고, 에르잔은 사비나를 번쩍 들어 올려 침대 위에 앉혀 주고는, 재빨리 몸을 뒤집었다.
치료를 했다고는 해도 여전히 상처 자국이 그득한 넓은 등을 본 사비나의 표정이 흐려졌다.
“미안해요, 에르잔. 당신이 등을 다쳤는데, 내가 괜히 상처를 건드려서…….”
“아닙니다, 사비나 아가씨. 저는 괜찮습니다.”
목소리가 떨리는 것만 보아도 전혀 괜찮지 않은 것 같은데, 에르잔은 사비나로부터 등을 돌린 채로 재빨리 침대 옆을 벗어났다.
“에르잔. 그렇게 움직이면 안 돼요. 당신이 침대에 누워야죠.”
“저는 괜찮습니다. 아가씨께서 준비를 마치실 때까지…… 이러고 있겠습니다.”
준비라니. 무슨 준비?
제가 알몸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도 그게 무슨 문제인지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사비나는 뒤늦게 에르잔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얼굴을 붉혔다.
'미쳤나 봐.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부상을 입은 에르잔이 걱정돼서, 그가 자다가 아프면 홀로 괴로워할까 봐 방에 들어온 거였는데. 들어올 때는 얼굴만 보고 갈 셈이었는데 잠든 에르잔의 얼굴을 보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결심이 흐물흐물하게 무너졌다. 그의 곁에 있고 싶어서, 규칙적인 숨소리와 따스한 체온이나마 가까이서 느끼고 싶어서 침대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잠들었다.
거기에서 그쳤더라면 그나마 변명이라도 할 수 있었을 것을, 사비나는 지금 알몸이었다.
‘내가 왜 옷을 벗었지? 미친 거 아냐?’
뒤늦게 후회해 봐야 이미 일은 벌어졌다. 사비나는 에르잔이 보고 있지도 않은데 얼굴을 가렸다가 가슴을 가렸다가 우왕좌왕하다가, 침대 시트 밑에 말려 들어간 나자예프의 로브를 발견하고는 얼른 주워 들어 몸에 걸쳤다.
“에르잔. 미안해요. 내가 그만, 잠결에…….”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야말로 아가씨께서 불편하게 주무시는 줄 모르고 있었습니다. 더 일찍 일어나서 아가씨를 눕혀 드렸어야 했는데.”
“아니에요. 에르잔은 환자잖아요? 내가 당신 침대를 뺏을 수는 없죠. 그러니까…….”
자신은 방에서 나갈 테니 얼른 에르잔이 침대 위로 올라오라고 할 셈이었는데, 에르잔의 커다란 덩치가 침대에서 문으로 향하는 길을 가로막고 있어서 사비나는 침대에서 일어났다가 도로 주저앉았다.
“에르잔. 당신이 거기 누워 있으면 내가, 나갈 수가 없는데요…….”
“…….”
에르잔은 대답이 없었다. 대신 뭔가 굉장히 곤란한 듯한 숨소리가 흘러나오더니, 그가 몸을 움직여 완전히 벽에 붙였다. 등을 돌리고 있었기에 표정은 보이지 않고 상처만 똑똑히 보여, 사비나는 차마 그를 마주하지 못하고 시선을 돌렸다.
“에르잔. 저기…….”
“죄송합니다, 사비나 아가씨. 잠시만…… 잠시만 이대로 있겠습니다.”
“상처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바닥에 눕지 말고 침대에 누워야죠. 혼자서 일어나기 힘들면 내가 도울게요.”
사비나의 힘으로는 에르잔을 부축하는 것도 버겁지만 그가 부상자인 이상 가만히 놀고 있을 수는 없었다. 사비나가 침대에서 일어나 다가오자, 에르잔이 당황한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가, 가까이 오지 마십시오!”
“네?”
거미도 아니고, 완전히 벽에 몸을 딱 붙이고 옆으로 누운 에르잔이 허리를 바짝 긴장시키더니 반쯤 내려간 속옷을 다급하게 올리는 것이 보였다. 상처에 정신이 팔려 있던 사비나는 그제야 에르잔이 속옷만 입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것이 반쯤 내려간 이유가 자신이 잠결에 그에게 말하기 부끄러운 행동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도.
등을 돌리고 있음에도 에르잔의 귀 끝이 붉게 물든 것이 똑똑히 보였다.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사비나의 양 뺨도 같이 달아올랐다.
“에르잔. 미안해요…….”
“사비나 아가씨께서 사과하실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내가, 에르잔에게 그런…… 이, 이상한 짓을, 해서…….”
에르잔의 의사도 묻지 않고 그의 몸을 마음대로 만진 것도 모자라, <싫어해도 하겠다>며 그를 희롱하다니. 꿈인 줄 착각했다는 것조차 변명이 되지 않을 만큼 파렴치한 행동을 했다. 사비나는 울 것 같은 얼굴로 두 손을 모아쥐었다.
“정말로 미안해요. 내가 방금 어떻게 되었나 봐요. 에르잔을 불쾌하게 하려던 게 아닌데…… 미안해요…….”
“……아닙니다.”
“내 잘못이잖아요. 사과할 일이 아니라고 말하지 마세요. 이젠 안 해도 된다고, 참을 수 있다고 그래놓고 내가 말을 번복했어요. 이런 염치없는 행동을 하고도 용서조차 빌지 않고 넘어갈 만큼 나는 뻔뻔하지 않다고요.”
“그게 아니라…….”
에르잔이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가 건너편에 앉아 있는 사비나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불쾌하지 않았습니다.”
“……네?”
“기분…… 좋았습니다…….”
커다란 덩치만큼이나 명료하게 말하던 호위기사는 어디로 가고, 에르잔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커다란 손으로 제 얼굴을 감쌌다.
“그러니까 사과하지 않으셔도…… 아니. 사과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에르잔?”
사비나의 부름에 에르잔이 간신히 휴우,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약간 돌렸다.
새파란 눈동자와 완전히 대조되는 붉게 물든 뺨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에르잔이 다시 말했다.
“사비나 아가씨께서 제게 닿는 것을, 불쾌하게 여겼던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늪 속의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