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사비나가 알던 카이라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녀가 의아한 듯이 쳐다보자,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던 카이라트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로스카옌 신부님이 아페티트를 교회의 탑에 가두는 데는 성공했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지요.”
“무슨 문제요?”
“아페티트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다는 거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죽는 것을 막으려면 욕망의 핵을 서쪽에 두어야 하는데 발견할 수가 없으니 해결법은 하나뿐이었지요. 교회를 서쪽으로 옮기는 것.”
“서쪽으로 옮겼다고요? 교회를?”
“예. 원래 이 마을의 교회는 동쪽에 있었습니다.”
아. 사비나는 에르잔과 함께 처음 마을을 둘러보았을 때를 떠올렸다.
바르셀다가 갇혀 있던 동쪽 첨탑. 원래는 교회의 부속 건물이어야 할 첨탑만이 덩그러니 남겨진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럼 원래는 동쪽 탑에 아페티트와 바르셀다가 함께 있었다는 거네요?”
“바르셀다가 지하에 감금된 건 교회를 서쪽으로 옮긴 이후의 일입니다.”
그러고 보니 카림이 했던 말이 기억난다. 죽은 이들의 뼈를 탑에 빼앗기면 안 된다고 했던가.
「동쪽 탑이요. 무서운 사람이 있어서, 가면 안 돼요.」
「어느 날부터인가, 교회가 서쪽으로 옮겨가면서 동쪽 탑은 갈 수 없는 곳이 되었어요.」
사비나는 카림이 말하는 「무서운 사람」이 바르셀다를 말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바르셀다는 나자예프에게 가는 저주를 대신 받고 있느라 제대로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지하에 걸린 「출입금지」 팻말이 멀쩡했던 것만 보더라도, 그가 자력으로 지하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음은 자명했다.
'카림이 말했던 게 바르셀다가 아니라 아페티트였어? 그가 시체를 빼앗아가서 조종하려 할까 봐?'
그러고 보니 카림은 동쪽 탑이라고 말하며 탑의 위쪽을 가리켰다.
바르셀다가 갇혀 있던 장소는 지하였는데!
“교회를 서쪽으로 옮긴 이상 아페티트는 서쪽 어딘가에 있을 수밖에 없으니, 창고에 시체를 넣어 두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 아페티트가 그것을 노리고 나타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창고에 있던 건, 누구의 시체죠?”
“이 마을을 습격한 군인들의 시체였지요.”
에르잔이 본 열 개의 검은 실루엣.
어두워서 형태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고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 그게 군인들의 시체였다는 건가.
“나자예프는 서쪽 창고에 아페티트가 있다고 했는데요.”
“그야 나자예프에게는 말하지 않았으니까요. 서쪽의 핵을 담당해야 할 아페티트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사실을 알리면 모두가 불안해할 테니, 로스카옌 신부님과 저만의 비밀로 해 두었습니다.”
“그래서 창고에 아페티트를 가둔 척 위장하고, 실제로는 그를 불러내고자 함정을 설치했는데 나타나지 않았다는 거네요.”
“서쪽에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저주의 균형이 깨지지 않았으니, 그곳을 벗어날 수 없는 것도 확실하고요.”
네 개의 핵이 균형을 이루는 상태이기에, 네나뷔스테는 감금되어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남쪽 구역을 벗어날 수 없었다.
아페티트도 서쪽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있지만, 서쪽 구역을 벗어날 수는 없다는 거겠지.
“내가 처음 창고에서 아페티트를 만났을 때, 시체 같은 건 없었어요.”
“그 「처음」이 언제입니까?”
“카이라트, 당신 부탁으로 우물에 깃든 저주를 빨아들이러 들어갔을 때…….”
거기까지 말했을 때, 사비나의 머릿속에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우물 안으로 들어간 사비나는 그곳에 가득한 시체 위에 발을 디디고 섰다. 축축한 살덩이의 감촉을 느꼈던 것은 확실했다.
그러나 사비나가 저주를 빨아들이자, 연못의 시체는 뼈로 변한 것이 아니라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사비나는 깊은 우물 속으로 빠져 물속에서 발버둥 치다가, 물길이 연결된 남쪽 우물을 통해 빠져나왔다.
‘그 시체들은 어디로 갔지?’
우물을 빠져나오고, 네나뷔스테에게 위협을 당해 숲을 통해 서쪽 창고까지 달아나느라 정신없었던 까닭에 내내 잊고 있었다. 우물에 가득하던 시체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찾아야 한다는 것을.
“남쪽 우물로 빠져나와 네나뷔스테를 만나고, 그녀를 피해 숲으로 들어갔다가 서쪽 창고를 발견했어요.”
“그 안에 시체가 없었다고요?”
“그래요. 벽을 타고 새빨간 장미가 핀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문이 열리고 안에서…….”
“장미라고요?”
카이라트가 되물었다. 그 덕분에 에르잔이 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사비나가 보았던, 낡은 창고를 감싸고 있던 유달리 새빨간 장미 덩굴을 에르잔은 보지 못했다.
처음부터 그 주위에는 풀 한 포기 없다고 했던가.
“잠깐만요. 그럼 내가 그때부터 이미 환각을 보고 있었던 걸지도…….”
“환각?”
“아페티트가 지니고 있는 분진 형태의 욕망의 핵 말이에요. 그걸 들이마시고 내가 환각을 보는 바람에 에르잔과 합이 맞지 않았어요.”
“환각이라니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예상치 못한 대답에 사비나가 고개를 들어 카이라트를 바라보았다.
“저와 당신의 소중한 첫 만남이 아닙니까. 아, 물론 추억의 장소는 지금 무너져 버렸지만.”
카이라트의 입술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럼 지금 누가 말하고 있는 걸까?
사비나는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그녀와 카밀라, 카이라트 외에 인기척은 없었다.
“아페티트? 아페티트인가요?”
“사비나. 왜 그래?”
“카밀라. 지금 이거, 누구 목소리에요?”
“……뭐가?”
카밀라가 소름 끼친다는 듯이 어깨를 부르르 떨며 사비나의 옷소매를 놓았다.
설마 카밀라에게는 들리지 않았던 걸까?
“방금 카이라트 말고 다른 남자가 말하는 소리, 못 들었어요?”
“무슨 남자? 무서운 소리 하지 마!”
카밀라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방금 들린 기이한 음성은 사비나에게만 들리는 목소리였다.
어째서 자신에게만 들리는 걸까? 에르잔에게는 저주가 통하지 않아 사비나만 환각을 보았다고 해도, 카밀라에게 저주를 피하거나 정화하는 능력은 없다. 만약 사비나가 환각을 보고 환청을 듣는다면, 카밀라도 분명 같은 환청을 들어야 하는데.
또 아페티트가 환각을 보여 주는 건가. 사비나는 사비나는 온몸의 솜털이 거꾸로 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상흔이 난 목을 따라 찌르르한 열기가 흘러, 사비나는 제 목을 더듬어 상처가 벌어져 피가 흐르는 것이 아닌가 살폈다. 다행히 상처는 벌어지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피를 낭비하는 일은 없을 테니.”
“……지금 뭘 하는 거예요?”
“시체를 뜻대로 조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요. 시간을 멈추면 썩지 않는다고 해도, 의지가 없는 몸을 움직이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사람의 목소리는 맞나 싶을 만큼 기이한 음성.
높은지 낮은지도 알 수 없는데, 발음만은 또렷하게 들렸다.
환각을 볼 때 들었던 아페티트의 목소리와는 다르지만, 말투를 보아하니 아페티트가 맞는 듯했다.
“여러 번 시체를 움직이려 해 봤지만, 무리였습니다. 썩지 않는 육체라고 한들 실로 조종하는 꼭두각시는 그저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는 수준에 그칠 뿐이지요.”
카이라트의 입술이 약간 벌어지고, 한 줄기 피가 흘러나왔다.
아니, 그것은 피가 아니었다.
피처럼 붉은 머리카락.
카이라트의 손등에 감겨 있던 것과 같은 붉은 머리카락이 카이라트의 입속에서 한 올 빠져나왔다.
“의지가 없는 몸의 손가락, 발가락, 눈동자, 입술과 혀까지 일일이 조종하는 건 저 스스로 움직이는 것보다도 더 많은 품이 듭니다. 비효율적이라고 할까요.”
“그래서 당신은 카이라트의 눈에 저주를 심은 머리카락을 넣어 눈을 멀게 하고, 살아 있는 상태로 인간을 조종하려 했나요?”
“인간을 조종하는 건 힘이 들더군요. 실제로 움직이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지요. 가령 이렇게.”
카이라트의 입술에서 흘러내린 붉은 머리카락이 잘게 진동했다. 그것이 꼭 튀어 오르기 위해 잔뜩 몸을 움츠리는 벌레와 같다고 생각한 순간, 핑 하고 머리카락이 튕겨져 나오며 카이라트의 입술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꺄아아악!”
비명을 지른 건 카밀라였다. 사비나는 반사적으로 카이라트에게 달려들어, 그의 입안을 확인했다. 혀를 베인 듯했으나 잘려 나가지는 않았다. 그가 눈을 꿈벅이더니, 생리적인 눈물이 주륵 흘러내렸다.
“우, 읍…….”
“카이라트, 괜찮아요? 혀를 다쳤으니 말하지 마세요.”
사비나는 카이라트의 입술에서 튀어나온 아페티트의 머리카락을 찾으려 했지만, 등불을 켜도 어슴푸레한 미사실에서 가느다란 머리카락 한 올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비나는 카이라트의 손등에 감긴 머리카락을 풀어냈다. 카이라트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과는 달리, 손등에 감겨 있던 것은 정말로 주술의 효력이 다했는지 평범한 머리카락이었다. 사비나는 그것을 반으로 뚝 끊어, 손가락에 감았다.
“카밀라. 아페티트가 도망쳤어요!”
“뭐? 무슨 소리야?”
방금 카이라트의 입에서 튀어나온 붉은 머리카락. 거기에 아페티트의 저주가 심겨 있다.
하지만 저주의 흔적을 쫓으려 해도 느껴지는 것이 없었다. 욕망의 핵을 흡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페티트 쪽이 주술사로서는 한 수 위라는 걸까? 사비나는 쿨럭거리며 피를 토하는 카이라트의 입과 눈가에 손을 대고 저주를 흡수했다.
카밀라의 저주를 흡수했을 때와 같은 끈적이는 것이 사비나의 몸 안으로 흘러들었다. 농도는 강하지 않았으나 평범한 인간이었던 카이라트의 눈을 멀게 하고 움직임을 불편하게 만들기엔 충분했으리라.
‘아페티트는 대체 정체가 뭐지?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거야?’
카이라트의 몸에 남아 있던 저주를 거두어들이자, 피범벅이던 입술이 다물리면서 남자의 이가 사비나의 손가락을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