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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 속의 불-107화 (107/189)

107화

20. 이 감정에도 이름이 있을까

에르잔이 잠에서 깬 시각은 아직 아침 해가 떠오르기도 전인 새벽이었다.

새벽이라면 추워야 하는데 묘하게 손과 얼굴 가까이에 온기가 있는 것 같았다. 아직 피로가 가시지 않아 무거운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린 에르잔은, 제 코앞에 사비나의 얼굴이 있는 것을 마주하고 경악했다.

다만 소리를 지르지는 않고, 갑자기 몸을 일으키지도 못하고, 등의 상처에 발라 댄 마취제 탓에 근육이 뻣뻣하게 굳은 느낌이 들어 불편한 듯 어깨만 움찔거렸을 뿐이다.

‘사비나 아가씨가 왜? 왜 여기 계시는 거지?’

어젯밤 로스카옌에게 치료를 받고 거의 강제로 수면에 빠지다시피 했는데, 눈을 뜨니 편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어야 할 사비나가 침대 가에 쪼그리고 앉아 시트에 고개를 기대고 졸고 있었다.

‘혹시 나를 걱정해서 계속 여기서 지켜보신 건가?’

에르잔이 자신 때문에 다쳤다며 서럽게 울던 사비나의 얼굴이 떠올라, 문득 가슴이 술렁였다.

안쓰러운 감정이 가슴 속을 찌르르 맴도는 것이 느껴져, 에르잔은 사비나의 손 아래서 조심스럽게 제 손을 빼내 그녀의 손등을 덮었다.

커다란 손 아래 그녀의 하얗고 가느다란 손이 쏙 감춰졌다. 에르잔은 제 손등에도 생채기가 가득 나 있는 것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아가씨께 걱정을 많이 끼쳤어.’

에르잔 자신은 사비나의 호위로서, 온몸을 던져서라도 그녀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에 부상을 무릅쓰고 달려들었지만, 결과적으로 사비나를 울리고 말았다.

사비나가 자신을 걱정하는 것이 기쁘고, 그녀가 자신 때문에 우는 모습을 보는 것이 이상하게 설레는 것과는 별개로, 그녀에게 미안한 감정과 함께 애틋함이 퐁퐁 솟아올랐다.

‘아가씨께서 편히 잠드시도록 눕혀 드려야 하는데, 그러다 깨지 않으려나.’

에르잔은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머리만 침대에 기대고 있는 사비나를 안아 눕혀 주고 싶었다. 부상 때문에 몸 상태가 평소와 다르긴 했으나 사비나 한 사람을 안아 침대에 뉘어 주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사비나를 일으키다가 그녀가 깨어나기라도 하면, 자신 때문에 에르잔이 쉬지도 못한다며 또 자책할 것이다.

‘어쩌지…….’

에르잔은 잠시 고민하다가, 뺨을 타고 입술까지 흘러내린 긴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집어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으응…….”

사비나가 작게 신음했다.

혹시 제가 그녀를 깨웠나 싶어 에르잔의 손이 움찔 굳었다.

그러나 사비나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고, 제 귓가에 닿은 손은 온기를 더 가까이서 느끼고 싶다는 듯이 머리를 들이밀었다.

새끼가 어미를 찾는 것처럼 동물적인 행동이었다.

어쩐지 그녀가 딱하게 느껴져 천천히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사비나의 입술이 벌어지며 안도하는 듯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에르잔…….”

체온만으로도 누구인지 알 수 있는 걸까.

아니면 그저 평범한 잠꼬대인 걸까.

잠든 그녀를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는 걸 아는데도, 자꾸 만지고 싶어 에르잔은 충동적으로 사비나의 뺨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좋아…….”

그의 손바닥이 따뜻해서 좋다는 뜻일까?

잠을 깨우면 어쩌나 고민하면서도, 사비나가 기분 좋게 신음하는 모습을 보니 손을 멈출 수가 없었다.

에르잔의 손끝이 사비나의 부드러운 입술 선을 덧그리듯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내려오자, 촉촉한 입술이 벌어지더니 단단한 손끝을 폭 감쌌다.

“헉……!”

“우응…….”

뭔가 입가에 닿으니 본능적으로 삼킨 것인지, 사비나는 에르잔의 손가락을 감싸 쪽쪽 빨기 시작했다.

아니, 처음에는 입술로 빨다가, 혀끝으로 슬슬 문지르더니 작은 치아로 깨물기 시작했다.

아프다기보다는 간지러움에 가까운 그 감촉을 느끼면서 에르잔은 당황했다.

그러고 보니 밤새 사비나는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새벽에 뭐라도 먹였어야 했던 것이 아닐까.

사비나의 행동을 배 속이 허기진 까닭으로 받아들인 에르잔은 그녀의 입속에서 얼른 손가락을 빼고 몸을 일으켰다.

등줄기가 단단하게 굳어 근육을 꽉 당기는 느낌이 들었으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통증은 없었다.

에르잔은 침대에서 내려와 사비나의 어깨를 감쌌다. 그녀를 흔들어 깨울 셈이었는데, 사비나는 에르잔이 어깨를 감싸 일으켜 주자 무너지듯 그의 품에 안겼다.

“사, 사비나 아가씨…….”

“……따뜻해.”

배고픔보다 추위가 문제였던 걸까?

생각해 보니 사비나가 걸치고 있는 것은 나자예프의 로브뿐으로, 안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아마도 창고에서 일어난 폭발 때문에 옷이 불에 타 찢어진 거겠지.

에르잔은 그녀를 깨우려던 것을 멈추고 끌어안은 채 천천히 등을 쓸어내렸다. 감각이 둔해진 것은 등뿐이었는지, 품 안의 사비나가 작게 뒤척이는 감촉이 생생하게 느껴져 에르잔은 입안을 깨물었다.

“아가씨, 잠시만…… 침대에 눕혀 드리겠습니다.”

사비나의 어깨를 안고 무릎 아래에 손을 밀어 넣어 안아 올리자, 몸이 공중에 뜨는 감각에 놀랐는지 사비나가 눈을 떴다.

“에르잔……?”

“앗, 죄송합니다! 깨우지 않으려고 했는데, 아가씨께서 너무 불편한 자세로 주무시는 것 같아서……!”

당황하여 버벅거리는 에르잔을 사비나는 잠이 덜 깬 듯 몽롱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배시시 웃었다.

“에르잔. 같이 자요.”

“예?”

“당신이 좋아…….”

사비나는 작게 칭얼거리며 에르잔의 목 언저리에 이마를 문질렀다. 그 가벼운 접촉에 에르잔은 화살을 맞은 짐승처럼 침대로 쓰러졌다.

두 사람이 눕기엔 비좁은 침대가 크게 들썩였다.

간신히 한쪽 팔로 지지하지 않았더라면 사비나의 몸을 깔아 누를 뻔했다.

사비나는 제 위에 몸을 드리운 남자를 보고도 전혀 경계하거나 놀라워하지 않고, 콧소리를 내며 에르잔의 목 뒤로 팔을 둘렀다.

“가까이 와요…….”

“사비나 아가씨. 안 됩니다. 저…….”

그녀가 피곤하다면 침대에 눕혀 재우고, 배가 고프다면 간단한 요깃거리라도 만들어 올 셈이었는데.

어깨에 걸려 있는 사비나의 팔에는 힘이 하나도 없음에도 에르잔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등만 마비된 게 아니라 어깨도 마비된 게 아닐까? 감각이 생생한 것을 보면 그런 것도 아닌 듯했다.

“내 옆에 있겠다고 했잖아요…….”

사비나를 어떻게 밀어내야 하나 고민하던 생각이 그 한마디에 깨끗하게 사라졌다.

에르잔은 사비나가 떨어지지 않도록 그녀의 몸을 벽 쪽으로 옮기고, 옆으로 누웠다.

침대가 비좁기는 했으나 어차피 부상 때문에 바로 누울 수는 없으니 옆으로 눕는 것이 모로 봐도 효율적이었다.

에르잔이 제 곁에 누운 것을 확인한 사비나는 그의 팔에 뺨을 문지르다가, 문득 제 몸에 뭔가 걸쳐져 있는 것을 깨닫고 훌렁 벗어 버렸다.

“아, 아가씨!”

순식간에 알몸이 되어 버린 사비나가 에르잔의 가슴팍에 폭 안겼다.

불편하게 거치적거리는 것 없이 에르잔의 피부와 체온을 느끼고 싶었다는 듯 달콤한 한숨이 샜다.

부드러운 가슴이 뭉그러지듯 달라붙어 오며 팔딱거리는 고동이 전해져 오자 에르잔은 뻣뻣하게 굳었다.

마취제 때문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치료 때문에 속옷을 제외하고는 알몸이었던 에르잔과, 몸을 가리는 유일한 수단이었던 로브를 벗어던진 사비나의 몸이 자석처럼 맞붙었다.

잔뜩 긴장한 에르잔과는 달리, 사비나는 에르잔의 몸에 제 몸을 비비다가 이제야 편안하게 쉴 장소를 찾았다는 듯이 나른한 숨을 내쉬며 다시 잠들었다.

쌔근거리는 규칙적인 숨소리가 쇄골과 가슴 사이에 닿았다가 흩어졌다.

“어쩌지…….”

차라리 이쪽에 마취제를 놨으면 싶을 만큼 눈치도 없이 부풀어 오른 성기가 그녀의 아랫배를 찌르지 않도록 허리를 살며시 뒤로 뺀 채, 에르잔은 사비나를 끌어안았다.

신을 모신 성전에서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아는데도 멈출 수가 없었다.

‘신이시여. 지금 이 불경한 행동에 죄를 물으시려거든 부디 제게만 벌을 주십시오.’

아침이 되어 로스카옌이 들어오면 어쩌나.

에르잔은 일어나서 문을 잠그러 갈까 하다가, 제 품에서 편안하게 잠든 사비나를 놓고 싶지 않아 그대로 눈을 감았다.

참으로 무모한 행동이었으나, 지금만큼은 그 어떤 상식도 중요하지 않았다.

***

잠결에 사비나는 몸을 뒤척였다. 따스한 팔이 그녀를 끌어안고, 부드러운 숨결이 이마에 닿았다.

“으응, 에르잔…….”

꿈을 꾸는 걸까? 제가 알몸인 채 에르잔과 껴안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저주의 반동으로 몸을 겹칠 일은 없는데, 아무래도 제 욕망이 향하는 방향은 저주와 관련이 없었던 듯했다.

사비나는 에르잔의 체온과 고동을 느끼며, 그의 어깨에 걸쳐져 있던 손을 내려 그의 옆구리를 쓰다듬었다.

움찔. 에르잔이 몸을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으나 사비나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그대로 골반을 타고 내려간 하얀 손이 맹렬하게 부푼 성기를 쓰다듬자, 정수리에 닿던 고른 호흡이 흐트러지며 삽시간에 뜨거워졌다.

“아, 사비나 아가씨…….”

“꿈속에서도 아침에는 이렇게 되는구나…….”

사비나는 에르잔이 언젠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손을 움직였다. 아랫배에 딱 올라붙을 만큼 흉흉한 성기를 만지는 손길에 부끄러움이나 주저함은 조금도 없었다. 에르잔이 움찔거리며 허리를 뒤로 빼려 할수록 사비나는 제 몸을 그에게 바짝 붙였다. 어느새 침대 가장자리까지 밀려난 에르잔은 떨어지지 않기 위해 침대 헤드를 부여잡았다. 그가 더는 멀어지지 않는다고 판단한 사비나는 안심하고 에르잔의 성기를 쓰다듬었다. 흉흉한 외견과는 달리 자극에 약한 그것은 사비나가 조금 만져 준 것만으로 꺼떡거리며 그녀의 손바닥에 제 몸을 문질렀다.

“신기해. 내 몸에는 이런 거 없는데…….”

“아, 아가씨. 잠깐…….”

“내가 이러는 거 싫어요?”

사비나가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려 에르잔에게 묻자, 어느새 잠이 확 달아난 듯했던 에르잔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에르잔이 싫어하면 하지 않을게요.”

“엇, 아니, 그게…….”

“아니야. 싫어해도 할래요.”

사비나는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에르잔의 가슴팍에 쪽 입을 맞췄다.

“당신을 만지고 싶으니까.”

만지는 부위가 왜 하필 그곳이냐는 질문은 나오지 않았다. 붉어진 얼굴로 헐떡이던 에르잔이 이를 악물며 고개를 쳐들었다.

제 시야로부터 달아나려는 듯이 시선을 피하는 그가 조금 야속해져, 사비나는 양손으로 그의 것을 감싸 조금 세게 쓸어올렸다.

“아, 읏……!”

“에르잔의 여기, 굉장히 뜨겁고…… 엄청 빨리 뛰어요. 꼭 북을 치는 것처럼.”

맞닿은 가슴 너머로 터질 듯이 요동치는 심장의 고동이 듣기 좋았다.

흐트러지는 한숨마저 저로 인한 것이라는 사실이 기쁘다는 듯 사비나가 손을 놀리자, 에르잔은 사정감을 참으려 안간힘을 쓴 것이 무색하게도 금방 백탁액을 토해 내고 말았다.

워낙 커서 양손으로도 다 감쌀 수 없었던 성기에서 뿜어져 나온 정액이 제 허벅지와 아랫배까지 적시고 나서야 사비나가 눈을 깜박이더니 고개를 들었다.

“어라……?”

“읏, 아가씨…….”

“에르잔……?”

멋대로 알몸을 부대끼며 에르잔의 몸을 만지작거린 게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자각이 들었는지, 사비나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꺄아! 미, 미안해요!”

“아닙니다. 그…… 으앗!”

침대 가장자리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던 에르잔이 사비나를 감싸려 팔을 뻗은 순간, 두 사람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침대 한쪽이 무너져 내렸다.

늪 속의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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