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 속의 불-101화 (101/189)

101화

“에르잔! 무슨 짓이에요?”

“나자예프가 문제를 일으킨 줄 알고…… 아, 아니었습니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요!”

나자예프가 오해를 사 타격을 맞고 눈을 까뒤집고 쓰러진 일은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다.

지금 중요한 건.

“에르잔은 부상자잖아요. 왜 움직이는 거예요!”

“아가씨, 하지만…….”

“빨리 방으로 들어가요! 정말…….”

사비나는 울상을 지으며 에르잔을 향해 뛰어갔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녀의 발밑 널빤지가 검게 썩어 들어갔는데, 에르잔을 향해 뛰어가는 사비나의 발밑에는 발자국조차 남지 않았다. 카이라트는 여전히 아려 오는 혀를 입안에서 굴리며 그녀의 모습을 관찰했다. 물론 바닥에 뻗어 버린 나자예프는 카이라트에게서도 관심을 받지 못했다.

“어떻게 해요, 상처 다시 터진 거 아니죠? 등 좀 봐요.”

“괜찮습니다. 움직일 정도는…… 읏!”

“거봐요. 무리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피는 얼추 멎은 것 같지만, 여전히 그의 등에는 흉측한 상처가 남아 있었다. 잘못 건드리면 다시 상처가 터져 피가 흐를지도 모른다고 판단한 사비나는 에르잔의 팔을 제 어깨에 걸쳤다. 몸집이 커다란 그를 혼자서 부축하는 것은 무리였으나, 에르잔은 사비나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 허리를 바르게 세운 탓에 무겁지는 않았다.

“카밀라, 카이라트. 미안해요. 에르잔을 다시 방으로 돌려보내고 올게요.”

“응? 어…….”

“기다리세요, 사비나.”

카이라트가 두 사람을 멈춰 세웠다. 사비나의 표정이 다시 험악해졌다. 에르잔은 부상자라 빨리 방으로 데려가 쉬게 해야 하는데, 자신을 불러 세운 카이라트를 원망하는 마음이 삽시간에 치솟은 탓이었다.

에르잔도 아니고, 사비나가 누군가를 노려보는 건 처음 목도한 카밀라의 입이 쩍 벌어졌다.

‘와…… 사비나가 화도 낼 줄 아네.’

직접적으로 소리치거나 폭력을 휘두른 건 아니지만, 눈빛이 장난이 아니었다. 카밀라는 늘 얌전하고 고분고분하던 사비나가 사실 만만한 성격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고 속으로 조금 쫄아 붙었다.

“에르잔이 먼저예요.”

“예. 그 남자에게 정황을 물어보는 게 먼저겠네요.”

“카이라트, 그만.”

“창고 안에서 시체를 목격한 건 에르잔 쪽이라고 하셨지요? 그는 아페티트의 저주에 걸리지 않았다고.”

정화 체질인 에르잔에게는 아페티트의 저주도 무용지물이었다. 머리카락으로 피부를 베거나 몸을 조종하는 일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다만 그가 품고 있는 증오의 핵이 공기 중을 부유하는 분진이었던 까닭에, 작은 충격이나 마찰열에도 금방 불이 붙어 타오른다는 게 문제였다.

에르잔은 저주의 불길에는 해를 입지 않지만, 실제로 타는 불에는 해를 입으니까.

다른 이들과는 정확히 반대의 상황이었다.

“시체의 상태가 어떻던가요?”

“카이라트. 이야기는 나중에 해요.”

“겪고 나서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아직 기억이 정확할 때 알아야 합니다.”

“카이……!”

순간적으로 그의 이름을 크게 부르려다, 나자예프가 그녀의 외침을 듣고 타격을 입었던 것이 떠올라 다급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혀를 깨물었는지 입안에 비린 피맛이 퍼졌다. 그것을 입 밖으로 흘리면 에르잔이 놀랄 것 같아, 사비나는 얼른 그것을 꿀꺽 삼켰다. 사비나가 피가 멎을 때까지 입을 벌릴 수 없는 틈을 타, 카이라트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에르잔. 북쪽 숲을 통해서 서쪽 창고로 간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비밀히 움직여야 했습니다. 남쪽 광장은 탁 트여 있어 누군가의 눈에 띌 가능성이 있었으니까요.”

“왜죠? 아페티트의 위험성을 듣지 못했을 리가 없는데. 적어도 누군가 도움 될 사람을 데려갔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카이라트의 질문에 에르잔의 미간이 좁아졌다. 카이라트의 질문에 대답하려면 네나뷔스테가 내건 조건부터 하나하나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원래 사비나는 서쪽의 핵을 먼저 흡수할 셈이었지만, 간밤에 비밀히 움직인 것은 오딜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는 사비나를 걱정하면서, 그녀가 서쪽에 가지 못하도록 시간을 끌고자 하는 태도를 보였다.

오딜이 방해꾼이 되면 낭패라고 생각한 사비나는 그날 밤에 바로 움직였다.

아페티트를 붙잡지는 못했지만, 증오의 핵을 흡수하는 데는 성공했다.

자신도 부상을 입었으나 목숨에는 지장이 없으니 치료를 받으면 금방 나을 것이다.

사비나를 울게 만들긴 했지만, 이번에 서쪽의 핵을 흡수하면서는 실수를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카이라트는 마치 에르잔과 사비나가 굉장히 일을 그르쳐서 짜증이 난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도움 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

“오딜은 저희가 서쪽에 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카이라트, 당신이나 나자예프는 눈이 안 보이고, 바르셀다는 움직일 수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상황이었죠. 그 상황에서, 저희가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했다는 겁니까?”

카이라트와 나자예프의 시력이 돌아왔다는 것은 그의 눈에 초점이 맞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었지만, 그들이 오두막을 떠날 시점까지의 상황은 그러했다.

“……나무라는 게 아니고요.”

카리아트는 나직이 한숨을 쉬며 앞머리를 쓸었다. 내내 침대에 누워 있느라 빛을 받지 못해 윤기가 하나도 없는 가느다란 갈색 머리카락이 그의 손가락이 지나간 자리를 따라 비스듬하게 넘어갔다.

“너무 경솔하셨습니다.”

“서쪽의 핵을 흡수하는 데는 성공했습니다. 사비나 아가씨도 다치지 않았고요.”

“에르잔이 다쳤잖아요!”

사비나가 냉큼 끼어들어 항변하자, 에르잔의 굳어 있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그녀에게 감정을 내비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아는데도, 그녀가 자신을 걱정해 주는 것이 좋았다.

에르잔은 순간 웃음이 나올 뻔한 것을 억지로 참으며, 사비나로부터 시선을 돌린 채 대답했다.

“아가씨. 당신을 지키는 게 제 임무입니다.”

“늘 그 소리…….”

“아무튼, 저희가 서쪽 창고에 들어간 일이 당신들에게 어떤 해를 입히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만.”

에르잔의 손은 어느새 사비나의 어깨를 끌어당기듯이 안고 있었다. 그녀에게 부축을 받는 신세라는 자각이 없는 듯했다. 사비나는 에르잔이 저를 의지하지 않는 것이 서운했으나 어깨를 안아 주는 손은 싫지 않았으므로 얌전히 있었다.

“덕분에 아페티트가 도망쳐 버렸습니다. 그 전에는 어디 있는지 몰라서 <서쪽>이라는 지역에 가둬 둘 수는 있었는데 말이죠.”

“……도망쳤다고요? 누가 말입니까?”

“아페티트를 보셨습니까?”

카이라트의 질문에 에르잔의 표정이 곤혹스러웠다. 에르잔이 창고에서 본 검은 실루엣은 열 사람의 것이었다. 움직임이 다소 기괴한 까닭에 그들을 경계하며 사비나를 감쌌다. 칼을 휘두르면 팔을 뻗으려던 것을 거두고 물러났는데, 서로 엉켜 있어 꾸물렁거리는 검은 덩어리처럼 보였을 때는 마치 의지가 없는 어떤 사물 같았다.

거기서 툭, 하고 두 개의 팔이 잘려 나왔던 것을 기억한다.

“저는 아페티트의 얼굴을 모릅니다.”

“머리카락이 붉고 뱀 같은 생김새를 한 남자입니다. 입이 크고 눈이 황금빛인 것이 특징이죠.”

“창고 안이 어두워서, 검은 그림자밖에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인상착의는…….”

“검은 그림자는 몇 개였습니까?”

카이라트의 질문에 에르잔은 사비나가 물었던 것을 떠올렸다.

“그쪽에 열 개. 저와 사비나 아가씨까지 포함해서 열둘이었습니다.”

“……그럼 아페티트는 거기 없었겠군요.”

카이라트는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더니, 앞쪽 의자에 팔을 걸치고 턱을 괴었다. 허리에 힘이 없어 반듯하게 앉아있는 것이 힘들었다.

“이상하네요. 욕망의 핵만 따로 떼어 놓았을 리는 없는데…….”

“아페티트는 내 눈에만 보였어요.”

사비나가 말을 받았다. 사비나는 아페티트의 환각을 보았다. 에르잔의 검에 베이고, 죽은 줄 알았는데 다시 멀쩡하게 나타나서 사비나에게 말을 걸었다. 에르잔과 키스하면서 훔친 타액을 그의 입안에 흘려 넣자 턱에 구멍이 나서 점점 몸이 녹아드는 것을 보기는 했으나, 에르잔의 반응을 보건대 아마 그것 또한 환각이었을 것이다.

“그럼 대체 아페티트는 어디 있는 거죠?”

“그것보다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카이라트.”

아페티트가 어디로 갔는지, 그의 정체가 무엇인지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아페티트가 보여준 환각 속에서, 어린 사비나는 불에 타 무너져가는 제집과 사람들의 비명을 들으며 죽음을 강하게 염원했다.

“아페티트가 나를…… 반려라고 불렀어요.”

“반려요?”

“반려? 그게 무슨 미친 소리야!”

카밀라와 에르잔이 동시에 뛸 듯이 반응했으나 카이라트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아페티트를 만난 적이 있으십니까?”

“없어요. 하지만 아페티트는 내가 저주를 흡수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내 체질을 알아본 건, 아마 그 남자도 같은 상황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

“같은 상황이요?”

“아페티트도 <저주의 화신>이라고 그랬거든요.”

아페티트<도>.

그 말을 들은 카이라트의 눈이 크게 뜨였다.

“사비나. 당신을 보낸 사람이 누구라고 했지요?”

“네?”

“요양을 왔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누가 당신을 보냈습니까?”

카이라트의 격한 반응에 사비나는 조금 당황했다. 아직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데, 자신의 비밀을 전부 밝힐 수는 없다. 사비나가 어떻게든 말을 돌리고 카이라트로부터 비밀을 캐내려는데, 에르잔이 대신 대답했다.

“사비나 아가씨는 콘바야젠 백작께서 보호하고 계신 분입니다.”

“콘바야젠 백작이라……. 어디서 들어봤는데.”

“알렉세이 오브만 콘바야젠 백작. 현재 황제 폐하의 대리인이십니다.”

“알렉세이라고?”

내내 엎어져 있던 나자예프가 벌떡 일어났다.

늪 속의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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