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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 속의 불-95화 (95/189)

95화

사비나는 에르잔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살살 빗어 내리며, 목덜미를 슬그머니 더듬었다. 맞닿아 있던 입술이 움찔거리면서 울컥 목울대가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사비나는 아쉬운 듯이 혀끝으로 에르잔의 입술을 가볍게 핥고는 고개를 들었다. 에르잔이 의아한 듯이 눈을 깜박이자, 그녀는 베개를 움직여 에르잔의 목과 턱 사이에 고정하여 그가 불편하지 않도록 해 주었다.

“에르잔. 많이 아파요?”

“저는 괜찮습니다.”

“거짓말 안 하겠다고 해 놓고.”

사비나가 얼굴을 찌푸리자, 에르잔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거대한 장벽처럼 든든했던 넓은 등이 상처투성이였다. 차라리 저것도 저주로 인한 것이었다면, 제가 흡수할 수 있었을 텐데. 희미하게 어른거리는 등불 아래서도 피가 엉겨붙어 끔찍하게 벌어진 상처는 심각해 보였다. 사비나는 에르잔의 머리카락과 뺨을 쓰다듬고는 손등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무리하지 말고 푹 쉬어요, 에르잔.”

“사비나 아가씨.”

“다친 곳이 등이 아니었다면 편히 누울 수 있었을 텐데…….”

끌어안고 살을 맞대고 싶지만 에르잔은 부상자다. 평범한 사람의 회복 속도가 어느 정도인지는 몰라도, 에르잔이 지금 상당한 고통을 느끼고 있으며 적어도 며칠은 움직이지 못하리라는 것 정도는 사비나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를 쉬게 해 주어야 하는데 막상 일어나려니 아쉬웠다.

미련이 뚝뚝 묻어나는 눈빛으로 손가락을 얽어 깍지끼는 행동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에르잔이 움찔, 어깨를 움직였다.

“에르잔! 움직이면 안 돼요!”

“많이 쉬었습니다.”

겨우 아물어 가던 상처가 도로 터져 피가 흘러내렸으나 에르잔은 아랑곳하지 않고 상체를 일으켰다. 기겁해서 말리려는 사비나의 손을 붙잡아 품으로 끌어당긴 에르잔은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통증에 이를 악물었다.

“읏…….”

“뭐 하는 거예요! 상처가 덧나겠어요!”

“부상을 이유로 의무를 소홀히 할 수는 없습니다.”

“무슨 소리예요?”

“저주를 흡수한 다음, 아가씨를 위해 제가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혹여 신음이 흘러나오지 않도록 잔뜩 억누른 목소리가 귓전에 낮게 울렸다. 에르잔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차린 사비나의 뺨이 붉어졌다.

저주를 흡수하면 사비나는 반동을 해소하기 위해 에르잔과 몸을 섞어 왔다. 네나뷔스테의 핵을 흡수하면서부터는 그런 증상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에르잔에게 말하는 것을 잊고 있었다.

아니, 에르잔과 몸을 섞고 싶어서 숨긴 쪽에 가까웠다고 할까.

에르잔은 지금 사비나가 저주를 흡수한 반동으로 성적 충동을 느끼는 상태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녀의 등을 쓸어내리는 커다란 손에 문득 힘이 들어갔다가, 깊은 한숨과 함께 억누르는 힘이 빠졌다.

“에르잔, 이러지 마세요. 나는 괜찮아요. 괜찮으니까…….”

“저 이외의 다른 남자가 아가씨를 모시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럴 일은 절대로 없으니까 얼른 침대에 누워요!”

에르잔의 몸을 밀어내고 싶지만, 혹 상처를 덧나게 할까 두려워 사비나는 말로만 칭얼거렸다. 에르잔의 쇄골을 검은 머리카락이 간지럽히더니, 그녀가 불쑥 고개를 들어 힘겹게 눈을 맞춰 왔다. 눈가가 붉었다.

“이제 더는 저주의 반동을 받지 않아요. 그러니까 에르잔이 나한테 봉사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는 거예요.”

“아가씨? 하지만…….”

“내가 당신을 속이고 있다고 말했잖아요. 사실 예전부터…… 참을 수 있었어요.”

사비나는 민망한지 눈만 옆으로 굴리면서, 입술을 우물거렸다.

그녀의 대답에 에르잔은 상처 때문에 몸에 열이 오르던 것이 찬물을 맞은 듯 식는 것을 느꼈다.

저주를 흡수해도 성욕이 일지 않는다면, 이제 더는 에르잔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뜻일까.

에르잔은 제 품 안에서 꼼지락거리는 사비나를 놓아주었다. 품안의 허전함을 자각하자 다시금 등가죽을 칼로 베어 내는 듯한 통증이 느껴져, 긁힌 신음을 흘리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사비나 아가씨, 그럼 저는…….”

“일단 엎드려요, 어서! 빨리 눕지 않으면 화낼 거예요.”

답지 않은 협박까지 하면서 에르잔을 침대에 도로 엎드리게 하자, 에르잔은 고개만 돌려 사비나를 올려다보았다. 눈을 마주치는 것도 부끄럽고, 그렇다고 에르잔을 불편한 자세로 두고 싶지도 않았던 사비나는 담요를 끌어와 에르잔의 얼굴 위에 덮어 주었다.

“아, 아가씨?”

“어두우니까 이제 잘 수 있죠? 얼른 자요. 나도 나가서 로스카옌 신부님을 찾아봐야겠어요.”

“사비나 아가씨, 가지 마십시오.”

에르잔이 팔을 뻗어 사비나의 손을 붙잡았다. 사실 나갈 생각도 없었는데, 에르잔의 온기가 닿자 괜히 가슴이 뜨끔했다. 사비나는 에르잔의 손을 도로 침대 위로 올려 주려다, 제 가슴 위에 얹었다. 손바닥에 닿는 말랑한 감촉에 그가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계속 숨기고 있어서 미안해요, 에르잔. 이젠 당신이 안아 주지 않아도 버틸 수 있어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네나뷔스테의 핵을 흡수한 뒤로 더는 이상한 충동이 일지 않게 되었거든요.”

사실은 아페티트를 만난 뒤부터였으나, 어쩐지 그의 이야기를 꺼내기 껄끄러웠던 사비나는 시점을 조금 뒤로 미루었다.

“그동안 미안했어요. 당신에게 이상한 일이나 시키고…….”

“사비나 아가씨. 이상한 일이라뇨.”

“그, 그렇잖아요? 그런 거…… 보통 호위기사가 해야 하는 일은 아니잖아요.”

사비나의 말에 에르잔은 대답이 없었다. 담요를 푹 덮어쓴 탓에 그의 표정이 보이지는 않지만, 어쩐지 석연치 않아 하는 것 같다고 사비나는 생각했다. 역시 오랫동안 그를 속였기에 실망한 걸까. 그녀의 가슴에 얹혀 있던 커다란 손이 도로 멀어졌다.

“죄송합니다, 사비나 아가씨. 제가 불민하여 이제까지 눈치채지 못하고 아가씨를 곤란하게 했습니다.”

“아니에요. 말하지 않은 건 나니까…….”

“앞으로 다시는 무례를 범하지 않겠습니다.”

에르잔의 목소리가 한층 어두워졌다. 무례를 범하다니. 말을 하지 않은 것은 사비나 쪽인 것을. 에르잔의 잘못은 아무것도 없다며 그를 달래려는데, 반쯤 열려 있던 문이 벌컥 열리며 카밀라가 뛰어들어 왔다.

“사비나! 괜찮아?”

“카, 카밀라?”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아페티트를 만났다며! 너무 놀라서 자다 말고 뛰쳐나왔어, 내가!”

“카밀라, 진정해요. 에르잔은 휴식을 취해야 하니까, 일단 나가서…….”

“세상에, 에르잔이 다쳤어? 뭘 하다가! 등이 아주 난장판이네!”

“카밀라, 제발……!”

사비나가 카밀라의 옷자락을 붙잡고 문가로 끌어당기자, 그녀도 상황을 파악하고 에르잔을 가리키던 손가락을 조용히 내렸다. 에르잔은 외부인이 아닌가. 자신들과는 달리 회복이 느릴 것이다. 카밀라는 그 에르잔이 어쩌다가 저렇게 다쳤는지 궁금했으나, 환자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두 여자는 방에서 나와 문을 닫고, 예배실로 들어가 등불을 켰다.

“사비나. 어쩌다가 에르잔이 저렇게 된 거야?”

“아페티트의 욕망의 핵을 흡수하다가…… 사고가 있었어요. 창고에 불이 나서 저를 감싸려다가 에르잔이 다쳤거든요.”

“불? 아. 그래서 나자예프가 그 꼴이었구나.”

“나자예프는 함께 온 게 아닌가 봐요?”

“아, 잠결에 부스스하고 커다란 게 불쑥 들어오는 걸 보고 나도 모르게 그만 화병으로 내리쳤거든. 발로 몇 번 밟다 보니까 나자예프인 것 같아서 무슨 일인가 하고 뛰어나왔다가 바르셀다랑 마주쳤어.”

얼굴을 보고 안 것도 아니고 발에 밟히는 감촉으로 알아차렸다는 점이 신경 쓰였으나 지금 중요한 점은 그게 아니었다. 사비나는 교회의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인기척이 전혀 없음을 깨닫고 다시 카밀라에게 물었다.

“바르셀다는 어디로 갔나요? 로스카옌 신부님은 찾았나요?”

“아니. 한밤중에 뜬금없이 우리 집에서 로스카옌 신부님을 찾길래 안 왔다고 했지. 교회에 없으면 오딜 아저씨한테 갔겠다 싶어서 바르셀다한테 길을 알려 주고 나는 바로 교회로 뛰어온 거야.”

“그랬군요…… 카이라트는 그럼 아직 집에 있나요?”

“몰라. 카이라트 따위 내가 알 게 뭐람.”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오라비는 떠올리기도 싫다는 듯이, 카밀라가 진저리치며 고개를 돌렸다. 아직도 화해하지 않은 걸까. 카밀라와 카이라트 사이의 골이 깊어지는 건 좋은 현상이 아니었으나 외부인인 사비나가 말을 얹을 만한 일은 아니었다. 사비나는 옷자락을 매만지며 초조한 한숨을 뱉었다.

“에르잔이 많이 다쳤어요. 로스카옌 신부님이 빨리 오셔야 치료를 받을 텐데…….”

“그 정도로 상처가 심각해? 나자예프는 별로 안 다쳤던데.”

“폭발이 일어났을 때, 나자예프는 창고 밖에 있었거든요. 에르잔은 저를 감싸느라 안에서 그걸 그대로 맞았어요.”

“안에서 폭발이 일어났다고? 그럼 아페티트는? 설마 아페티트도 몸이 걸레짝 된 거 아냐?”

무시무시한 표현을 아무렇지도 않게 쓰는 카밀라와는 달리 사비나는 심장이 차갑게 어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에르잔의 부상만 신경 쓰느라 아페티트를 잊고 있었다. 욕망의 핵은 제대로 흡수했지만, 아페티트는 과연 무사할까? 나자예프도 아페티트의 상태에 대해서는 말해 주지 않았다.

안색이 파리해진 사비나가 교회 밖으로 뛰쳐나가려 하자, 카밀라가 그녀를 붙잡았다.

“잠깐만, 사비나! 로스카옌 신부님이 안 계실 때는 함부로 돌아다니면 안 돼.”

“하지만 아페티트도 그 창고 안에 있었는걸요. 그 사람도 크게 다쳤다면, 빨리 구해야 해요.”

“아페티트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예요.”

언제 왔는지, 문가를 짚고 선 카이라트가 침착한 음성으로 사비나를 달랬다. 걸음은 여전히 불편해 보이지만, 카이라트는 앞이 안 보이는 사람답지 않게 똑바로 사비나와 카밀라를 향해 다가왔다. 가까이 다가온 카이라트의 눈에 초점이 돌아온 것을 본 카밀라의 입이 쩍 벌어졌다.

“카이라트. 눈이 보여?”

“형태만 구분하는 정도야. 색은 알아볼 수가 없어.”

카이라트는 사비나로부터 조금 떨어진 자리에 멈춰 서서, 의자를 짚고 숨을 골랐다. 앞이 보이게 되었어도, 워낙 침대 생활을 오래 한 까닭에 아직 걷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듯했다.

“자기를 가두고 있던 서쪽 창고가 무너졌으니 아페티트는 도망쳤을 겁니다. 마을을 벗어날 수는 없으니 아마 숲속이나, 빈 오두막에 숨어 있겠지요.”

“카이라트. 어떻게 아페티트가 무사하다고 확신하는 거예요?”

“제 눈에서 이것이 빠졌으니까요.”

카이라트는 가느다란 무언가를 들어 보였다. 선명한 핏빛 머리카락. 아페티트의 머리카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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