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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 속의 불-104화 (104/189)

104화

“하지 마세요, 에르잔을 때리지 말라고요!”

날카로운 비명이 형체화된 것처럼 푹, 오딜의 손바닥을 찔렀다.

에르잔을 향해 타오르던 금빛의 눈동자가 놀라움으로 굳어졌다. 오딜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제 손을 바라보았다. 뭔가 날아오지도 않았고 닿지도 않았는데, 그의 손바닥에서 손금을 따라 검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기이하게도 아프지는 않았다. 상처가 났는데도 아프지 않은 것이 저주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제가 지금 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라 그런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사비나는 냉큼 앞으로 튀어나와 제 몸으로는 다 가려지지도 않는 에르잔을 감싸 안았다.

“당신이 뭔데! 당신이 뭔데 에르잔을……!”

“사비나 아가씨, 진정하십시오!”

“내 에르잔한테 손대지 마!!”

<우리 엄마한테 손대지 마!>

어디선가 어린 시절의 제 비명이 들려왔다. 사비나는 목이 막힌 듯 콜록, 기침을 하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때리지 마. 에르잔이 다치는 거 싫단 말이야…….”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판단할 겨를은 없었다. 사비나는 에르잔과 떨어지면 죽기라도 할 것처럼 그에게 달라붙어 있으면서도, 등의 상처를 건드리지 않도록 손을 가슴에 올리고 있었다.

손바닥에 엄지손톱만 한 구멍이 나 피가 줄줄 흐르는데도 멍하니 있는 오딜과, 무슨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입을 벌린 채로 굳어 있는 카밀라와 나자예프와는 달리, 카이라트는 눈을 크게 떴지만 놀라서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마치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 그런 것처럼, 강제로 앉혀졌던 상체를 당겨 오딜의 손을 주시하고 있었다.

바닥에 흘러내린 검은 피는 기화하지 않았다.

저주는 깃든 대상에서 빠져나온 순간 형체를 유지할 힘을 잃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도 오딜의 손에서 흘러 떨어진 피는 기화하지 않고, 마치 물감을 묻힌 긴 붓으로 선을 그리는 것처럼 바닥 위를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흘러가 사비나의 그림자 속으로 들어갔다.

“흐윽, 흑…….”

사비나의 어깨가 빠르게 오르내렸다. 씩씩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두 눈에서 투명한 눈물이 후드득 떨어지는 것을 본 오딜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녀가 자신을 공격해서가 아니다. 이상한 힘에 의해 상처를 입어서도 아니다.

저를 원망하는 듯이 바라보는 검은 두 눈동자가 가슴 깊은 곳에 감추어 두었던 죄책감을 단번에 끄집어낸 탓이었다.

“올가. 나는…….”

반사적으로 제 여동생의 이름을 불렀다가, 오딜이 얼른 입을 다물었다. 사비나는 여전히 진정이 되지 않는지 젖은 숨을 헐떡거리며 눈만 부릅뜨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진정시킨 건 에르잔이었다.

“사비나 아가씨, 그만하십시오.”

“……에르잔…….”

“이러시면 안 됩니다.”

에르잔은 사비나의 저주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알지 못했다. 다른 저주를 흡수할 수 있고, 상처를 입어도 금방 낫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이런 식으로 공격성을 띤 것인 줄은 몰랐다.

“하지만, 윽. 저 사람이, 흐윽. 저 사람이 에르잔을…….”

사비나가 울음 섞인 딸꾹질을 하며 오딜을 가리키자, 에르잔은 제 손으로 사비나의 손등을 덮어 그녀의 팔을 아래로 끌어내렸다.

“사비나 아가씨께서 이 마을에 남은 이유는 이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진정하십시오.”

에르잔의 음성이 한층 더 낮아졌다. 묵직하지만 결코 위압감은 느껴지지 않는 그 목소리에 몸의 떨림이 차츰 잦아들었다. 사비나가 훌쩍거리며 고개를 숙이자, 에르잔이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아직도 얼어 버린 것처럼 서 있는 세 사람과 무슨 흥미진진한 구경거리라도 보는 듯이 상체를 쭉 빼고 앉아 있는 한 남자를 바라보며 에르잔이 조용히 말했다.

“오늘 너무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사비나 아가씨를 조금 쉬게 해 주십시오.”

“…….”

“오딜. 상처는 괜찮으십니까?”

“……음? 어…….”

에르잔이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오딜이 엉거주춤하게 굳어 있던 자세를 바로 했다.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언제든 전투에 나설 수 있게 긴장을 철갑처럼 두르고 있던 마을의 호위대장은 더 이상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어색하게 팔다리를 움직이는 오딜에게서는 꼭 철사로 만든 인형처럼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오딜. 손에 상처를 입으셨는데…….”

“어? 아니, 괜찮아. 이런 건 금방 나아.”

오딜은 얼른 구멍이 난 제 손등을 반대쪽 손으로 덮어 가렸다. 손바닥에 구멍이 난 경위는 알 수 없지만 사비나가 어떤 힘으로 그를 공격한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오딜은 사비나에게 왜 자신을 공격하느냐고 호통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녀가 어떤 힘으로 제 손에 상처를 냈는지도 궁금하지 않았다.

방금 일어난 일 자체를 머릿속에서 지우고 싶다는 듯이, 오딜은 고개를 흔들었다. 뒤늦게 손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괜찮아. 신경 쓰지 말고 사비나…… 자네 아가씨나 돌보게.”

여전히 구멍이 뚫려 있지만 더 이상 피는 흐르지 않으니 문제는 없었다.

일부러 관련 주제를 피하는 듯한 오딜의 태도에 에르잔은 미간을 좁혔다가,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오늘은 이만 자리에서 물러나도 괜찮을까요?”

“……어. 그, 그래…….”

오딜의 시선은 에르잔이 아닌, 그에게 안겨 있는 사비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에르잔에게 기대 있는 사비나는 꼭 여덟 살 아이처럼 훌쩍이며 작게 딸꾹질을 했다. 사비나의 몸은 벌써 다 큰 성인인데, 오딜은 마치 어린애한테 손찌검을 한 불한당이 된 것 같은 기분에 가슴이 꽉 죄어들었다. 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문가에 서 있던 바르셀다와 눈이 마주쳤다.

바르셀다는 교회에 들어오지 않은 상태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저 이제 끼어들어도 돼요?”

나자예프와는 다른 이유로 내내 소외되었던 바르셀다가 큼, 헛기침을 하며 교회 안으로 들어오자, 에르잔의 눈빛에 경계심이 깃들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재빨리 낯선 남자의 모습을 사선으로 훑었다.

체구는 에르잔보다 조금 작았으나 저쪽도 상당한 장신이었다. 어깨를 조금 넘는 길이의 검은 머리카락이 헝클어져 있었으나 나자예프처럼 부스스하지는 않았다.

몇 걸음 다가오다가, 위화감을 눈치채고 멈춰 선 바르셀다의 붉은 눈동자를 마주한 에르잔은 뒤늦게 깨달았다.

“네가…… 바르셀다인가?”

“……내 이름은 말 한 적도 없는데 어떻게 알았어?”

창고에서 구해낼 때는 재투성이라 체구 정도밖에 파악하지 못했는데, 자신을 바라보는 에르잔의 눈빛에 경계심은 깃들어 있으나 공격 의지는 없어 보였다.

바르셀다는 민망한 듯 턱을 긁적이며 시선을 나자예프에게로 돌렸다.

“형이 또 내 이야기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녔어?”

내내 굳어 있던 나자예프는 바르셀다의 지적에 펄쩍 뛰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바르셀다! 떠벌리다니, 어디서 형한테 떠벌린다 같은 말을 함부로 해!”

“모르는 사람이 나를 알아보고 이름까지 안다면 당연히 형한테 들어서 그런 걸 거 아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말을 곱게 해야…….”

“형이 말한 거 맞지?”

바르셀다가 재차 물어보자, 나자예프의 입이 합 다물리며 붉은 눈이 빠르게 반대쪽을 향했다.

부정할 수는 없었다. 바르셀다가 동쪽 첨탑의 지하에 갇혀있을 때만 하더라도 그는 제대로 된 의사소통이 불가능했고, 온통 검은 털로 몸이 뒤덮여 있던 까닭에 지금과는 모습도 달랐다. 로스카옌 사제는 바르셀다를 일컬어 <동쪽의 핵>이라고만 말했다. 에르잔과 사비나가 그 남자의 이름을 알게 된 건 그다음 날 나자예프와 마주쳐 그에게 사정을 들었기 때문이니까.

“저주받았던 나를 구해 준 게 거기 두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그쪽은 환자니까 일단 들어가 있어. 나는 마저 로스카옌 신부님을 찾아볼게.”

사비나가 이상한 힘으로 오딜을 공격하는 것을 바르셀다가 보지 못했을 리가 없는데도, 이상하게 바르셀다는 태연했다.

마치 옆집에 이사 온 새로운 이웃을 마주한 것처럼 간단히 인사하고, 얼른 등을 돌려 교회를 빠져나갔다.

내내 동생의 시선을 피하고 있던 나자예프 대신 바르셀다의 뒷모습을 향해 손을 흔든 것은 카이라트였다. 그는 여전히 의자에 앉아 있는 채로 에르잔을 향해 물었다.

“아무래도 더 이야기를 나누기엔 시간이 너무 늦은 것 같죠?”

“…….”

“환자는 안정이 제일이니 우선은 쉬는 게 좋겠습니다. 에르잔, 사비나를 데리고 들어가세요.”

카이라트는 대수롭지 않게 손을 내저었다.

“로스카옌 신부님을 찾지 않아도 되는 건가?”

바르셀다는 교회에 로스카옌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에르잔을 구하자마자 카이라트의 집에 방문했다. 그러나 카이라트로부터는 오늘 저녁을 가져다준 이후로 찾아오지 않았다는 이야기만을 듣고, 카밀라의 집으로 향하려던 차에 나자예프를 걷어차고 나온 카밀라와 마주쳤다. 그녀도 로스카옌을 만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르셀다는 로스카옌이 갈 만한 장소를 물었고, 카밀라는 오딜의 거처를 가르쳐주었다.

카밀라가 이야기한 부분은 거기까지였다. 그런데 바르셀다는 오딜만 데리고 교회로 돌아왔다.

그렇다는 건, 로스카옌 사제는 오딜의 거처에도 없었다는 뜻이다.

로스카옌이 사라졌는데도 전혀 걱정하는 기미가 보이지 않는 카이라트의 모습에 에르잔의 눈빛이 다시 날카로워졌다.

“카밀라. 나자예프.”

“응?”

“어? 나?”

“로스카옌 신부님을 찾아 주지 않겠나? 부탁한다.”

창고는 교회에서 떨어져 있지만, 로스카옌 사제가 저주의 균형을 유지하는 처지인 이상 어떤 피해를 입었을지도 모른다. 그를 어서 찾아야 했다.

“찾을 거 없네. 지금 돌아왔으니까.”

바르셀다가 나간 방향과는 정반대에 달린 쪽문이 열리며, 로스카옌이 들어왔다.

늪 속의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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