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19. 원하는 것은, 단 하나
사비나가 카밀라와 함께 방을 나간 지 한참 시간이 흘렀음에도, 에르잔은 잠들지 못했다.
상처 때문에 쉬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몸은 휴식을 취하듯 늘어져 있지만 그의 머릿속은 전투를 할 때보다도 더욱 긴장으로 가득 차, 어지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미안해요. 사실 예전부터 참을 수 있었어요.」
에르잔에게 말하지 않았던 것을 사과하며, 사비나는 그를 밀어냈다.
주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한 듯한 얼굴로, 더는 에르잔에게 안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사비나의 표정이 아직도 선명했다.
‘내겐 호위기사 자격도 없어. 이제까지 아가씨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으면서, 아가씨의 변화도 눈치채지 못하고…….’
불사신에, 상처를 입어도 금방 나아 버리는 사비나에게 호위기사는 그리 쓸모있는 존재가 아니다.
저주를 흡수하여 마을 사람들을 구할 수 있는 사비나와는 달리, 에르잔의 정화능력은 저주에 물든 대상에게 해를 입힌다.
에르잔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하나뿐이다.
저주를 흡수한 반동으로 괴로워하는 사비나와 몸을 섞어 그녀를 진정시켜 주는 것.
제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에르잔은 그 역할마저 누군가에게 빼앗기는 것이 두려워 사비나에게 매달렸다. 다른 남자가 아니라, 자신을 곁에 두길 바란다고.
사비나가 에르잔의 부탁을 받아들여 주었을 때, 에르잔은 비로소 안도했다. 자신이 있을 곳을 찾은 듯했다. 그 자리를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허세인지도 모르지만, 에르잔은 사비나를 만족시킬 자신이 있었다. 이 마을에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데다, 당시 젊은 남자라고는 나자예프밖에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사비나가 선택하는 것은 자신일 거라고 자신하는 마음도 분명 있었다.
그러나 사비나로부터 사실을 듣고 나니, 에르잔은 다시 혼란해졌다.
이미 한참 전부터 몸을 섞지 않고도 견딜 수 있었는데도 그녀는 그 사실을 비밀로 하고 에르잔의 부탁에 응해 주었다. 그녀가 다정하니까, 거절을 잘 하지 못하니까, 에르잔이 원하는 모습을 보였으니까 그저 따라 주었을 뿐이라고 생각하니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에르잔이 이렇게 된 거, 나 때문인가요?」
사비나가 의아한 얼굴로 건네던 질문을 떠올리자, 벽에 머리를 박고 기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기사라는 놈이 수치도 모르고, 제 주군에게 성욕을 내비치다니. 이제까지 그녀를 안으며 느꼈던 충족감과 행복이 전부 그의 이기심에서 비롯된 허상임을 깨닫자, 마음이 다시 텅 빈 기분이 들었다.
‘사비나 아가씨께서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시는 거지?’
아버지가 붙여 준 호위기사. 별로 쓸모는 없으나 거절할 명분이 없어 곁에 두는 존재. 그녀가 하는 일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도 않고, 때로는 방해가 되는 남자. 먹기 거북할 정도로 한가득 음식을 만들어 와 그녀에게 부담을 주고, 청소를 해야 한다는 핑계로 그녀의 사적인 공간에 아무렇지도 않게 발을 들였다.
이불을 덮어 주면 밀어낼 만큼 몸에 뭔가를 걸치기 싫어하는 사비나가 알몸으로 자는 것을 에르잔에게 들킨 뒤로는 거의 항상 옷을 입고 잠들었다. 얼마나 불편했을까.
‘나는 사비나 아가씨께 부담과 불편밖에 주지 못하는, 그런 형편없는 남자였구나.’
오딜이 그랬던가. 기사는 몰라도 개가 될 소질은 있어 보인다고. 개는 주인에 대한 충성심이라도 있는데, 에르잔은 그렇지도 않았다. 매번 제 욕심으로 사비나를 곤란하게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비나를 향한 이 감정이 충성심으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아가씨를 어떻게 생각하는 거지?’
에르잔은 알 수가 없었다. 사비나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속이 꽉 막혀 오는 기분이었다. 처음 그녀와 함께할 때는 마치 깃털이 살랑거리듯 간질간질하고 애틋했던 마음이 지금은 날카로운 바늘이 되어 심장을 아프게 찌른다. 사비나와 함께 있을 때는 늘 그를 행복하게 하던 따스한 충만감이 그녀가 그의 시야에서 벗어나면 썰물처럼 쓸려나갔다.
사람이 혼자가 된다는 건 이토록 외로운 일이었던가. 이제까지 늘 혼자였음에도 느끼지 못했던 무거운 감정이 숨이 막힐 정도로 그를 짓눌렀다. 문득 숨이 막혀 와, 에르잔은 의식해서 크게 숨을 내쉬고는 손바닥으로 눈가를 감쌌다.
“사비나 아가씨…….”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 하얀 피부. 무채색으로 이루어진 그녀의 모습. 무척 조용하고, 사람의 시선이나 손길이 닿지 않는 장소를 좋아하는 사비나. 에르잔이 가까워지면 기겁하며 멀어지고, 대답은 「아니요」와 「괜찮아요」뿐이었던 사비나.
타인과 거리를 두고 싶어 하는 그녀의 벽을 부수고 에르잔이 성큼 들어왔을 때, 사비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무엇을 느꼈을까.
놀라움? 어색함? 불안? 공포?
어느 쪽이든 긍정적인 감정은 아닐 터였다. 자신 때문에 사비나가 얼마나 곤란해했을지를 떠올리니 속에서 뭔가 울컥 치밀어 올라, 에르잔은 입안을 깨물었다.
‘내가 더는 도움이 되지 않으면…… 사비나 아가씨에게 필요가 없으면, 나는 어찌해야 하지?’
창고가 폭발할 때 사비나를 감싸 무사히 지켜 낸 것이 유일한 에르잔의 공로였다. 그러나 덕분에 당분간 움직일 수 없는 부상을 입어 버렸다. 사비나로서는 어차피 다쳐도 얼마 지나지 않아 말끔히 낫는데, 에르잔이 감싸는 바람에 괜히 그를 상처 입혔다는 죄책감만 느낄 것이다.
처음으로 그녀를 안전하게 지켜 냈다는 보람마저 사라진 자리에는 지독하게 아픈 상처만이 남았다.
에르잔은 눈물이 샘솟기 시작하는 눈가를 눌러 울음을 참았다. 한 번 울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을 것 같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찌익.
어디선가 쥐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깜박여 눈물을 털어 내고 문가를 바라보니, 웬 시커먼 시궁쥐 한 마리가 문틈 사이에 끼어 있었다.
누군가 발견하면 더럽다며 빗자루로 쳐서 내쫓을 시궁쥐가 끙끙거리며 문틈으로 몸을 비집어 넣는 꼴이 문득 저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누구에게든 불편을 주는 존재라는 점이.
‘내가 여기에 머무는 의미가 있을까?’
충성을 맹세해야 할 주군에게 정욕을 품고, 지켜야 할 주군을 곤란하게 만드는 자신은 이제 필요 없는 존재가 아닐까.
에르잔이 아무리 머물 곳을 찾고자 해도, 그가 있는 장소는 항상 그를 감당하기 버거워한다. 부모가 그를 버린 것처럼, 안 그래도 비좁은 고아원에서 덩치가 큰 에르잔 때문에 다른 원아들이 더욱 불편하게 잠을 청해야 했던 것처럼, 황궁기사단 시험에 합격해도 부적합 판정을 받아 내내 대기해야 했던 것처럼.
에르잔이 있을 곳은 어디에도 없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이는 어디에도 없다.
저주받은 마을에서조차, 에르잔은 구원자가 아닌 민간인에게 피해나 입히는 불한당에 지나지 않는다.
겨우 자신이 있을 자리를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에르잔이 서 있던 자리는 볕이 잘 드는 들판 위도 단단한 바위 위도 아닌 금이 간 살얼음판 위였다. 발밑이 사라져 가는 것을 망연히 바라보며 에르잔은 자신에게 물었다.
너는 무엇을 하고 싶으냐고.
‘나는 사비나 아가씨께 도움이 되지 않아.’
에르잔은 인정하기로 했다. 자신의 무능함과 무력함을 긍정하자 무겁게 자신을 짓누르던 죄책감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에르잔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눈가를 문질렀다.
찌익. 찍.
다시 쥐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문가를 보니 문틈에 끼어 끙끙거리던 시궁쥐가 어느새 빠져나와 있었다. 네 발을 바쁘게 움직이면서도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어째서인가 싶어 눈을 가늘게 하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꼬리가 일자로 쭉 당겨져 있어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사람이 당기는 건 아닐 테고…… 뭔가에 걸렸나?’
만약 저 시궁쥐가 사비나의 거처에서 모습을 드러냈다면 단번에 쳐 죽여 시체까지 불에 태웠을 테지만, 이곳은 교회였고 에르잔은 살생을 즐기는 취미가 없었다. 비록 더러운 시궁쥐라고 한들 잠시 자신의 모습을 겹쳐 봤기 때문일까, 살고자 발버둥 치는 모습이 문득 안쓰러워 에르잔은 몸을 약간 일으켰다. 등줄기가 찌르르하게 저려왔으나 고통에 익숙해진 탓인지 그렇게까지 아프지는 않았다. 침대 밖으로 상체를 내민 에르잔은 그의 손을 피하려는 듯이 발버둥 치는 쥐와 문틈 사이에 걸려 있는 무언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매끈하고 가느다란 무언가가 그의 손끝에 닿았다. 쥐가 벗어나지 못하고 발버둥 치기에 무슨 갈고리나 밧줄이라도 되는가 싶었는데, 그것은 실보다도 가늘었다. 익숙한 감촉이었다.
‘설마 머리카락인가?’
에르잔이 본질을 파악하기가 무섭게, 손끝에서 황금색의 불길이 일어나 머리카락을 태워 버렸다.
“아, 이런!”
에르잔의 정화능력은 저주와 결합한 대상을 구분 짓지 않고 태워 버린다. 발버둥 치는 모양이 가여워 구해 주려 한 건데 불태워 죽이다니. 아차 싶어 얼른 손을 도로 물린 에르잔의 팔 그림자 아래서 꼬리가 긴 그림자가 찍,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어라?”
제 꼬리를 잡아당기던 것이 불에 타 사라지자, 이때다 싶었는지 후다닥 달려가 바닥의 널빤지 틈으로 몸을 구겨 넣고 숨어 버렸다.
에르잔이 불태운 머리카락은 금빛 가루로 바스라져 바닥에 떨어졌다가, 이내 사라졌다.
방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어떻게 된 거지?”
에르잔의 손길에 불타올랐다면 그 머리카락은 분명 저주가 깃든 사물일 텐데, 거기에 걸려 옴짝달싹도 못 하던 쥐는 함께 타들어 가지 않았다.
‘그저 걸려 있었을 뿐 저주에 오염되지는 않았던 건가? 아니면…….’
에르잔은 몸을 일으켜, 벽을 붙잡고 힘들게 일어섰다. 등의 상처가 욱신거렸으나 그런 것을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에르잔은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걷었다. 에르잔이 오기 전까지만 해도 바르셀다가 쉬고 있던 이 방은, 낮에도 편히 숙면을 취할 수 있도록 암막 커튼이 쳐져 있었다.
에르잔은 창문을 약간 열고, 그 너머로 손을 내밀었다. 나뭇가지가 늘어진 끝에 달랑거리는 메마른 잎사귀가 보였다.
‘잎이 넓은걸. 끝은 물결 모양이고…… 떡갈나무인가?’
에르잔이 검게 물든 잎사귀 표면을 손가락의 배 부분으로 문지르자,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버석버석하던 검은 잎사귀의 한중간에 동그랗게 금빛이 일더니, 촉촉한 표면 위로 잎맥이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늪 속의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