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바르셀다가 오딜을 부르러 갔을 때 네나뷔스테로 같이 깨운 모양인지, 나자예프는 오딜을 데려다주러 오두막에 들르자마자 네나뷔스테에게 억울하게 욕을 듣고야 말았다.
“야, 나자예프! 이 쓰레기야! 로스카옌이 뭐라고 이 야밤에 들쑤셔서 사람 잠을 깨워!”
“아니, 잠깐만 기다려! 내가 깨운 게 아닌데? 왜 나한테 그래?”
“내 동생들은 저녁도 못 먹고 잠들었는데…… 너는 인간으로서 배려심이라는 게 없어? 원래도 인간말종이라고 생각했지만, 어떻게 15년이 지나도록 한 번 변하지를 않아?”
“난 억울해! 여기 찾아온 건 바르셀다였잖아? 그런데 왜 나를 욕해!”
“형이 되어 가지고 동생한테 다 떠넘기는 게 자랑이냐? 자랑이야?”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못하고 15년 동안 동생들을 지키는 데 모든 시간과 정성을 쏟아부었던 네나뷔스테가 보기에 나자예프는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자, 같은 세상에 존재하는 것조차 인정하고 싶지 않은 존재였다.
네나뷔스테는 꼴도 보기 싫다는 듯이 나자예프를 향해 나머지 한쪽 신발을 날렸고, 나자예프는 변명하려다 매를 번 탓에 여전히 넋이 나간 상태의 오딜을 제대로 앉혀 주지도 못하고 한쪽에 밀어 둔 후 쌩하니 도망쳤다.
“우씨. 왜 나만 갖고 그래…… 나 요즘은 사고 안 치고 다녔는데.”
열 번 잘하던 사람이 한 번 못하면 욕을 들어도, 열 번 못하던 사람이 한 번 잘하면 칭찬을 듣는 게 보통 아니던가. 나자예프는 요즘 건전하고 얌전하게 살았던─어디까지나 그 혼자만의 판단으로─자신이 어째서 갈수록 더 미움을 받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게 그건가? 현실이 괴로울수록 분노를 쏟아 낼 대상을 골라서 일점사하는 걸로 스트레스를 푼다는…… 젠장. 난 희생양이 된 거야?”
애당초 이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나자예프의 취급은 달라진 적이 없다. 그저 예전의 네나뷔스테는 남쪽 구역을 벗어날 수가 없었기에, 카밀라는 한쪽 얼굴이 무너져 내리고 다리를 절어서, 카이라트는 눈이 먼 까닭에 나자예프가 망나니짓을 하고 다녀도 달려가서 두드려 팰 수가 없었는데 지금은 사정이 달라져 원래대로 되돌아왔을 뿐이다.
“오딜이 마을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도록 숨어 있었을 때가 더 나았던 거 같아. 그땐 이렇게 무시당하면서 살지 않았는데.”
나자예프는 있었는지도 미심쩍은 과거의 영광을 추억하듯 구시렁거리며 숲길을 내려왔다. 에르잔과 사비나가 교회에 남아 있기에 두 사람이 머물던 오두막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 일인데도 꼭 오래전 일처럼 느껴져, 나자예프는 고개를 털었다. 만약 자신이 그때 북쪽 숲으로 향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에르잔이 다치고, 사비나가 우는 일이 없었을까? 아니면 도리어 두 사람이 위험에 처했을까. 에르잔을 바라보며 눈물짓던 사비나를 떠올리니 괜히 심란해져, 나자예프는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결 좋은 머리카락이 나자예프의 자랑이었거늘, 지금은 다 타서 위는 구불구불하고 아래는 버석버석했다.
“어휴. 이 머리를 어쩐담…… 나도 에르잔처럼 짧게 자를까?”
생각하는 바를 죄다 혼잣말로 내뱉는 것은 나자예프의 버릇이었다. 카밀라와 마찬가지로, 대화할 상대가 로스카옌 외에는 없다 보니 혼잣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말하는 법을 잊어버릴 것 같다는 이유였다. 또한 혼자 있는 외로움과 이 저주받은 마을을 떠날 수 없다는 절망적인 현실을 잠시라도 잊고 싶어서였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다른 방법을 택할걸.”
괜히 후회가 들었다. 생각이 뇌를 거치지 않고 바로 입으로 나와 버리는 바람에 사비나에게 오해를 사고 말았으니까. 나자예프 나름대로는 솔직하게 다가선 것이 도리어 사비나의 경계심을 부추기고, 에르잔에게 이리저리 치이면서 상종 못 할 쓰레기라는 선입견을 가지게 했다.
물론 오해도 아니고 선입견도 아닌 그저 사실일 뿐이었으나 나자예프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로브를 사비나한테 벗어 줬더니 좀 춥네. 나도 어디 들어가 있을까…….”
나자예프는 팔을 문지르며 제 앞에 우뚝 선 첨탑을 바라보았다.
바르셀다가 지하에 갇혀 있던 동쪽 첨탑.
또한 원래 이 마을의 교회가 위치했던 장소.
나자예프에게 신앙심이라고는 쥐뿔만큼도 없었고, 조용히 앉아서 기도를 올릴 만큼의 인내심도 없었으므로 미사에 참석한 경험은커녕 교회에 발을 들인 경험마저 손꼽을 정도였다.
바르셀다가 첨탑 지하에 갇힌 이후로는 더욱 가까이 가는 것을 꺼려 했다.
아마 교회가 서쪽으로 옮겨 가지 않았더라면, 나자예프는 아무리 심심해도 로스카옌을 찾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예전엔 여기 오는 게 정말 찜찜했는데.”
“형이 어련하겠어.”
바르셀다의 목소리에 흠칫 놀라 안을 들여다보니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 바르셀다가 서 있었다.
나자예프는 예상치도 못한 장소에서 바르셀다와 마주치는 바람에 버벅거렸다.
어깨를 덮는 긴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는 나자예프와 같지만, 커다란 체격과 남다르게 진한 이목구비 탓에 외모는 조금도 닮지 않은 동생. 더 이상 저주의 핵을 품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바르셀다를 마주하자 괜히 덜컥 겁이 났다.
“야, 바르셀다. 너 여기서 뭐 해? 로스카옌을 찾으러 나온 거 아니었어?”
“그렇게 말하고 나왔지.”
“너 나가고 얼마 안 있어서 돌아왔거든. 밤 산책이라도 하던 모양이야. 너도 그만 교회로 돌아가.”
“내가 왜?”
바르셀다의 질문에 나자예프는 눈을 꿈벅이며 제 동생을 올려다보았다. 바르셀다는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그 표정은 꼭 뭔가 끔찍한 것을 본 것처럼 굳어 있었다. 제 형을 대신해서 저주를 받던 괴로움과 저주의 핵이 발산하던 분노가 사라진 자리에 공포가 깃든 것처럼.
“저주의 화신이 있는 자리에 내가 왜 가야 해?”
“뭐?”
“알렉세이 형이 보낸 사람이잖아. 그 여자.”
겹치는 것은 이름뿐, 사비나를 보냈다는 콘바야젠 백작이 그들의 형인 알렉세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도 바르셀다는 부정할 수 없는 공포스러운 진실을 마주한 사람처럼 몸을 웅크리며 치를 떨었다.
“우리를 전부 죽일 거야.”
***
로스카옌이 치료하면서 쓴 마취제 때문인지, 아니면 부상을 입은 몸으로 무리한 피로가 한 번에 몰려왔기 때문인지, 에르잔은 문이 열리는 소리에도 깨어나지 않았다. 깊게 잠든 모양을 보고 안도한 사비나는 걸음 소리를 내지 않도록 조용히 다가가 침대 바로 앞에 쪼그리고 앉아 몸을 기댔다. 잠든 에르잔의 얼굴이 지근거리에 있었다. 규칙적인 숨소리를 들으니 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와, 사비나는 침대 가장자리에 살며시 손을 올려놓고, 턱을 괸 채로 에르잔을 바라보았다.
<아가씨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로스카옌 사제의 말에 사비나는 곧바로 에르잔을 찾아왔다. 환자인 에르잔이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기사인 그가 인기척에 예민하여, 자칫 잘못하면 깰지도 모른다는 것도 알고 있다. 에르잔이 깨기라도 한다면, 주군인 사비나가 옆에서 지켜보는 한은 절대로 편하게 쉬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런데도 사비나는 이곳을 찾아왔다.
에르잔이 보고 싶어서.
‘다행이야. 깨우지 않아서…….’
전투에 임할 때는 동물적인 감으로 재빠르게 반응하지만, 생각해 보면 잘 때만큼은 그가 무방비했던 것 같다. 사비나와 함께 잠들었던 때도, 그녀가 소리를 내거나 입을 맞추기 전까지 에르잔은 깨지 않았다.
아마도 평소에 상당히 긴장하고 있던 탓이리라.
사비나는 에르잔의 잠을 깨우지 않도록 숨소리를 죽이며 조심조심 그의 손목 위에 제 손바닥을 올려놓았다.
손등에는 자잘한 생채기가 나 있어 쓰다듬었다간 상처가 덧날 것 같아 손목만 짚고 있음에도, 그의 맥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평소에도 에르잔의 심장 소리가 크다고 생각했지만, 잘 때도 이렇게 힘차게 맥이 뛰는 줄은 몰랐다. 그의 심장은 주인이 잘 때조차도 성실하게 일을 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사비나는 에르잔의 손끝에 가만히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닿고 싶어.’
그녀 때문에 다친 에르잔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 때문에 에르잔이 상처입는 일은 없기를 원했다.
사비나가 에르잔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적어도 그를 힘들게 하는 일만은 하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에르잔이 나 때문에 다쳤어.’
가장 바라지 않던 결과였다. 끔찍한 현실을 마주했으니 도망치고 싶어야 정상인데, 사비나는 그의 곁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에르잔이 내 옆에 있으면 또 다칠 거야.’
상처를 입고, 불명예스러운 일을 하고, 이런저런 고생을 할 것이다.
그런데도 사비나는 에르잔의 곁에 있고 싶었다.
떠나보내는 게 옳다는 걸 아는데,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에르잔이 그녀의 곁에 있어 주는 게 너무 좋았다.
그녀가 밀어내도 다시 찾아와 준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다.
이기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에르잔이 돌아왔으니까>라는 변명을 하며 그를 붙잡았다.
“에르잔.”
사비나는 잠든 에르잔의 이름을 조용히 부르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미안해요. 나는 당신을 떠나보내지 못할 것 같아요.”
이대로 함께 있는다면 더 큰 위험이 찾아오리라는 것을 아는데.
“당신과 함께 있고 싶어요.”
그가 불행해질 거라는 걸 아는데, 제 곁을 떠나야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다는 걸 아는데.
“에르잔이…… 좋아요.”
그를 너무 원해서 견딜 수가 없다.
닿은 것은 손뿐인데, 그의 온기를 느낀 것만으로 따스한 충만감이 꽉 차올랐다.
돌아가기늪 속의 불
늪 속의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