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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 속의 불-93화 (93/189)

93화

목 안에 불길이 이는 것처럼 뜨거웠다. 크게 숨을 들이쉬어 찬 공기를 마시고 싶은데, 호흡마저 뜻대로 되질 않는다. 불에 덴 듯이 뜨거운데도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고통에 사비나는 괴로운 듯 미간을 찌푸렸다. 이마에 축축하고 서늘한 무언가가 얹어졌지만, 그 시원함에 안도하기도 전에 다시 치솟는 열기에 휩싸였다.

“읏……!”

어둠 속에서 타오르는 붉은 화염. 피처럼 붉은 그림자가 어른거리며 사비나를 향해 뻗어 왔다. 사비나는 그 손길을 피하려 했으나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다가오지 마!’

입을 제대로 벌릴 수조차 없는데, 사비나가 속으로 외친 것을 알아들은 듯 피 묻은 손이 우뚝 멈추었다. 곧이어 뭔가 커다란 칼날 같은 것이 서늘한 소리를 내며 지나가더니 허공에 떠 있던 팔이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절단면에서 흐르는 것은 피가 아니라 검은 저주의 진액이었다.

‘대체 뭐지……?’

오싹한 감각이 온몸을 덮쳤다가, 다시 감각이 멀어지며 몽롱한 기분이 되었다. 숨이 턱 막혀 오던 갑갑함이 사라진 자리에 간질간질한 감각이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타오르던 불길은 어느새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이 되어, 사비나의 피부를 간지럽히고 있었다.

‘아페티트……?’

사비나가 속으로 이름을 부르자, 긴 털 뭉텅이였던 핏빛 머리카락 아래서 불쑥 얼굴이 솟아오르더니, 이내 나무뿌리가 자라듯 몸통이 생기고 팔다리가 돋아났다. 완전한 사람의 모습을 한 아페티트는 사비나에게 가까이 얼굴을 들이대며 미소 지었다.

“이번에는 장난이 지나치셨습니다, 나의 반려여. 아무리 사랑스러운 당신이라고 해도 넘어가 드릴 수 없는 것은 엄연히 존재하는 법이거든요.”

아페티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황금빛 눈동자 안에서 번뜩이는 욕망의 빛이 사비나를 향해 뿜어져 나왔다.

‘저리 가요!’

다급하게 밀어내듯 소리치자 아페티트의 모습이 흐려졌다. 저를 향해 찌를 듯이 다가오던 황금빛은 시간이 멈춘 것처럼 허공에 멈춰서더니, 이내 피시식 하는 연기와 함께 사라졌다.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는 거예요? 아페티트!’

이번에는 아페티트도 그녀의 외침에 대답하지 않았다. 어느새 아페티트의 모습도, 붉게 타오르던 불꽃도 사라졌다. 어둠뿐인 공간에서 사비나는 제 몸속을 간지럽히는 감각을 다스리려 몸을 비틀었다.

꼼짝도 할 수 없었던 팔다리에 힘이 돌아오고, 손가락이 움직였다.

사비나가 욕망의 핵을 흡수한 까닭에 아페티트를 제어할 수 있게 된 것일까? 아니면 이 또한 아페티트가 보여 주는 환각일까.

마치 모래 알갱이를 밟는 것처럼 서벅거리는 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려, 사비나는 고개를 털었다.

“그만, 싫어…….”

“미안! 싫었어?”

아페티트의 것과는 다른, 당혹감이 그대로 느껴지는 선명한 음성에 사비나가 반짝 눈을 떴다. 나자예프의 얼굴이 보였다. 나자예프 본인은 나름대로 차림새를 가다듬으려 했으나 머리는 여전히 산발을 한 채였다. 그는 사비나에게 사과하며 물수건을 정리했다. 아무래도 그녀의 얼굴을 닦아 주던 건 나자예프였던 모양이다.

“나자예프…….”

“깨어났을 때 내 이름을 첫 번째로 불러 주는 건 처음이네. 기분 좋은걸?”

“어떻게 된 거예요? 여긴…….”

상황을 파악하려 사비나가 상체를 일으키자, 덮개처럼 걸쳐져 있던 흰 로브가 흘러내리면서 찢어진 옷감 사이로 그녀의 흰 피부가 드러났다.

“아…….”

“헉, 나 아니야! 내가 한 거 아니야! 내가 태워 먹거나 찢은 거 절대 아니거든? 내가 발견했을 때부터 네 옷이 그 모양이었어!”

나자예프는 자신이 사비나가 잠든 사이 치한 짓을 하지 않았음을 격렬하게 주장했으나, 사비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불에 까맣게 그을린 옷을 보고서야 창고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린 까닭이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낯이 익은 풍경. 교회의 기도실이었다.

“나자예프! 에르잔은요?”

“에르잔은 바르셀다가 옮겼어. 지금은 원래 바르셀다가 있던 침실에 뒀는데…….”

나자예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비나가 벌떡 일어났다. 불에 탄 옷자락이 흘러내려 등이 그대로 다 드러났으나 사비나는 몸을 가리지 않았다. 맨발로 복도를 뛰어 로스카옌의 침실로 달려간 사비나는 문을 당겼다가 밀었다가, 열리지 않자 주먹으로 쾅쾅 두드렸다.

“문 열어요! 에르잔, 에르잔의 상태를 보게 해 주세요!”

“사비나. 문고리를 돌려야지.”

뒤따라온 나자예프가 문고리를 돌려 문을 열어 주자, 사비나는 안을 살피지도 않고 그대로 뛰어 들어갔다. 원래도 침대가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커다란 에르잔이 그 위에 엎드려 있으니 정말로 위태로워 보였다. 사비나는 침대 앞으로 다가가 에르잔을 불렀다.

“에르잔. 정신 차려요! 에르잔…….”

“사비나. 에르잔은 무사해. 잠든 것뿐이야.”

“이렇게 다쳤는데 어떻게 무사하다는 소리를 할 수가 있어요?”

에르잔의 넓은 등이 피투성이였다. 마치 맹수가 할퀸 것처럼 등가죽이 엉망진창으로 찢어진 끔찍한 모습에 사비나는 마치 제가 다친 것처럼 상처 입은 표정을 지었다. 그녀를 달래려다가 도리어 면박을 들은 나자예프는 할 말이 없어져 난감한 얼굴로 뒷목을 쓸었다.

“로스카옌이 부재중이라 제대로 치료를 할 수가 없었어. 일단 바르셀다에게 찾아보라고 내보내긴 했는데…….”

“바르셀다를요? 움직여도 되는 거예요?”

사비나는 바르셀다가 깨어났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내내 혼수상태였다고 들었는데, 하룻밤 사이에 일어나서 돌아다닐 수 있을 만큼 회복이 된 걸까? 사비나가 설명을 요구하는 눈으로 바라보자, 나자예프는 큼, 목을 가다듬더니 하얀 로브를 다시 사비나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걱정할 거 없어. 내 동생이라 그런지 튼튼하거든. 그러니까 다른 사람 걱정은 그만하고, 사비나. 너부터 좀 쉬도록 해.”

왜 이런 한밤중에 아페티트가 갇혀 있는 창고를 찾아갔는지,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자예프도 사비나에게 묻고 싶었으나 그녀의 상태가 제대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태는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비나의 안전>이 확보되었으므로 나머지는 별로 급하지 않았다. 바르셀다가 로스카옌을 언제 데려올지는 모르겠지만, 에르잔도 제법 튼튼하고 목숨이 질기니 죽지는 않을 터. 우선을 사비나를 쉬게 하는 것이 먼저였다.

“우선 나가자, 사비나. 너도 쉬어야지.”

“난 이곳에 있을 거예요.”

“사비나. 네가 거기 그렇게 서 있으면 에르잔이 편히 쉴 수 있겠어?”

“어차피 잠들어서 제 말도 못 듣는 상태잖아요? 뭐가 문제죠?”

사비나의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하지만 그것은 누군가를 공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궁지에 몰린 짐승이 이를 드러내며 예민하게 반응하는 쪽에 가까웠다. 나자예프에게 화를 내는 건 아니었지만, 자극해서 좋을 것이 없었다. 나자예프는 후우, 한숨을 쉬고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알았어. 그렇게 해야 안심이 된다면 좋을 대로 해.”

어차피 바르셀다가 곧 로스카옌을 데려올 테니 잠시 동안은 원하는 대로 하게 놔두는 게 좋을 것이다. 나자예프는 자리를 피할까 하다가, 어차피 교회 안에 아무도 없는데 혼자서 할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문가에 기대어 서 있었다.

침대맡에 몸을 바짝 들이대고 몸을 웅크린 사비나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에르잔이 나를 감싸느라 다쳤어요…….”

“에르잔이 감쌌으니까 그 정도에서 그친 거야. 아니었으면 사비나 너까지 크게 다쳤을걸.”

“나는 다쳐도 되지만, 에르잔은 아니잖아요.”

사비나의 목소리가 차츰 젖어 들더니 그녀가 훌쩍, 우는 소리가 들렸다.

“저기, 사비나? 우는 거야?”

“내가 제대로 대처했어야 했는데, 에르잔에게 너무 의지하는 바람에…….”

“사비나. 에르잔은 네 호위 기사잖아? 널 지키는 게 저 녀석의 일 아니었어?”

“에르잔은 약하잖아요!”

사비나가 훌쩍이며 내뱉은 말에 나자예프의 입이 떡 벌어졌다.

‘약하다니. 에르잔이?’

비교적 마른 편이긴 해도 상당히 훤칠한 나자예프도 한 손으로 들어 올려 휙 치워 버리는 괴력의 기사가 아닌가. 실전 경험이 모자라 오딜과의 정면 승부에서는 밀린 모양이지만, 에르잔의 힘과 튼튼한 육체만큼은 오딜도 흠을 잡지 못했다.

그런데 사비나는 정말로, 자신이 지키지 못한 연약한 존재를 앞에 둔 것처럼 눈물을 흘리며 침대 시트를 부여잡았다.

“나는 아니지만, 그렇지만…… 에르잔은 평범한 사람이잖아요. 다치면 아플 텐데…….”

사비나는 죽지 않지만, 에르잔은 죽을 수 있다.

사비나는 아무리 다쳐도 금방 낫지만, 에르잔은 회복이 더딜 것이다. 덧나거나 후유증이 남을지도 모른다.

“내가 막았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해서…… 나 때문에 에르잔이 다쳤어…….”

코를 훌쩍이며 침대 시트에 얼굴을 묻는 사비나를 바라보며, 나자예프는 사비나의 말을 부정해야 할지 입을 다물어야 할지 여기서 나가야 할지 알 수가 없어 혼란해했다.

다만 그녀가 에르잔을 바라보는 눈가에 눈물이 가득한 것이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가 다쳤을 때는 저렇게 울어 주지 않았으면서, 나자예프보다 훨씬 강하고 튼튼한 에르잔이 다치니 어째서 저런 얼굴을 하는 걸까.

‘에르잔은 이 마을 사람이 아니니까, 나나 바르셀다처럼 회복이 빠르지야 않겠지만…….’

그래도 역시 뭔가 이상했다. 단순히 어이가 없다기보다는, 서운한 감정에 가까웠다.

“로스카옌이 멀리 나갔나 봐. 나도 찾으러 나가 볼게.”

나자예프는 석연치 않은 감정이 울컥울컥 올라오는 것을 꾹 눌러 참으며, 아무렇지 않은 듯 고하고는 방을 빠져나왔다.

늪 속의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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