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적어도 한 명은 그렇겠지.”
한 명. 그 한 명이 누구를 말하는지 나자예프는 모르지 않았다. 알렉세이는 조용하고 다른 사람과 어울리지 않아 그에 대해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다만 기척이 없어 있는 줄도 없는 줄도 모르게 잊히는 존재인지라, 낯가림이 심하고 얌전한 성격이라고 파악했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무슨 비밀이 있을지도 몰라. 형은 이상한 사람이었으니까.”
“너보다 이상한 사람은 우리 마을에 없어, 나자예프.”
“나도 이해할 수 없는 존재란 말이야, 알렉세이 형은!”
“네가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있기는 하니?”
나자예프가 하는 말마다 죄다 반박해 버리자 나자예프는 울상을 지으며 카이라트를 돌아보았다. 자기 말재주로는 카밀라를 이길 재간이 없으니 좀 도와 달라는 뜻이다. 나자예프를 도울 생각은 조금도 없지만, 사비나로부터 아직 원하는 대답을 캐내지 못했다. 카이라트는 조금 비틀거리며 나자예프에게 다가가, 그와 카밀라 사이에 끼어들었다.
“카밀라. 소모적인 논쟁은 그만하자.”
“그만하자? 그만하자고 했어? 카이라트. 너 지금 나한테 명령한 거야?”
“명령이 아니라 권유야, 카밀라.”
“권유든 뭐든 듣기 싫으니까 닥치고 찌그러져 있어. 나자예프니까 화병으로 머리통 갈기고 발로 밟았지, 너였으면 진작 피떡으로 만들어 놨을 테니까.”
카밀라가 이를 갈며 카이라트를 노려보았다.
두 남매는 아직도 화해를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카밀라 편에서는 카이라트를 질색하고, 카이라트도 굳이 카밀라를 찾아가지 않았다고 할까. 세 채의 집이 나란히 붙어 있었으나 이웃집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은 없었다. 그날 이후로 카밀라는 세 채의 집에 자신 혼자만이 사는 것처럼 행동했고, 그건 카이라트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만약 알렉세이가 어떤 방법을 써서 내 연구자료를 훔쳐 가고, 그걸 기반으로 이 마을에 저주를 내렸다면 앞뒤가 맞아.”
“앞뒤가 맞든 안 맞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증거는 있어? 있다고 한들 어쩔 거야? 이 마을에서 나갈 수도 없는데. 범인을 잡을 수도 없는데 비밀만 밝혀낸다고 네가 한 짓이 정당화된다고 믿는 건 아니지, 카이라트?”
“……저주는 풀 수 있어.”
“사비나가 해결해 주면 그렇겠지. 그건 내가 알아서 감사할 테니까 너는 상관하지 마.”
노골적으로 적의를 보이는 카밀라의 표정은 흡사 사비나에게 우도를 휘두르던 네나뷔스테를 보는 듯했다. 다만 네나뷔스테의 공격성은 어린 동생들을 지키기 위해 주위의 모든 것에 날을 세워야 하는 상황에서 오는 예민함이었다면, 카밀라의 공격성은 가족이라 믿던 존재에게 배신당한 분노를 감추지 못하는 쪽에 가까웠다.
“사비나.”
“내 친구 이름 함부로 부르지 마. 이 더러운 자식아!”
“당신이 알고 있는 콘바야젠 백작에 대해 말해주실 수 있습니까? 제가 알고 있는 알렉세이의 특징과 일치하는지를 파악하는 게 먼저니까요.”
“사비나, 무시해!”
카밀라가 진저리쳤으나 사비나는 카이라트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아버지에 대해 아는 것이 부족하기로는 사비나 자신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젊은 나이에 외국에서 유학을 다녀왔다는 아버지.
그러나 그 과거가 진짜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의 사실 여부를 증명해 줄 주변인들은 모두 죽어 버렸으니.
만약 사비나의 아버지가 이 마을 출신이라면, 아페티트가 그녀가 어릴 적 경험했던 환각을 보여 줄 수 있었던 것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이상했다.
그들이 말하는 알렉세이와 제 아버지가 동일인물이라면, 사비나도 이 마을 출신이라는 뜻인데.
‘내가 어렸을 때 기억하던 집은…… 엄마와 함께 다녔던 교회는, 이런 곳이 아니었는데.’
사비나는 교회 안을 둘러보았다. 소박한 교회의 모습은, 그녀가 기억하는 것과 달랐다.
어릴 적에 보았을 때는 좀 더 알록달록한, 복잡한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하라는 기도는 안 하고 벽화만 정신없이 쳐다보고는 했으니까.
사비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알고 있는 건 많지 않아요. 가문에서는 내 존재를 비밀로 해서, 나를 외부에 그다지 내보내지 않았으니까…….”
“사비나 아가씨께서는 콘바야젠 백작의 보호를 받고 계셨습니다.”
“당신이 콘바야젠 백작 가문의 주술사인가요?”
카이라트의 질문에 사비나가 멈칫했다. 그녀는 주술사라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카이라트는 굉장히 간단한 문제를 풀듯이 그녀의 정체를 맞추었다.
“나는…… 저주를 흡수할 수 있을 뿐이에요.”
“귀족 가문의 성립 조건 가운데 하나가 주술사의 존재 유무라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주술사가 아니에요.”
거짓말은 아니다.
사비나는 콘바야젠 가문의 주술사로 살아왔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주술사가 아니었다.
그녀는 미래를 읽지도 못하고, 마음대로 어떤 주술을 걸지도 못하니까.
단지 가문의 정적을 제거해, 그녀의 아버지가 하는 일에 방해가 되는 모든 것들을 없앨 뿐이다.
“하긴, 주술사가 이미 있다면 <저주의 화신>까지 들일 필요는 없겠네요.”
“……!”
사비나의 눈이 커졌다. 동시에 카이라트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제 추측이 맞아떨어졌다는 표정이다. 사비나는 아차 싶었으나 이제 와서 표정을 숨겨 봐야 의미가 없었다. 그녀는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아페티트와 당신이 같은 상황이라는 말을 듣고 넘겨짚은 건데 맞아 떨어진 모양이네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콘바야젠 백작은 무슨 목적으로 이 마을에 보냈습니까?”
“사비나 아가씨께서는 요양차 방문하신 것뿐입니다. 이런 저주받은 마을인 걸 알았다면 걸음도 하시지 못하도록 제가 막았을 겁니다.”
에르잔이 나서서 변호했으나 카이라트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사비나는 카이라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저 눈빛이 낯설지 않았다. 아마도 네나뷔스테가 오해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딜이 의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카이라트도 사비나를 의심하고 있을 것이다.
그냥 <콘바야젠 백작>이 저주받은 마을에 사비나를 보내는 거라면 이 마을의 저주를 흡수해 그녀의 힘을 더욱 강력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하겠지만, 만약 이 마을의 알렉세이와 콘바야젠 백작이 정말 동일인물이라면.
“이 마을을 없애러 방문하신 게 아닙니까?”
“카이라트. 그만해!”
카밀라가 미는 대로 밀려나면서도, 카이라트는 사비나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분노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진실을 갈구하는 학자의 눈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연구가 정말로 이루어졌는지 확인하고자 하는 연구자의 눈이기도 했다.
“없애기는 뭘 없애?”
오딜의 노성이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열린 문 너머로 급하게 뛰어나왔는지 옷도 입다 만 상태의 오딜과 창백해진 바르셀다가 보였다.
이야기를 들었을까? 나자예프와 사비나의 심장이 동시에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
“카이라트, 이 자식이! 마을의 은인한테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무슨 말버릇이야!”
오딜이 씩씩거리며 다가오더니 카이라트를 휙 집어 들어 의자에 강제로 앉혔다. 던지지는 않는 것이 그의 호위대장으로서의 최소한의 양심일 것이다.
황당한 상태의 카이라트를 향해 눈을 부라리던 오딜은, 고개를 돌려 사비나를 보자마자 호통을 쳤다.
“바르셀다한테 들었어. 서쪽에 갔다며? 정말이야? 정말로 아페티트를 만났어?”
“……정말이에요.”
“내가 가지 말라고 했잖아. 위험하다고! 아가씨 얼굴에 상처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랬어?”
질문의 방향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사비나는 오딜이 그의 조언을 무시해 화를 내는 거라고만 판단하여 사과했다.
“미안해요. 하지만 큰 문제는 없었어요. 아페티트를 놓치긴 했지만 저주의 핵은 흡수했으니까…….”
주저하면서 말을 고르는 사비나의 목에 길게 난 상흔을 목도한 오딜의 눈이 돌아갔다.
“이게 뭐야. 누가 상처 입혔어!”
“오딜?”
“목에! 아가씨 목에 어느 놈이 상처를 입혔느냐고!”
노발대발하며 다가오는 오딜의 표정이 험악해서, 에르잔은 얼른 사비나를 감싸듯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오딜의 황금색 눈동자에 살의가 떠올랐다.
“너냐?”
“오딜?”
“네가 아가씨를 잘 지켰어야지! 이 빌어먹을 자식이!”
흉터 가득한 커다란 손이, 에르잔의 뺨을 후려갈겼다.
“에르잔!”
“호위기사라는 놈이 뭘 했길래 아가씨가 저렇게 다쳐? 어?”
“오딜, 왜 이래요?”
“사비나 아가씨, 위험합니다!”
사비나를 뒤로 물리고, 에르잔은 오딜이 휘두르는 주먹을 몸으로 받아 냈다.
방어는 하지 않았다. 등의 상처 때문에 움직이는 것이 힘들어서, 아니. 사비나를 감싸느라 비켜서지 않는 거였다.
“네가! 네가 잘 지켰어야지! 네가 책임지고 지켰어야 할 거 아니야!”
배를 때렸는데 등의 상처가 터져 피가 흘렀다. 타는 듯이 쓰라린 아픔이 제 몸을 채찍질해도, 에르잔은 오딜의 화를 묵묵히 받아 냈다. 오딜이 화내는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그의 분노가 향하는 방향에 사비나가 있다면 제가 막아서는 것이 옳았다. 그리고 호위면서 사비나를 완전히 안전하게 보호하지 못한 것 또한 자신의 잘못이었기에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그만, 오딜!”
“이따위로 할 거면 집어치워! 집어치우고 썩 꺼지란 말이야!“
“에르잔은 잘못이 없다고요!”
“잘못이 없어? 아가씨가 상처를 입었는데 잘못이 없기는, 이 버러지 같은 자식이 덩치값도 못 하고……!”
“그만하라고 했잖아요!”
사비나의 외침에 오딜의 손이 허공에서 꺾였다.
늪 속의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