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 속의 불-96화 (96/189)

96화

“카이라트의 눈이 먼 게 아페티트 때문이었나요?”

“……제대로 설명하자면 너무 길어질 테니 그런 것으로 하죠.”

“카이라트.”

“술자가 저주를 거두어들이기 전에 사망하면, 주술은 폭주합니다. 아페티트가 죽었다면 제 눈 안에서 이게 터져 버렸을 거예요.”

끔찍한 소리를 태연하게 말하면서, 카이라트는 쓴웃음을 지으며 의자에 앉았다.

아무래도 너무 오랫동안 침대 생활을 해서일까, 기대어 서 있는 것보다는 앉아 있는 쪽이 편해 보였다.

“아페티트는 주술사인가요?”

“아닙니다. 당사자도 아마 부정할 거예요.”

“그렇다면 아페티트의 정체는 대체 뭐죠?”

아페티트는 사비나에게 자신을 <악마>라고 칭하며, 그녀와 같은 저주의 화신이라고 말했다.

물론 그 자신이 주술사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숲에서 사비나는 저 붉은 머리카락에 걸려 목을 베였다.

평범한 머리카락이 사람의 목을 벨 만큼 날카롭지 않다는 것 정도는 사비나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제 목에 이런 상처가 생겼을까.

그리고 어째서 창고 안에서 사비나와 에르잔은 서로 다른 것을 보았나.

“사비나. 아페티트를 만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줄 수 있나요?”

“제 질문에 먼저 대답해 주세요.”

이번엔 속지 않는다. 카이라트는 예전에도 사비나를 이용했다. 시체가 가득한 우물의 저주를 흡수해 달라는 부탁을 의심도 없이 수락한 건 카림이 연못에서 어머니를 찾은 것처럼, 카이라트에게도 우물에서 꺼내고 싶은 사람이 있기 때문일 거라고 넘겨짚었다.

하지만 사실 카이라트의 목적은 다른 거였다. 사비나가 우물에 깃든 저주를 빨아들이면서 이루어 낸 <저주의 일시적 불균형>이 네나뷔스테가 품고 있는 저주의 핵에 영향을 미치는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이 마을의 저주가 자신의 연구로 인해 일어난 것인지 확인해야 한다는 이유로 15년간 카밀라를 속여 온 남자가 아닌가. 사비나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면, 이용을 당하든 손해를 보든 신경 쓰지 않았으나 카이라트의 수법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이 쥐고 있는 패는 내보이지 않고, 상대로부터 원하는 정보를 취합한 후에 보여 줘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패만 선별해서 내놓는다.

자신 혼자만도 아니고 에르잔과 다른 이들의 안전까지 담보로 걸린 상황에서 불공정한 거래를 계속할 만큼 사비나는 무모하지 않았다.

“아페티트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걸 숨기지 말고 내게 말해 줘요, 카이라트. 그러면 나도 말할 테니까.”

좀 전까지만 해도 당혹스러워하던 검은 눈동자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녀의 진지한 시선을 피하는 것처럼 카이라트는 붉은 머리카락을 손등에 빙빙 둘러 감았다. 기이하게도, 숲에서 사비나의 목을 베었던 것과는 달리 카이라트의 손등에는 상처 하나 나지 않았다.

정말로 평범한 머리카락인 것처럼.

“사비나. 네크로맨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네크로맨서?”

처음 듣는 단어에 사비나가 고개를 가로젓자 카이라트는 간단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동화 속의 마법사가 동물을 패밀리어로 삼아 부리는 것처럼, 네크로맨서는 시체나 해골처럼 이미 죽어서 움직일 수 없는 것을 뜻대로 조종하는 존재입니다. 꼭두각시처럼 말이죠.”

시체를 꼭두각시처럼 조종한다.

그 말에 창고에서 에르잔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에르잔이 본 열 명의 실루엣. 사비나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던 그것.

그 열 명의 실루엣은 아마도 환각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저주가 통하지 않는 에르잔에게도 보이지 않았을 테니.

사비나가 느낀 저주의 기운, 저주에 물든 인간의 기척은 하나였다. 자신이 본 아페티트의 모습이나 불에 타서 무너지는 마을의 모습은 환각이라 치더라도, 죽음만큼이나 생명의 기척에 예민한 사비나가 열 명이나 되는 사람의 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는 없다.

“아페티트가…… 시체를 조종하는 네크로맨서인가요?”

“당사자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아닙니다.”

카이라트는 제 손을 들어 손등에 감긴 붉은 머리카락을 사비나에게 보여 주었다.

피처럼 붉은 머리카락. 카이라트의 손등이 멀쩡한 것을 보면 분명 평범한 머리카락 같은데, 숲에서는 어떻게 그녀의 목을 벨 수 있었을까.

“제가 불로불사의 주술을 탐구하는 데 몰두했던 것처럼, 아페티트는 시체를 조종하는 술법을 만들어 내고 싶어 했죠. 저처럼 연구하는 성미는 아니었던지라, 죽은 닭이나 개의 사체에 줄을 묶어서 움직여 보는 정도였지만.”

카이라트의 말을 듣고 있던 카밀라가 냉큼 끼어들었다.

“아페티트가 그런 짓을 했어? 나는 전혀 몰랐는데.”

“어른끼리만 공유하던 정보였지. 애들한테까지 알려서 좋을 게 없잖아. 괜히 불안감만 부추기고.”

“카이라트도 나랑 6살밖에 차이 안 나면서.”

“나도 우연히 알게 된 거야.”

이웃집의 가축을 몰래 잡다가 번번이 걸리고, 사냥을 나섰다가 다쳐 오기 일쑤였다. 저러다 언제고 사람을 잡겠다 싶어 몰래 감시했지만, 아페티트는 살인을 할 만큼 미쳐 있지는 않았다. 조금 특이하고 잔인하고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구석은 있어도, 나자예프와는 달리 때와 장소를 가릴 줄 안다고 할까. 사람들 앞에서는 티를 내지 않았다.

“만약을 대비해 오딜이 감시하고 있다는 걸 아는지, 눈에 띄는 행동은 하지 않았어.”

“오딜 아저씨, 하는 일도 없으면서 여기저기에는 잘도 엮여 있었네.”

“나도 처음에는 그저 수상하다는 정도밖에 몰랐어. 내게 주술에 대해 알려 달라고 부탁해서 알았지.”

아페티트는 시체를 움직이고 싶어 했다. 그것을 조종하고 싶어 했다. 꼭두각시 인형을 부리듯, 시체를 줄로 묶어 움직이면서 마치 자신이 마법사가 된 듯한 우월감을 느끼고는 했다.

그러나 그는 곧 한계에 부딪혔다.

시체에는 의지가 없다. 아페티트가 움직여 주지 않으면 당연히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데, 묶어서 조종하는 것으로는 제대로 컨트롤할 수가 없었다. 뜻대로 움직이게 하는 것도 무리였지만, 제일 문제는 생명 활동을 하지 않는 육신이 빠르게 썩어서 무너진다는 거였다. 떨어진 팔다리를 끈으로 엮어 봐야 달랑거리며 움직일 뿐, 여기를 연결하면 저기가 떨어진다.

아페티트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카이라트가 연구하던 불로불사의 주술.

아페티트가 욕망하던 죽은 자의 육체를 조종하는 주술.

일견 연관이 없어 보이지만, 두 주술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생명의 죽음을 뜻대로 움직이려 한다는 것.

카이라트는 네 개의 핵을 합쳐 불로불사의 주술을 만들고자 했지만, 실제로 이 마을에 깃든 저주는 네 개의 핵이 균형을 이루어 시간을 멈추는 주술이었다.

그렇다면 아페티트도 카이라트의 연구를 바탕으로 죽은 이의 몸을 조종하는 주술을 개발해 낸 것은 아닐까.

“혹시 카이라트의 연구자료를 훔쳐 간 게 아페티트 아니에요?”

“그건 아닙니다.”

“어떻게 확신하는 거예요?”

“아페티트는 글을 읽을 줄 모르거든요.”

“……네?”

15년 전 비극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곳은 평범한 산골 마을이었다. 목축을 하고 밭을 일구는 것이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마당에, 구태여 글자를 익힐 이유가 없었다.

대부분은 자기 이름이나 간단한 글자만 읽고 쓸 수 있는 정도로, 카이라트처럼 책을 읽을 수준의 지식을 가진 자는 소수였다.

자료를 몽땅 훔쳐 간 것도 아니고, 딱 원리만 정리해 놓은 걸 가져갔다. 범인은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다.

“공범이 있지 않은 한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 마을에서 모든 글자를 읽을 줄 아는 사람 가운데 아페티트처럼 시체를 조종하는 주술에 흥미가 깊은 사람도 없었죠.”

그래서 범인을 잡지 못했다. 연구자료가 사라지고도 아페티트는 계속 마을에 남아 있었으니까. 이따금 자리를 비우더라도 산 아래 도시까지 다녀올 만큼 오래 시간을 비우지는 않았다.

“이 마을에,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있는데요?”

“살아남은 이들 중에서는 저와 로스카옌 신부님뿐입니다.”

카이라트의 말에 사비나는 네나뷔스테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든 군인들을 데려온 남자가 로스카옌을 군인들과 함께 교회에 밀어 넣고 돌아갔다고. 그리고 며칠 후, 로스카옌이 멀쩡한 모습으로 교회에서 나왔을 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고.

“네나뷔스테는 로스카옌 신부님이 저주를 내린 장본인이라고 확신하는 모양이지만, 그건 아닙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하지만 석연치 않은 부분은 있었다.

네나뷔스테의 말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로스카옌이 숨기는 것이 많은 건 사실이었다.

지금 사비나의 눈앞에 있는 남자와 마찬가지로.

“카이라트. 당신은 아페티트가 범인이 아니라고 확신해 놓고, 왜 내게 아페티트에 대해 물어보는 거예요?”

“그리 친하지는 않았지만 한동안 보지 못했으니까요. 걱정되는 마음이 반, 궁금한 마음이 반입니다.”

“나한테 우물의 저주를 흡수하면서 이 마을에 깃든 저주의 균형을 깨도록 만들었죠. 그게 혹시 아페티트를 자극해서, 그 남자의 입을 열게 하기 위해서였나요?”

사비나의 지적에 카이라트의 시선이 빠르게 옆을 향했다가 도로 되돌아왔다.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내내 눈이 보이지 않았던 카이라트는 제 표정이 얼마나 이상하게 보이는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나를 통해서 아페티트의 뭘 확인하고 싶은 거예요? 그걸 말해요. 그럼 대답해 줄게요.”

카이라트의 표정에서 이상한 낌새를 읽었는지, 옆에 있던 카밀라가 사비나의 옷소매를 꽉 붙드는 것이 느껴졌다. 카이라트는 숨은 쉬는 걸까 싶을 만큼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시계 초침 소리마저 들리지 않아 적막한 미사실의 고요를 깬 것은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이상한 음성이었다.

“그곳엔 시체밖에 없는데, 어떻게 ‘아페티트’를 만났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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