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사비나는 희미한 등잔을 조금 더 가까이 끌어와 에르잔의 모습을 비추었다. 불빛 때문에 잠을 깨워서는 안 된다는 것보다도, 에르잔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태양처럼 빛나던 금발은 재투성이가 되어 무슨 색인지 알아보기도 어려웠고, 피부도 얼룩덜룩했다.
‘어떻게 해…… 온몸에 성한 곳이 하나도 없어.’
사비나의 옷은 까맣게 타들어 가서 누더기가 되었을지언정 얼굴과 팔다리는 깨끗했다. 나자예프가 닦아 주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비나는, 에르잔이 이렇게 상처투성이가 되도록 자신을 감싸 주었는데 홀로 멀쩡하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꼈다.
사비나는 기도실에 놓여 있던 물수건을 가져와, 에르잔의 얼굴과 몸을 닦기 시작했다. 다행히 머리카락은 끝이 그을렸을 뿐 아주 타 버린 건 아닌 듯했다. 넓은 등에 난 상처를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해서 옆구리와 허리 아랫부분을 닦은 사비나는, 그의 바지를 벗겨도 될까 잠시 고민하다가 팔을 먼저 닦아 주기로 했다. 단단한 어깨와 두꺼운 팔을 지나 뼈마디가 두드러진 손가락을 물수건으로 닦으면서, 사비나는 그의 커다란 손이 자신을 감싸 안았을 때를 떠올렸다.
폭발을 피하기 위한 반사적인 행동이었음에도, 에르잔은 사비나를 깔아 누르지 않도록 팔꿈치로 바닥을 디디고 그녀를 제 품속에 숨겼다. 완벽하게 배려하기는 어려웠던 까닭에 다소 무게감은 느꼈지만 압박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 돌발 상황에서도 에르잔은 사비나가 그의 커다란 몸에 짓눌리지 않도록 배려해 주었다. 아니, 배려보다는 본능에 가까울까.
사비나를 지켜야 한다는 호위기사로서의 본능이 에르잔을 움직였을 것이다.
“왜 그랬어요?”
사비나는 잠든 에르잔을 향해 조용히 물었다.
“나는 죽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왜…….”
목을 베여도, 심장을 찔려도, 물에 빠져도 땅속에 묻혀도 사비나는 죽지 않는다. 15년 동안 번번이 자살 시도를 해 온 사비나는 어떻게 해도 자신이 죽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했다.
그러나 이런 저주스러운 체질이라도 좋은 것은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다른 사람들의 저주를 흡수해서 그들을 구할 수 있다는 것.
다른 하나는 죽을 위험이 없어 에르잔이 그녀를 보호하느라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
“에르잔이 감싸지 않았어도 나는 안 죽었을 거예요. 다쳐도, 화상을 입어도, 금방 낫는단 말이에요. 당신이랑은 달리.”
겨우 그쳤던 눈물이 다시 퐁퐁 샘솟아, 사비나는 훌쩍거리며 침대에 머리를 기댔다. 아직 물기가 남아 있는 에르잔의 커다란 손을 조심스럽게 끌어당기고는, 단단한 손바닥에 뺨을 문질렀다. 그의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온기를 확인하려는 듯이, 조심스럽게 손바닥에 숨을 불어넣었다가, 입술을 비비다가, 혀를 내밀어 가볍게 핥았다.
“……읏…….”
손바닥을 간지럽히는 감촉에 잠이 깼는지, 에르잔이 긁힌 신음을 냈다. 사비나는 움찔 굳었다가, 용기를 내서 에르잔의 손을 꽉 부여잡았다. 그 감각에 에르잔의 닫힌 눈꺼풀이 올라가고, 유일하게 불에 그을리지 않은 푸른 눈동자가 드러났다.
“사비나, 아가씨…….”
“에르잔. 움직이면 안 돼요. 당신 등에 상처가 났으니까. 나자예프랑…… 바르셀다가 로스카옌 신부님을 찾으러 나갔어요.”
“무사하셨군요…….”
나자예프로부터 무사하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이렇게 눈으로 보니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네나뷔스테의 증오의 핵을 흡수할 때도, 바르셀다의 분노의 핵을 흡수할 때도, 에르잔은 부상 하나 입지 않았다. 매번 사비나만 상처를 입고는 했다.
에르잔은 그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호위기사인 주제에 혼자만 멀쩡하고 제 주군은 피투성이가 되는 걸 막지 못했다는 사실이 바늘을 삼킨 것처럼 목을 찔러 댔다.
“다행입니다…….”
사비나를 구하고 자신이 상처를 입은 것은 처음이었다.
처음으로 호위기사다운 일을 했다.
겨우 안도하는 에르잔과는 달리, 사비나는 그의 대답에 울음을 터뜨렸다.
“에르잔이 이렇게 다쳤는데, 뭐가 다행이에요?”
“저는…… 괜찮습니다.”
“에르잔, 다쳤잖아요. 등에서 피가 이렇게 나는데…… 피부도 여기저기 화상을 입어서 빨갛게 됐단 말이에요.”
의식이 돌아오니 다시 등이 불타는 듯이 쓰라렸다. 에르잔은 사비나 앞에서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깊이 숨을 내쉬고, 최대한 태연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목숨에 지장이 갈 정도는 아닙니다. 며칠이면 회복될 겁니다.”
상처가 아무는 데에는 최소한 2주는 더 걸리겠지만, 근육이 손상되지는 않았으니 지혈만 제대로 하면 며칠 후에는 몸을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사비나 아가씨. 오딜의 말대로, 북쪽에 있는 저주의 핵을 흡수하는 건 조금 미루는 것이 좋겠습니다. 제가 아가씨를 보필할 수 있게 될 때까지 조금만…….”
“움직일 수 있게 되면, 또 다치려고요?”
사비나가 날카롭게 물었다. 두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고, 목소리가 흠뻑 젖어있음에도 그녀는 입술을 파르르 떨면서 에르잔의 손을 꽉 부여잡았다. 그의 피부에 손톱자국이 날 정도로.
“왜, 왜 나를 감쌌어요? 폭발이 더 컸으면 에르잔이…… 더 크게 다쳤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고요.”
차마 죽음을 입에 담는 것도 두려워, 사비나는 말을 골라 대답했으나 떨리는 몸만은 주체가 되지 않았다.
에르잔은 자신의 손등에 난 붉은 손톱자국을 내려다보았다. 떨리는 하얀 손가락이 애처로울 만큼 필사적으로 에르잔의 손을 부여잡고 있었다. 마치 그것이 생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래서일까. 붉게 손톱자국이 날 정도인데도 묘하게 아프다는 느낌은 없었다.
“사비나 아가씨를 지키고 싶었습니다.”
“에르잔이 더, 더 다치면…… 잘못되면…… 나를 못 지키잖아요. 그렇게 되면 어쩌려고 그랬어요?”
어려서부터 몸 하나는 튼튼하다는 소리를 듣고 자라 왔다. 어지간한 장정들도 나가떨어지는 고된 훈련을 받으면서도 에르잔은 별달리 힘들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체구가 크고 힘이 좋고, 건강하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으므로 에르잔은 제 몸에 불만을 가진 적이 없었다.
황궁 기사단에 입단하고, 신체검사에서 부적합 판정을 받기 전까지는.
“늘 아가씨께서 상처를 입으셨지 않습니까. 저도 아가씨를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런 거 알려 달라고 한 적 없어요!”
사비나는 원망스러운 듯이 소리치며 에르잔의 손을 내쳤다. 나자예프의 흰 로브를 걸친 어깨가 들썩들썩하더니, 사비나는 뭐라고 말을 잇지도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어린애처럼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세상을 다 잃은 것처럼 목청껏 울어 대는 사비나의 모습에 에르잔은 당황하는 한편, 이상하게 가슴이 울렁거렸다.
“사비나 아가씨. 울지 마십시오…….”
“에르잔 때문이잖아요!”
눈물 때문에 헐떡거리면서도 앙칼지게 쏘아붙이는 음성에, 에르잔은 어째서인지 미안함이 아니라 애틋함을 느꼈다.
사비나가 상처 입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우는 일은 없기를 바랐다. 아주 안전하게 보호하고,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제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그런데.
“저 때문에…… 우시는 겁니까?”
사비나가 자신 때문에 눈물을 흘린다는 사실이, 묘하게 기뻤다.
알 수 없는 일이다. 지켜야 할, 소중한 대상이 슬퍼서 울고 있다면 마음이 아파야 정상인데, 어째서 뿌듯하고 기쁜 마음이 드는 것일까. 사실은 등이 아니라 머리를 다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가슴이 벅차올라, 에르잔은 웃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입안을 깨물었다.
“사비나 아가씨. 더 가까이 와 주십시오.”
“……왜요?”
“아가씨의 얼굴을 보고 싶습니다.”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녀의 감정을 움직이는 것이 자신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물기 어린 검은 눈동자에 제 얼굴이 비치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처음으로 느끼는 욕망이었다. 에르잔이 눈을 깜박이며 입술을 움찔거리자, 사비나는 훌쩍, 울음을 삼키고는 에르잔에게 가까이 다가가 고개를 기울여 입을 맞추었다.
에르잔이 엎드린 채로 고개만 돌리고 있는 까닭에 제대로 키스할 수는 없었지만, 입술을 맞댄 것만으로 한층 진정이 되는 느낌이었다. 에르잔은 천천히 왼손을 들어 올려, 눈물 가득한 사비나의 뺨을 감쌌다.
이번에는 그녀도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사비나 아가씨.”
“뭐가요?”
사비나가 울고 있는데, 슬픔이 아니라 기쁨을 느낀다는 사실이 죄스러웠다. 가슴 안에서 몽글몽글한 감정이 차오르는 것이 기분 좋은 한편, 그녀를 울렸다는 사실에 죄책감이 가시처럼 가슴을 찔러 댔다.
그런데도 마냥 좋기만 했다.
“이제까지 누구도 저를 걱정한 적이 없었습니다.”
크고 강인하고 튼튼하고, 가벼운 감기 한 번 앓아 본 적 없는 에르잔을 걱정하는 사람을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이 저주받은 마을에서조차 에르잔은 정화 체질인 까닭에 저주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로스카옌도, 나자예프도, 오딜도, 누구도 에르잔을 걱정하지 않았다.
그를 걱정하는 건 사비나뿐이었다.
처음 받아 보는 걱정이, 관심이, 눈물이 나올 정도로 따스했다.
어째서일까. 그녀가 자신을 걱정한다는 건 미덥지 못하다는 뜻이니 자존심이 상해야 할 터인데.
조금도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아가씨께서 저를 걱정해 주시는 게, 기쁘고 감격스럽습니다.”
“…….”
“죄송합니다. 하지만 아가씨께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호위기사인 주제에 부상을 입어 놓고 주군의 걱정을 받으며 기뻐하다니, 제가 생각해도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싶을 정도다.
그런데도 에르잔은 기뻤다. 감격스러웠다. 그리고 행복했다.
사비나가 에르잔을 걱정하고,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린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가슴이 벅차올라서 견딜 수가 없었다.
몸을 움직일 수만 있었더라면, 당장이라도 일어나 그녀를 끌어안았을 것이다.
“나를 울리는 게 좋아요?”
“아가씨의 감정을 움직이는 게 저라서 좋습니다.”
“내가 화를 내도?”
“아가씨의 감정이 향하는 곳이 저라면 좋습니다.”
화를 내도 짜증을 내도 패악을 부려도 뭐라도 좋다. 사비나의 감정이 자신을 향하길 바란다.
처음 몸을 겹쳤던 날처럼,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텅 빈 눈동자를 마주하며 느꼈던 상실감은 다시 맛보고 싶지 않다.
에르잔이 사비나를 바라보는 것처럼, 사비나도 에르잔을 바라보기를.
그녀의 눈앞에 있는 남자가 누구인지 확실히 알아주기를.
“모르겠어요. 에르잔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죄송합니다, 아가씨. 저도 모르겠습니다.”
모르겠다. 이해할 수도 없다. 그런데도 그저 기쁘고 좋다. 등가죽이 벗겨져 피가 흐르는 부상을 입고도 기뻐할 수 있다니 역시 자신은 미친 것이 아닐까.
“그런데도 좋습니다. 진심으로…….”
당신을 좋아합니다.
입안에 맴도는 말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몰랐던 에르잔은, 끝내 고백하지 못한 채 손끝으로 사비나의 입술을 더듬었다.
다시금 촉촉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 들어 올리느라 자세는 불편했지만, 그녀를 느낄 수 있다면 이 정도 불편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