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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 속의 불-100화 (100/189)

100화

“앗……!”

에르잔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높였다가, 얼른 입을 합 다물었다. 부상 중에 일어나 있는 것을 들켜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그는 제 손안의 푸른 잎사귀를 보고 놀람을 금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에전에 나뭇잎을 태웠을 때는 분명 전부 금빛으로 타서 재가 되어 버렸는데…….’

지금은 에르잔의 손가락이 지나간 부분만 검은 저주가 벗겨지고, 나뭇잎의 본래 색상이 녹색 부분이 드러났다.

‘우연인가? 나머지도 그럴까?’

에르잔이 잎사귀의 남은 부분을 손끝으로 슥슥 문지르자, 꼭 물감이 벗겨지듯이 검은 저주가 사르륵 금빛으로 흩어지고, 잎사귀 본래의 모습이 드러났다. 자신의 정화능력은 하등 쓸모없다고 생각했던 에르잔은, 한 번 더 확인하기 위해 나뭇가지 윗부분의 검은 저주를 건드렸다.

“아, 이런!”

화르륵. 마른 가지는 에르잔의 손길이 닿는 순간 황금빛 재로 변해 사라졌다.

갑자기 능력을 조절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제까지 그가 정화하다가 태워 먹었던 꽃, 나뭇잎, 자갈 같은 것들과는 달리, 떡갈나무의 잎사귀 하나만은 분명히 <저주>만을 따로 정화할 수 있었다.

‘어떤 경우에 함께 불타고, 어떤 경우에 저주만 사라지는지를 알 수 있다면, 능력을 개발할 수 있을 텐데…….’

특정한 조건이 있는지, 아니면 제 컨디션에 따라 다른지, 룰렛을 돌리는 것처럼 랜덤한 결과가 나오는지는 알 수 없었다. 몇 번 더 실험을 해 보면 확실해지리라. 아프게 쑤셔 오는 등의 통증을 참으며 창 너머로 손을 더 뻗었을 때, 카밀라의 비명이 들렸다.

“꺄아아악!”

사비나의 비명이 아니라는 것에 다행이라고 안심할 수는 없었다. 카밀라는 사비나와 함께 나가지 않았던가? 그녀가 비명을 지를 만한 일이라면 위급상황이다. 에르잔은 서둘러 창문에서 팔을 빼내다가 창틀에 그만 팔을 긁히고 말았다.

“읏……!”

살이 쓸려 아프지만, 나무 가시에 찔리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거면 되었다. 어서 사비나와 카밀라가 있는 미사실로 향해야 한다고 판단한 에르잔은 문고리를 잡아 돌리려 했다.

철컥. 철컥.

에르잔이 문고리를 돌리려 해도 어째서인지 문이 열리지 않았다. 안에서 뭔가 부품이 빠져 잠긴 것일까. 에르잔이 힘으로 부수려던 그때, 둥근 문고리가 쑥 하고 빠지더니 붉은 실이 뱀처럼 머리를 들이밀었다.

붉은 실이 아니라 붉은 머리카락이다.

숲속에서 사비나를 다치게 했던, 그리고 방금 전 문틈에 끼어 있던 시궁쥐를 옭아맸던 붉은 머리카락과 똑같은 선명한 핏빛이 눈에 띄었다. 머리카락이 어째서 사람의 목을 벨 수 있으며 커다란 쥐를 붙들어 맬 수 있는지 따위를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에르잔이 그것을 정화하고자 붙잡으려던 그때, 가느다란 머리카락은 하늘거리며 그의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하필이면 이 어두운 바닥에. 낡은 나무판자의 간격이 듬성하게 벌어져 있는 데다가 옹이구멍에, 잔가시까지 삐져나와 있어 가느다란 무언가를 찾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대로 저주가 깃든 불길한 머리카락을 놓치는 건가. 저 머리카락을 내버려 두면 또 누가 어디서 상처를 입을지 모르는데!

에르잔은 입안을 깨물며 바닥을 내리쳤다. 커다란 발이 밟은 부위만큼 널빤지가 내려앉았으나 정신적인 여유가 없었던 에르잔은 이곳이 로스카옌의 방이며, 벽이나 바닥을 함부로 파손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때.

<키에에엑!>

에르잔의 귀에, 선명한 비명이 들렸다.

“뭐지?”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창문 틈 사이로 몸을 숨겨 빠져나가려 했는지 기울어진 틈에서 황금빛의 가느다란 실이 불타올랐다가 재가 되어 사라졌다.

“어, 어떻게……?”

저쪽은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에르잔은 분해서 발로 바닥을 쳤을 뿐인데, 창틀에 붙어 있던 머리카락이 어째서 에르잔의 정화의 불꽃에 불타 사라졌는가.

그리고 어째서 이전과는 달리, 머리카락이 불타 사라질 때 괴물의 단말마와 같은 비명이 들렸는가.

사고할 겨를은 없었다. 머리카락은 불타 사라졌고, 지금은 카밀라의 비명의 원인을 파악하는 것이 먼저였다.

에르잔은 어깨로 문의 잠금쇠를 부숴 열었다. 이번에는 문을 부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으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쩔 수가 없었다.

***

사비나는 제 손등을 감쌌다. 지금은 자국이 완전히 사라진 지 오래지만, 그때 분명 고양이의 발톱에 상처를 입어 피를 흘렸다.

만약 아페티트가 상대의 피를 가져가는 것으로 환각을 보여 주는 저주를 걸 수 있다면, 사비나가 우물을 빠져나와 네나뷔스테를 피해 달아날 때 어떻게 해서 환청을 들을 수 있었는지도 설명이 된다.

‘그런다면…… 아페티트는 사람뿐만 아니라, 그런 고양이 같은 동물도 조종할 수 있는 게 분명해.’

본래 그는 어릴 적부터 동물의 사체를 실로 엮어 조종하려 했다고 카이라트가 말하지 않았던가.

아페티트가 보여 준 창고 안의 환각 속에서, 사비나는 제 마을과 어머니와 살던 집이 불타오르는 것을 보며 어린 시절의 자신이 미친 듯이 <죽음>을 외쳤던 것을 떠올렸다.

저주에 잠식된 사람은 대체로 죽지만, 살아남더라도 뭔가 평범한 사람과는 다른 이질적인 특성을 가진다.

카밀라의 경우에는 얼굴 한쪽이 무너지고 다리를 절게 되었으며, 나자예프는 양 눈동자에서 눈동자가 녹아내리듯 청록빛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으며, 카이라트는 비록 아페티트에 의한 것일지언정 눈이 멀고 혀를 조종당해 술자가 원하는 말을 뽑아내게 되었다.

하지만 저주를 견뎌 낸 사람이 항상 어떤 상처를 입는 것으로 끝나는 건 아니다.

사제인 로스카옌은 둘째 치더라도, 오딜은 몸에 상처 난 구석이 없어 보였다. 말투는 원래 험했다고 하고, 위생을 신경 쓰지 않는 것도 정도가 조금 더 심해졌을 뿐 원래 성격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카밀라의 증언으로 미루어 보아 오딜은 부상을 입거나 신체 어딘가가 손상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저주를 견뎌 낸 것 같았다.

‘카림도 내가 연못을 정화하기 전까지는, 피가 흐르지 않았으니까…….’

저주에 잠식된 인간은 본질이 변한다. 상처를 입은 채로 평생을 살거나, 보통 사람이라면 가질 수 없는 기이한 능력을 발휘한다.

사비나가 제 피부에 닿는 모든 것을 죽음으로 이끄는 죽음의 화신이 된 것 또한 죽음의 저주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극복해 냈기 때문이다.

‘만약 아페티트의 목적이 사람이나 짐승을 조종하는 것이고, 그가 나처럼 강력한 저주를 걸 수 있는 저주의 화신이라면…….’

사비나가 피부를 맞대거나 피를 뿌리는 것으로 상대를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 것처럼, 아페티트는 제 머리카락에 저주를 심어 대상을 조종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단, 이때 저주를 묶는 매개로써 대상의 피가 필요하다는 거겠지.

“카이라트, 말해 줘요. 아페티트의 저주는 얼마나 오래 지속되나요? 나는 벌써 두 번이나 그를 만났는데…….”

“제 예상이 맞다면, 아마도 한 번에 하나뿐입니다. 두 번 만났다면 아마 당신은 그에게 두 번 피를 빼앗겼을 겁니다.”

무차별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사비나와는 달리, 아페티트는 상대를 죽이는 게 아니라 조종하기를 원한다. 죽어 버리면 시체가 썩어 제대로 움직일 수 없으니, 살아있는 생명체에 저주를 심어 환각을 보여 주거나 신체 일부를 조종함으로써 제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만드는 것이리라.

“두 번…… 그러네요. 확실히 두 번이에요.”

첫 번째는 에르잔과 함께 울타리 아래의 꽃을 정화하는 실험을 하다가 고양이의 발톱에 긁혀서.

두 번째는 에르잔과 함께 북쪽 숲을 통해 서쪽 창고로 건너가려다가, 목에 걸린 머리카락에 그대로 베여서.

‘그럼 이제 아페티트의 환각을 볼 일은 없는 걸까? 또 피를 빼앗긴 적이 있다면, 다음에도 아페티트의 환각을 보고 엉뚱한 행동을 하게 될 텐데.’

에르잔이 부상을 입은 상태니 만약 아페티트에게 홀린다면 그녀가 의지할 구석이 없다. 카이라트도 조종당한 것으로 보아, 아마도 이 마을 구성원 가운데 아페티트의 저주를 제어할 만큼 강력한 저주의 화신은 없을 것이다.

사비나 자신도 홀렸을 정도니까.

“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카이라트. 아페티트를 찾지 못하면, 내가 북쪽 핵을 흡수한다고 해도 마을이 어떻게 될지 몰라요.”

지금은 네 개의 핵이 균형을 이루어 최소한 늙어 죽지 않고, 목이 잘리지 않으면 죽음에 이르지 않는 상태지만.

만약 사비나가 네 개의 핵을 전부 받아들여 시간이 멈춘 마을을 원래대로 되돌린다면.

아페티트의 주술에 걸린 사람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쩌지…….”

“뭘 그렇게 걱정하고 그래? 이제까지 잘 해왔잖아.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마, 사비나.”

“나자예프!”

“와우, 제대로 짜릿한데? 사비나한테 이름이 불리는 기분이 이런 거구나. 아주 오싹오싹해.”

아차. 사비나는 얼른 입가를 가렸다. 힘주어 이름을 불리면 병에 걸리는데, 그만 나자예프의 이름을 크게 외치고 말았다.

카밀라는 사비나가 접촉한 정도로는 저주에 걸리지 않는 것 같지만, 나자예프는 그가 저주를 바르셀다에게 넘겨주고 있었을 때의 반응을 보건대 사비나의 저주를 감당할 능력이 없는 자였다. 그녀는 자신을 향해 비틀거리며 다가오는 나자예프에게 얼른 눈인사를 했다.

“나자…… 아니, 미안해요. 내가 그만.”

“왜 사과해? 난 사비나가 내 이름 불러 주는 거 좋은데. 어찌나 앙칼지게 부르는지, 순간 목소리로 후려맞는 줄 알고 골이 띵했어.”

얼굴이 거무튀튀하게 그을린 데다가 머리는 폭죽을 맏은 것처럼 뻗어 있고, 결정적으로 카밀라에게 이리저리 밟히느라 옷이 찢어지고 꼴도 엉망인 나자예프는 그래도 좋다는 듯이 씩 웃으며 사비나에게 다가왔다.

“그나저나 사비나. 무슨 일 있었어? 아까 보니까 카밀라 비명이 들리던데…… 떠헉!”

“네놈이냐, 나자예프!”

방문을 부수고 뛰쳐나온 에르잔이 성체를 담는 성배의 뚜껑을 그대로 날려 나자예프를 맞추는 바람에, 나자예프는 하얗게 눈을 까뒤집고 기절했다.

늪 속의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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