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 속의 불-102화 (102/189)

102화

“지금 알렉세이라고 했어?”

나자예프의 붉은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거무스레하게 탄 얼굴과는 달리 휘둥그레 뜬 눈에서만 형형한 빛이 돌았다. 나자예프가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모르는 사비나나 에르잔과는 달리, 카밀라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나자예프에게 면박을 주었다.

“세상에 알렉세이가 한둘이야? 흔한 이름 가지고 야단법석떨지 마.”

“아니, 하지만…… 귀족이라며?”

나자예프와 바르셀다의 형인 알렉세이.

세 형제의 어머니는 알렉세이에게 늘 <너는 다른 동생들과 달리 귀족의 피를 이어받았다.>고 말하고는 했다.

물론 이 마을은 산 아래서는 존재조차 모를 만큼 외따로이 떨어진 위치에 존재했기에, 알렉세이가 귀족의 피를 이었다는 주장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자예프나 바르셀다마저도 알렉세이가 자신들과 외모가 전혀 닮지 않은 것을 보아 아버지가 달라서 그렇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만 했을 뿐이니까.

“나자예프. 설마 죽은 네 형이 바깥에서 귀족 행세를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불가능한가?”

“당연하지! 이 마을에서는 아무도 못 빠져나가잖아.”

나자예프의 허술한 추측을 카밀라는 단칼에 잘라 버렸다. 실제로 15년 전 그 사건 이후, 이 마을 사람은 누구도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죽은 사람의 수를 세는 것도, 시체를 구분하는 것도 불가능했기에 살아남은 사람 외에는 전부 죽었으리라 판단했다. 15년 동안 알렉세이를 마주친 기억이 없으므로, 카밀라는 당연히 그도 15년 전에 함께 죽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랑 바르셀다로 실험한 게 형이었단 말이야!”

저주의 제물을 만드는 실험.

알렉세이는 두 동생에게 동일한 반지를 끼워 주면서, 나자예프가 받아야 할 저주를 바르셀다가 대신 감당하도록 만들었다. 형제 사이는 남보다 못하다고 할 만큼 소원했으나, 나자예프는 본인이 인간쓰레기인 만큼 알렉세이의 심성도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형이 아무 방법도 취하지 않았을 리가 없어. 당연히 시도해 봤겠지. 자기도 남한테 저주를 뒤집어씌우고 빠져나갈 수 있는지, 아닌지.”

“그래서? 알렉세이가 저주를 피해서 마을을 빠져나가 백작을 사칭하기라도 했다는 소리야? 너 지금 소설 쓰냐?”

카밀라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토를 달자, 나자예프는 울컥했는지 앞 의자의 등받이를 주먹으로 내려쳤지만,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지나친 비약이었던 까닭에 항변은 하지 못했다.

그런데 사비나의 반응이 어쩐지 이상했다.

그녀의 안색이 눈에 띄게 창백해지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나자예프의 형…… 이름이 알렉세이인가요?”

“응? 으응.”

순간적으로 사비나가 비틀거렸다. 에르잔이 붙잡아 주었기에 넘어지지는 않았으나, 그녀가 눈에 띄게 동요하고 있음을 그도 알 수 있었다.

“사비나 아가씨?”

카밀라가 그랬다. 이 마을 사람들은 시간이 멈춰 있기에 노화가 일어나지 않지만, 사비나와 에르잔은 외부인이니까 나이를 먹는다고.

그 증거로 외부인인 로스카옌은 세월을 고스란히 받아 내고 있었다. 어째서 두 배로 늙어 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중요한 것은 <마을 사람>만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는 거였다.

“나자예프. 당신 형 나이가 어떻게 되죠?”

“나보다 두 살 많으니까 25살이지.”

“무슨 양심도 없는 소리를 하고 있어? 살아 있으면 벌써 40이 넘었겠지. 15년은 어디가 팔아먹었어!”

카밀라와 나자예프가 시답잖은 말싸움을 나누는 데 집중할 여력은 없었다. 사비나의 머릿속에서 지난 15년간 겪었던 일들이 마치 시곗바늘이 반대로 돌아가듯 거꾸로 흘러갔다.

‘아버지는…… 내가 처음 만났을 때 이후로, 조금도 나이를 먹지 않았어.’

이상했다.

8살이었던 사비나는 23살이 되었는데.

어릴 때 보았던 아버지는 15년이 지났음에도 얼굴에 주름 하나 없고, 눈빛도 여전히 총명했다.

“에르잔은 이상하게 생각 안 해요?”

“…….”

“당신이 보기엔 이상하지 않았어요?”

사비나가 무엇을 묻고 있는지 에르잔도 모르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도 콘바야젠 백작을 마주했을 때, 정확하게 똑같은 생각을 했으니까.

“아가씨. 설마…….”

“내가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요? 이게 비약일까요?”

사비나는 고개를 털었다.

알렉세이는 흔한 이름이다.

만약 희귀한 이름이더라도 단순히 이름만 겹치는 거였다면 사비나도 동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가 15년 동안 나이를 먹지 않았다는 사실은 흘려넘기기 어려웠다.

나이를 먹지 않는 아버지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녀를 만져도 괜찮은 유일한 사람이었기에 뭔가 특별한 힘이 있어 동안을 유지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잠깐만. 특별한 힘……?’

사비나를 만져도 저주에 오염되지 않는 특별한 존재.

아버지에겐 에르잔과 같은 정화 능력은 없어 보였다.

카림이나 카밀라처럼 저주에 물들지도 않았다. 그랬더라면 아버지에게 깃든 저주를 사비나가 흡수했을 텐데, 그녀의 아버지는 저주에 오염된 인간도 아니었다.

죽음의 화신에게 닿아도 멀쩡한 것치고는, 지나치게 저주와는 무관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래. 마치 처음 나자예프를 마주했을 때처럼.

사비나는 나자예프가 아직 반지를 끼고 있을 적,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무슨 반응을 보였는지 기억하고 있다.

힘주어 이름을 부르면 병에 걸리거나, 적어도 기분이라도 나빠져야 하는데 나자예프는 멀쩡했다.

그녀와 손끝이 닿았을 때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니, 도리어 즐거워했다.

‘어쩌면. 어쩌면…… 아버지가 내게 닿아도 괜찮았던 이유가…….’

나자예프가 바르셀다를 자신의 제물로 삼아 저주를 피하고 있었던 것처럼, 아버지도 다른 누군가를 제물로 삼아서 그런 거였다면, 그가 나이를 먹지 않는 이유도, 사비나에게 닿아도 괜찮았던 이유도 납득이 간다.

그리고 주술도구를 통해서만 그녀의 저주를 피할 수 있는 그와는 달리, 정화 체질인 에르잔을 특별하게 생각했던 것도.

“나자예프. 반지는 어쨌어요?”

“그러니까 카밀라 네가 뭐래도 나는 아직 창창한 스물셋…… 응? 사비나, 뭐라고?”

“당신과 바르셀다가 나눠 낀 반지 말이에요. 그 반지는 어디로 사라진 거죠?”

“그냥 재처럼 바스러졌을걸? 맞닿으면 주술이 폭주하면서 형태가 무너질 거라고 형이 그랬거든.”

나자예프는 기억력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지만, 알렉세이가 반지를 건네주면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확실히 기억한다.

한동안 안 보이던 형이 돌아와서 갑자기 나자예프와 바르셀다를 불러 금반지를 나눠 주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다만 생각이 짧은 나자예프는 형이 뭔가 흉계를 꾸미고 있다고는 예상치 못하고, 어쩐 일로 형이 개과천선해서 동생들한테 선심을 쓰나 하는 생각만 했다.

선심이 아니라 저주였다는 걸 깨달은 건, 마을에 걸린 저주가 일제히 움직이면서 집이 불타오르고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걸 본 다음이었다.

“당신 형이 어디로 갔는지는 당신도 모르죠?”

“사비나. 너까지 나자예프의 이상한 망상에 동조하는 거야? 알렉세이는 죽었어. 이 마을 사람은 여기서 나갈 수가 없다고.”

“알아요. 하지만…… 제물을 따로 두면 저주를 피할 수 있잖아요. 나자예프처럼.”

“나자예프도 마을 밖으로는 못 나갔는걸?”

나자예프뿐만이 아니라 카밀라도 몇 번이나 이 마을을 빠져나가려 했다. 저주를 벗어나려 했다. 살아남은 마을 사람들은 모두 마을에서 뛰쳐나가고자 했다. 그러나 아무도 빠져나갈 수 없었다. 마을을 숲을 아무리 헤매도 귀신같이 원래 자리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마치 이 마을을 어떤 거대한 힘이 감싸고 있어,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그들을 조종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비나.”

나자예프의 가정을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라며 한마디로 잘라 버리는 카밀라와는 달리, 카이라트의 표정은 상당히 진지했다.

“당신은 지금, 당신을 여기로 보낸 콘바야젠 백작이, 나자예프의 형인 알렉세이와 동일인물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아뇨, 확실하지는…….”

“그렇게 판단한 근거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요?”

근거는 확실했다.

나이를 먹지 않고, 저주에도 오염되지 않는 인간.

외국에서 오랫동안 유학을 하고 왔다는 아버지의 배경과, 이 마을에서 태어났지만 귀족의 피를 이었다고 주장하는 나자예프의 형.

“당신은 무슨 목적으로 이 마을에 방문한 거죠?”

“카이라트. 나는…….”

“당신은 콘바야젠 백작과 무슨 관계입니까?”

콘바야젠 백작은 사비나에게 당부했다. 아버지와 딸 사이인 것을 말해서는 안 된다고.

그랬다간 자신에게 적의를 가진 자들이 사비나를 노릴지도 모른다며 주의를 주었다.

어차피 아버지가 자신을 걱정하는 일 따위는 없으리라 여겼기에, 사비나는 아버지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묻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그것이 단지 제 딸을 가문의 주술사로 만든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거라면.

“사비나. 당신에게 이 마을의 알렉세이에 대해서 알려 드리지 않은 게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뭔데요?”

“알렉세이도 책을 읽을 수 있거든요.”

책을 읽을 만큼의 지식을 보유한 자. 현재 생존자는 카이라트와 로스카옌뿐이라고 말했으나, 죽었다고 생각해 언급하지 않았을 뿐 알렉세이도 집에 서재를 따로 둘 만큼 박식했다.

다만 그는 주술에 대해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알렉세이가 마을을 떠난 것은 카이라트의 연구자료가 사라지기보다 더 이른 시점이었기에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알렉세이가 이 마을을 떠난 건 연구자료가 사라진 것보다 더 이전이에요. 그래서 전혀 연관 짓지 않았지만…….”

사비나를 이 마을로 보낸 남자의 이름과, 나자예프와 바르셀다로 제물을 만드는 실험을 한 남자의 이름이 동일하다. 그 사실을 그저 우연으로 치부하고 넘길 수 있을까?

카이라트는 그럴 수가 없었다.

사비나가 말하지 않았나. 아페티트도 저주의 화신이라고.

그녀는 아페티트가 자신과 같은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사비나 또한 저주의 화신이라는 뜻이 아닌가.

“로스카옌 신부님께서 연락을 받고 당신들을 안내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바르셀다가 로스카옌 신부님을 찾아오면 한 번 여쭤봐야겠군요.”

“카이라트, 이상한 상상 그만해. 로스카옌 신부님이 알렉세이가 딴사람 행세를 하고 있는 줄 아셨으면 우리한테 말을 숨겼겠어?”

“그건 모르는 일이지.”

“세상 사람들이 다 너처럼 음흉한 줄 알아?”

카밀라가 진저리치며 주먹을 불끈 쥐자, 카이라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적어도 한 명은 그렇겠지.”

늪 속의 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