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아!”
사비나가 짧은 신음과 함께 손을 빼내자, 카이라트는 몸을 비틀어 입안에 고여 있던 피를 마저 뱉어 냈다.
“하나가 더 심어져 있었을 줄이야. 방심했네요.”
“카이라트, 아직 말하면 안 돼요. 당신 혀가…….”
“……후우. 금방 낫습니다. 이 마을에서는.”
카이라트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발음이 불명확하긴 하지만, 이번에는 확실히 사비나가 알던 카이라트의 목소리였다. 그 이상한 음색은 아페티트의 것이었을까? 아니면 아페티트가 카이라트에게 건 저주를 활성화할 때 나오는 신호인 걸까.
“사비나, 카이라트. 괜찮아?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카밀라가 다가와 두 사람을 보챘다. 아페티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카밀라로서는 사비나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카이라트를 향해 혼자서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카이라트가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아페티트가 카이라트를 조종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사비나는 어떻게 말을 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결국 솔직하게 대답하기로 했다.
“내가 아페티트의 환각에 걸린 모양이에요.”
“환각?”
“교회 뒤의 창고에서, 에르잔과 내게 보이는 광경이 다르다는 걸 알았거든요. 에르잔에게는 저주가 통하지 않으니, 나 혼자서만 환각을 보고 있었나 봐요.”
“그럼 아까 무슨 소리가 들린다던 것도 환각이야? 아니, 환청인가? 그런데 나는 왜 안 들렸지?”
그것이 이상했다. 에르잔은 저주의 영향을 받지 않아서라고 치더라도, 사비나가 홀릴 정도의 저주라면 카밀라에게도 당연히 영향이 갈 터인데.
어째서 아페티트가 카이라트의 혀를 조종해 말하는 음성은, 사비나에게만 들렸던 걸까.
“아페티트는, 뭐든지 자기 뜻대로 하려고 했으니까요.”
베인 혀가 아픈지 얼굴을 찡그리면서, 카이라트는 입안에 손가락을 넣었다. 남자치고는 가느다란 긴 손가락 끝에 붉은 피가 묻어났다. 그는 피와 타액으로 뒤섞인 액체를 마치 물감이라도 되는 양 의자의 등받이 위에 원가 이상한 도형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카이라트. 뭘 그리는 거예요?”
“이쪽이, 교회…….”
원을 그리고 방위 표시를 한 뒤 원의 왼쪽 부위를 피 묻은 손가락 끝이 짚었다. 아페티트가 갇혀 있는 서쪽이다. 카이라트는 교회 옆에 다시 작게 원을 그렸다.
“움직일 수 있는 범위는 여기까지.”
다친 혀 때문인지 말이 짧았으나, 카이라트가 무엇을 설명하는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피로 그려진 동그라미는 작지만, 실제로는 교회 옆의 창고부터 서쪽 숲 전역을 아우르는 넓은 범위를 가리키는 것일 터. 그리고 그 범위가 바로 아페티트가 <욕망의 핵>을 품고 있을 때 그가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제한하고 있던 공간일 것이다.
“내가 핵을 흡수하는 바람에, 아페티트가 <서쪽>을 벗어날 수 있게 되었군요.”
사비나의 말에 카이라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에 힘이 빠져가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카밀라가 얼른 사비나의 어깨를 붙잡고 팔을 쓰다듬었다.
“사비나. 너 때문이 아니야! 너는 우리 마을을 구해 주었는걸. 제대로 사정 설명을 안 한 카이라트가 나쁜 놈이지!”
사비나를 위로하고 싶은 건지, 오라비를 욕하고 싶은 건지 모를 말을 내뱉고 카밀라가 카이라트를 쏘아보자, 그는 푹 고개를 숙였다. 다시 피로 그림을 그리려 했지만 상처가 그새 아물었는지, 카이라트는 피 섞인 침을 옷소매에 뱉어 내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카이라트. 대체 왜 말을 안 한 거야? 네가 제대로 사비나한테 설명만 했어도 이런 일은 없었어. 네 연구가 사람 목숨보다 중요하다는 거야?”
“카밀라. 너무 다그치지 마세요.”
“사비나, 왜 감싸려고 해? 이 자식은 지금 너를 위험에 처하게 한 장본인이야. 너야말로 카이라트한테 화를 내야 하는 입장이라고!”
“……나는 화나지 않았어요.”
“에르잔이 다쳤는데도?”
에르잔.
그 이름에 다시 몸이 뻣뻣하게 굳는 것이 느껴졌다.
사비나는 제 몸의 안위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어디를 다치든 베이든 신경 쓰지 않았다. 죽을 일도 없지만, 만약 죽는다고 한들 원하던 바였으니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에르잔은 다르다. 그녀를 호위하는 기사는 상처를 입으면 아파하고, 숨이 끊어지면 죽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래요. 에르잔이 다쳤죠. 나 때문에.”
“사비나. 그건 너 때문이 아니라…….”
“카이라트, 대답해요. 아페티트의 뭘 알아내려고 나를 이용했죠?”
사비나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마치 그녀의 몸이 얼음장처럼 차게 느껴져, 카밀라는 흠칫 놀라 어깨에서 손을 뗐다.
사비나가 걸치고 있는 흰 로브 안에서 뭔가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불에 타서 엉망이었던 루바하가 바스러지는 걸까. 카밀라는 사비나의 발아래를 내려다보았다가, 숨을 삼키며 뒤로 물러났다. 사비나의 발아래 나무판자가 거뭇하게 썩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사비나. 너한테서 저주가 흘러나오고 있어!”
“미안해요, 카밀라. 나한테서 떨어져요. 지금은 자제가 안 돼서.”
사비나가 죽음의 저주를 컨트롤할 수 없다고는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어떤 사람을 언제 어떻게 죽게 할지 선택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녀와 동급의 저주의 화신이 아닌 한, 마음만 먹으면 사비나는 누구라도 죽일 수 있었다.
이 저주에 물든 마을의 생존자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비나. 당신이 처음 에르잔과 함께 저희 집에 방문했던 때를 기억하십니까?”
“기억해요. 옷을 빌려준 사람이 누군지 찾아가 인사를 하려고 했죠.”
“그때 눈 안쪽에서 반응이 왔습니다.”
카이라트는 제 눈을 가리켰다. 무슨 색인지 판단할 수 없을 만큼 혼탁한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그리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으나, 사비나는 그 눈빛에서 내내 저주에 시달린 자의 고통과 피로를 읽어 냈다.
“눈이 튀어나올 것 같아 발작적으로 몸을 뒤틀었지요. 카밀라가 놀라서 그릇을 깼고.”
“눈 안쪽…… 아페티트가 심어 놓은 저주가 반응했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때 집안에서 뭔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던 건, 사비나가 문을 두드린 탓은 아니라는 뜻이다.
“카이라트! 그건 네가 문 쪽을 가리켜서 무서워서 그런 거야!”
“문 쪽을 가리킨 것만으로 알아들었다는 거잖아.”
“그건, 밖에 있는 사람이 저주로 너를 어떻게 하려는 줄 알고……!”
카밀라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항변하다가, 사비나를 돌아보았다. 희뿌연 창문 너머로 녹색 눈동자와 마주쳤던 것이 기억난다. 카밀라는 마치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숨어서 쥐죽은 듯 소리를 내지 않았고, 사비나는 그녀가 자신을 만나기 꺼려 한다고 생각해 돌아가려 했다.
그런데 돌아가려고 돌무덤이 있는 오두막을 빠져나오자, 그다음에 카밀라가 달려와 사비나를 불러 세웠다.
그녀의 부탁을 받고 오두막으로 들어갔을 때, 카이라트는 완전히 안정된 상태였다.
“한번 저주에 물든 사람은 다른 저주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극복하고, 극복하지 못하고는 별개의 문제지만요.”
“내가 저주를…… 흡수할 수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는 거예요?”
“그건 부차적인 것이고.”
카이라트는 의자에 비스듬하게 누워 고개를 뒤로 젖혔다. 나자예프도 그러더니만, 이 마을 남자들은 의자에 삐딱하게 앉는 것이 습관일까?
아니면 허리가 아픈 자들은 원래 저렇게 바르게 앉아 있지 못하는 걸까.
“당신이 내 눈을 낫게 해 주겠다며 가까이 다가왔을 때, 확실히 자각했죠.”
“뭐를요?”
“당신도 나와 마찬가지로, 아페티트에게 조종당하는 처지라는 걸.”
“무슨 소리예요? 나는 그때 아페티트를 만나지도 않았는데!”
“아뇨. 그 전에 마주쳤을 겁니다.”
순서가 다르다. 사비나가 아페티르를 만난 건 카이라트의 부탁으로 서쪽 우물의 저주를 흡수하고, 남쪽 우물을 통해 빠져나와, 네나뷔스테를 피해 다시 서쪽 숲으로 들어갔다가 아페티트의 목소리를 듣고 발견한 창고로 다가와 문을 연 이후였다.
‘어? 잠깐만. 왜 목소리가 들렸지?’
네나뷔스테를 피해 숲속을 마구 달리던 중, 아페티트의 목소리가 들렸던 것이 기억난다. 그때는 아페티트라는 것을 몰랐지만, 분명 그녀에게 이리 오라며 이끄는 듯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비나는 아페티트와 마주하기 전부터 그의 목소리를, 즉 환청을 들을 수 있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나는 정말로 그 전에는 아페티트를 만난 적이 없어요. 이 마을에 와서 만난 사람이라고는 로스카옌 신부님과 바르셀다, 카림, 카밀라와 당신, 그리고 네나뷔스테가 전부인걸요.”
“아페티트는 상대의 몸에 상처를 내, 그 안에 자신의 저주를 심어 뜻대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피를 빼앗긴 기억이 없습니까?”
“바르셀다를 처음 만났을 때 다치긴 했어요. 네나뷔스테한테 공격을 받았을 때 우도에 조금 베였고요.”
“그밖에는 피를 흘린 적이 없습니까?”
“그 외에는 딱히…….”
거기까지 말했을 때, 사비나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자신에게 옷을 빌려준 사람에게 인사를 하고 싶다며 울타리가 쳐진 광장을 지나면서, 에르잔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의 정화 체질에 대해 설명하면서, 저주에 물든 검은 꽃을 정화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 후에.
“고양이…….”
“예?”
“고양이를 봤어요. 저주에 물든.”
어미로부터 떨어진 듯한 작은 새끼 고양이가 나타나 에르잔을 할퀴려 했지만, 그의 가죽 부츠에는 흠집을 내지 못했다.
에르잔이 만지면 혹 고양이가 정화의 불에 타 죽을까 염려했던 사비나는 그 작은 짐승을 향해 손을 뻗었고, 고양이는 사비나의 손등에 상처를 낸 뒤 숲으로 뛰어들어 갔다.
‘설마 그때, 내 피를 빼앗긴 건가?’
늪 속의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