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 속의 불-105화 (105/189)

105화

“로스카옌 신부님? 대체 어디 계시다가…….”

“낮에는 찾는 사람이 많으니 혼자 쏘다니려면 사람 안 다니는 밤에 할 수밖에 없지. 자네들이야말로 이 한밤중에 미사실에서 뭘 하는 겐가?”

거뭇하게 썩어서 푹 내려앉은 바닥과, 핏물이 들러붙은 의자, 채 가리지 못해 드러난 오딜의 구멍 난 손과 등가죽이 다 벗겨진 에르잔의 상처를 훑어보며 로스카옌이 한숨을 내쉬었다.

“에르잔, 자네는 방에 들어가 있게. 이따가 약초와 성수를 가지고 가겠네.”

“로스카옌 신부님, 하지만…….”

“카밀라와 카이라트는 그만 집으로 돌아가고, 나자예프가 오딜을 데려가 주게.”

로스카옌은 서둘러 자리를 정리하고 불청객들을 내보내고자 했다. 카밀라는 뭐라고 말하려 했으나, 카이라트가 주저 없이 자리를 떠 집으로 돌아가는 걸 보고 신경질을 내며 따라갔다.

나자예프는 아직도 멍하니 있는 오딜을 잡아끌다가, 잊고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잠깐. 바르셀다가 로스카옌을 찾으러 나갔는데?”

“찾다가 안 보이면 교회로 돌아오겠지.”

“바르셀다한테 찾아가서 로스카옌이 왔다고 말을 해 줘야지. 안 그러면 해가 뜰 때까지 찾아 돌아다닐 거 아니야.”

언제부터 나자예프가 바르셀다를 걱정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로스카옌은 그 부분을 굳이 지적하진 않았다.

“나자예프 자네가 오딜을 데려다주고 오는 길에 바르셀다를 찾아서 알려 주면 되겠군.”

“뭐? 내가 왜 그런 귀찮은 짓을 해야 해?”

“그럼 누구에게 시키려고?”

로스카옌의 질문에 나자예프는 할 말이 없어졌다. 카이라트는 돌아갔고, 오딜은 상처를 입은 데다가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였다. 에르잔은 부상을 입었으니 움직일 만한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

나자예프는 작게 혀를 차고는 알았다고 투덜거리며 오딜을 데리고 교회를 나갔다.

“로스카옌 신부님…….”

“에르잔. 우선 상처부터 치료하는 게 낫겠네.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상처부터 어떻게 좀 해 보게.”

로스카옌은 에르잔을 방으로 데려가 그의 몸을 성수로 닦아 주고, 약초를 얹어 준 뒤 밖으로 나왔다.

밖에서 내내 기다리고 있던 사비나가 에르잔의 상태를 보러 들어가려는 것을 만류하고, 로스카옌은 그녀를 데리고 복도를 나왔다.

“아가씨께서는 저를 따라오십시오.”

***

로스카옌이 사비나를 데리고 온 곳은 고해실이었다. 하나의 방을 둘로 나눈 듯한 구조로 이루어진 고해실은 카밀라나 나자예프가 자주 이용했던 탓인지 한쪽 문이 기울어져 아귀가 잘 맞지 않았다. 반대편에 달린 문은 멀쩡한 것으로 보아 저쪽이 사제가 드나드는 문이리라.

“로스카옌 신부님. 저는 이 마을 사람이 아닌데…….”

“교회에 들어온 이상 누구든 사제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권리를 가지게 되지요.”

“하지만 저는 고해성사 같은 건…….”

사비나는 로스카옌에게 고해성사 같은 건 할 수 없다. 죄를 짓지 않았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죄를 고백하는 것이 부끄럽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로스카옌에게는 말할 수 없었다. 그녀가 아버지의 명령 아래 저지른 일들은 고한다고 용서받을 수 있는 죄도 아닐뿐더러, 도리어 사정을 알게 된 사람의 목숨을 위협할 것이다.

아버지인 콘바야젠 백작과 로스카옌의 관계가 어떤지 확실히 판단이 서지 않는 상태에서 로스카옌에게 비밀을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로스카옌이 아버지와 한패라도 문제고, 적대하는 사이라도 문제였다.

“꼭 죄를 고백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로스카옌 신부님.”

“죄를 짓지 않아도, 사람은 때로 누군가에게 자기 속내를 털어놓고 편해지고 싶어 하는 법이니까요.”

신의 대리자인 사제 앞에서 자신의 죄를 낱낱이 고하고 용서를 비는 것이 고해성사의 본래 목적이지만, 어차피 이 고해실에 죄를 고백하러 오는 사람의 명맥은 끊어진 지 오래다. 카밀라가 와서 하는 소리라고는 이 저주받은 마을에 대한 불만과 카이라트를 향한 욕설과 짜증과 울컥울컥 치밀어오르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한탄이었다. 죄를 고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시원하게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내는 스트레스 해소 수단에 가까웠다.

반대로 나자예프는 마을 안에서 자신을 상대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그렇다고 사람이 많은 북쪽에 가기에는 껄끄러워 로스카옌을 찾아와 시답잖은 장난을 걸고는 했다. 헛소리와 망발을 오가는 나자예프의 말은 어차피 한 귀로 흘려들었지만, 자신을 찾아와 말을 거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위안이 되었던 건 로스카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고해실을 폐쇄하지 않았다.

“그래도 저는…….”

“들어가시지요.”

로스카옌이 문을 열어 주자, 문틀에 간신히 걸려 있던 문이 삐걱대며 열리고, 겨우 한 사람이 들어가 앉을 수 있는 좁은 방이 보였다. 이 마을 사람들은 모두 이곳에서 고해성사를 했던 걸까. 사비나가 망설이자 로스카옌은 반대로 돌아가 입실했다. 문을 닫고 자리에 앉는 인기척이 들리자, 사비나는 당황했다. 작은 창문 너머로 로스카옌의 풍성한 흰 수염이 보였다.

‘어쩌지…….’

로스카옌이 들어간 이상 멋대로 자리를 피할 수도 없었다. 사비나는 어쩔 수 없이 고해실에 들어가 문을 닫고 자리에 앉았다.

“…….”

뭐라고 말을 하면 좋을까. 죄를 고백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죄를 짓지 않아서 고해할 것이 없다는 거짓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사비나는 가만히 앉아서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옆방에 앉아있는 로스카옌은 말이 없었다.

사비나가 말하기를 기다리는 걸까. 하지만 사비나는 로스카옌에게 할 말이 없었다. 정확히는 무엇을 말해야 할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사비나는 초조해졌다.

“에르잔은 괜찮을 겁니다.”

“……네? 아…….”

“아가씨께서 그렇게 걱정하시면, 에르잔의 마음이 더욱 불편할 겁니다.”

로스카옌은 사비나가 가장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듯이 그녀를 격려했다. 얼굴이 안 보이기 때문일까. 로스카옌의 목소리에 긴장과 불안이 풀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저주에 익숙한 자의 눈동자는 탁하고 흐리멍덩하지만, 고해실에서의 로스카옌은 저주에 물든 자가 아니라 한 명의 사제였다. 그 사실을 자각하자 안절부절못하고 초조해하던 마음이 조금 안정되었다.

사비나는 고개를 들어 고해실의 벽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은 좁고 긴 벽면. 콘바야젠 백작가에 있던 시절, 사비나가 갇혀 있던 돌방보다도 비좁은 곳인데 묘하게 답답하지는 않았다.

언제든 문을 열고 나갈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일까? 아니면 옆방에 로스카옌이 있어서일까.

사비나는 자세를 바르게 하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신전은 저주를 막아 내는 신성한 장소이니 이곳에 있으면 불안하거나 쫓기는 마음이 들어야 할 터인데, 이상하게도 사비나는 이 교회가 편안하게 느껴졌다.

로스카옌은 말을 걸지 않았다. 사비나의 숨소리가 한결 편해진 것을 눈치챈 듯 그도 의자의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침묵이 이어졌으나 어색하지는 않았다. 로스카옌도, 사비나도 고요한 것에 익숙했으나 단지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상대가 그곳에 있다는 것을 인지한 것만으로 마음이 편안해지는 느낌이었다.

“신부님. 저…… 에르잔 말인데요.”

“예.”

“앞으로는 제가 혼자 다니도록 에르잔을 설득해 주실 수 있나요?”

아무리 죽지 않는 몸이라고 말해도, 에르잔은 사비나가 다칠까 봐 걱정하며 그녀를 감싸느라 전전긍긍했다. 오늘 욕망의 핵을 흡수하면서 일어난 사고만 해도 그랬다. 차라리 사비나가 에르잔을 감쌌더라면, 온몸이 넝마가 된다고 한들 하룻밤 쉬는 것으로 회복할 텐데.

“에르잔이 저 때문에 다치는 게 싫어요.”

“그럼 아가씨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말했어요. 말했는데…… 에르잔이 다시 돌아왔어요.”

얼굴도 보지 않고 쫓아냈는데,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사비나가 먹을 저녁 식사를 들고 몰래 찾아왔다.

만약 그녀가 에르잔에게 자신을 보호할 필요가 없다고, 혼자서 다니고 싶다고 말한다 할지라도 에르잔은 사비나를 걱정해서 또다시 그녀를 몰래 뒤쫓을 것이다.

“아가씨의 말을 듣지 않고 다시 돌아오면, 다시 쫓아내면 되지 않습니까.”

“그게…… 그게 잘 되지가 않아요.”

“어째서요?”

사비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또다시 침묵이 이어졌으나 로스카옌은 보채지 않았다. 사비나는 고민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에르잔이 다시 돌아왔을 때, 너무 황당했는데…… 이상하게 기뻤어요.”

그랬다. 에르잔이 사비나의 명령을 거역하면 그에게 화를 내야 하는데, 이상하게 전혀 화를 낼 수가 없었다. 화가 나지 않았다. 제 말을 무시했다는 것보다도, 저를 걱정해 저녁 식사를 만들어 왔다는 사실이 사비나의 가슴에 깊숙이 박혔다. 어둠 속에서 에르잔의 얼굴을 보는 순간 느꼈던 감정은 당혹감과 놀라움, 그리고 반가움이었다.

“에르잔을 생각한다면, 더 모질게 대해서 내쫓았어야 했는데 그럴 수가 없었어요. 에르잔이 저를 다시 찾아와 준 게 너무 좋아서…….”

“함께 있고 싶으시다면, 함께 있는 편이 좋지요.”

“안 돼요. 에르잔이 나를 지키려다 또 다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요?”

사비나의 목소리에 울음이 섞였다. 로스카옌은 난처한 듯이 헛기침을 했다.

“에르잔을 밀어내야 하는데 방법을 모르겠어요. 아니, 그래야 한다는 걸 아는데…… 그러고 싶지가 않아요.”

“꼭 그를 밀어내야 할까요?”

“에르잔이 다치는 건 싫어요.”

“하지만 에르잔이 곁을 떠나는 것도 싫어하시지 않습니까.”

뜻밖의 지적에 사비나가 눈을 깜박이며 창 너머로 시선을 옮겼다. 작은 창 너머로는 로스카옌의 옷자락과 수염밖에 보이지 않았다. 눈이 마주친 것도 아닌데, 로스카옌은 사비나가 바라보는 것을 알기라도 한 것처럼 말을 이었다.

“사람의 욕심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

“상대를 떠나보내는 게 그 사람을 위해 좋다는 걸 아는데, 마음은 붙잡고 싶어지지요. 이곳에 있으면 위험해지니 화를 내서라도 내쫓아야 한다는 걸 아는데, 막상 얼굴을 보면 그리움과 반가움에 차마 밀어내는 말이 나오지를 않습니다.”

사비나 자신도 정리가 되지 않던 속내를 로스카옌은 마치 훤히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사비나는 입을 벌리고 작은 창 너머의 로스카옌을 바라보았다.

“만나지 않는다면 욕망을 억누르는 것이 힘들지 않습니다. 그리움만 참으면 되니까요.”

“…….”

“하지만 막상 만나면 상대를 위하는 마음보다, 자신의 욕심이 먼저 고개를 쳐드는 법입니다.”

“그러면 안 되지 않아요? 그건 나쁜…… 이기적인 거잖아요.”

“자신의 욕망보다 타인을 배려할 만큼 강했더라면, 미혹되는 일도 없었겠지요.”

사비나의 의지가 약하다는 점을 꼬집는 건가. 그러나 비꼬는 말로는 들리지 않았다. 로스카옌의 목소리는 어디까지나 침착하고, 온화했다.

그녀가 숨기고 있던 속내를 찌르는 듯한 말을 하고 있는데, 이상하게 가슴이 아프기보다는 도리어 시원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게 사제의 힘일까? 사비나는 알 수가 없었다.

“약하기에 죄를 짓고, 어리석기에 미련을 놓지 못합니다. 위험하다는 것을 알기에 밀어내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곁에 있어 주기를 바라지요.”

로스카옌의 말대로였다.

에르잔이 사비나의 곁에 있으면 위험해진다. 그는 또다시 그녀를 구하려다 상처를 입을 것이다.

그래서 그를 밀어냈는데, 돌아온 그를 마주한 순간 안도하는 기분이 먼저 들었다.

‘방법이 없었던 게 아니야. 그러고 싶지 않았던 거야.’

에르잔을 내쫓을 방법은 많았다. 둘러댈 명분도 많았다.

에르잔이 아무리 사비나를 걱정해도, 그녀가 분개하며 호통을 친다면 곁에는 다가오지도 못할 것이다.

그런데 사비나는 그러지 못했다. 정확히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에르잔에게 화를 내는 것이 미안해서가 아니다.

에르잔이 떠나가는 것이 두려워서였다.

“하지만 그건 나쁜, 아주 나쁜 거잖아요.”

“왜 나쁘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만 좋자고 에르잔을 위험하게 하면 안 되잖아요.”

“아가씨.”

로스카옌이 잠시 숨을 고르고, 진지한 음성으로 물었다.

“무엇이 정의롭고 올바른 일인지를 생각하는 건 잠시 넣어 두십시오. 지금은 아가씨가 진정으로 바라는 게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먼저입니다.”

“…….”

“에르잔이 아가씨 곁을 떠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지요?”

“네…….”

“에르잔이 아가씨 곁을 떠나길 원하십니까?”

사비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래야 한다는 걸 아는데, 그것이 옳다는 걸 아는데, 마음은 반대로 치닫는다.

에르잔을 위해서는 그를 내치는 게 옳다는 걸 아는데, 마음은 그가 곁에 있어 주기를 바란다.

빛 한점 들지 않는 어둠뿐인 그녀의 세상을 밝혀주는 그를 잃는 것이 두려웠다.

“……에르잔이 내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렇다면 그렇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정말…… 그래도 될까요?”

“되는지 안 되는지를 판단하는 것은 제가 아닙니다. 아가씨 자신이지요.”

신기했다.

사비나와 로스카옌은 그렇게 깊이 대화해 본 적도 없는데, 그는 어떻게 사비나가 염려하는 바를 정확히 알고 있는 걸까.

내내 가슴에 걸려 있던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사비나는 한숨을 내쉬며 의자의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끼익. 반대편에서 로스카옌이 자세를 바로 하는 소리가 들렸으나 사비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로스카옌 신부님.”

“예.”

“감사합니다…….”

“저는 감사받을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아가씨의 말을 들어 드린 것뿐이니.”

로스카옌은 사비나에게 답을 알려 주지 않았다.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지도 않았다.

그는 다만 사비나를 위로하고, 격려해 주었다.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하라고 말해 주었다.

“그래도 감사해요. 감사하게 해 주세요.”

어쩌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그 한마디가, 사비나가 이제까지 하던 고민들을 전부 날려 버렸다.

그것만으로도 해방된 기분이었다.

“아가씨. 그렇다면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괜찮을까요?”

“뭔데요?”

“이틀 후, 마을 북쪽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함께 가시지요.”

늪 속의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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