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어두운 숲길을 헤치고 달려가는 것은 익숙했지만, 나자예프는 저주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15년 동안 동생인 바르셀다를 방패 삼아 저주를 피하고 있던 탓일까. 오딜이나 네나뷔스테, 카밀라라면 전혀 힘들지 않았을 습습하고 무거운 공기가 폐를 가득 채우는 느낌에 숨이 턱 막혀 와, 몇 번 발을 헛디뎠다.
“어휴, 다리가 긴 게 이럴 때는 나쁘다니까…….”
농담이라도 하지 않으면 불안함을 감출 수 없는 탓인지, 나자예프는 애써 큼, 목을 가다듬으며 제 발치에 거치적거리는 나무뿌리를 발로 찼다. 단단하게 땅을 감싸고 있는 나무뿌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으므로 결과적으로는 제 발만 아플 뿐이었지만, 눈물이 찔끔 나올 만한 통증 덕분에 두려움은 조금 가셨다.
나자예프는 숲을 빠져나와, 거무죽죽한 실루엣으로만 보이는 풍경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윤곽이 드러난 창고를 알아보고는 안도했다.
시력이 완전히 돌아온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 방향을 가늠하고 뛰어다닐 만큼은 되었다.
서쪽 창고와 교회의 거리는 그렇게 멀지 않지만, 교회 쪽에서 바로 보이지 않도록 창이 나지 않은 방향에 지어 놓은 까닭에 폐가처럼 어두웠다. 차라리 진짜 아무것도 없는 폐가라면 다가가는 것이 무섭지 않을 테지만, 저 안에 아페티트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다가가는 것이 께름칙했다.
‘아니, 잠깐. 사비나랑 에르잔이 꼭 아페티트를 만나러 왔다고는 볼 수 없잖아? 로스카옌을 만나러 간 거라면 교회로 바로 들어갔을지도 모르고…….’
두려움에 움츠러드는 제 꼴같잖은 모습을 필사적으로 변명하듯, 나자예프는 불안한 예감을 애써 누르며 교회 쪽을 바라보았다.
만약 사비나와 에르잔이 찾아갔다면 창 너머로 불빛이 비쳐야 하는데, 불빛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로스카옌이라도 밤새 기도를 올리고 있었더라면 미사실에 불빛이 들어왔을 터인데.
“아, 정말 왜들 이러는 거야? 사람 불안하게……!”
나자예프는 불이 꺼진 교회와, 으스스한 분위기가 감도는 창고를 번갈아 바라보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손바닥 가득히 땀이 배어 나오는데 목덜미와 어깨는 서늘한 바람을 맞은 것처럼 부르르 떨렸다. 달이 제법 서쪽으로 기운 덕분일까, 윤곽밖에 보이지 않았던 낡은 창고의 외벽이 조금씩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삐죽삐죽 비어져 나온 나무판자 틈으로 핏자국이 가득했다. 어찌나 격렬하게 저항했는지, 안에서 냈을 손자국이 바깥에서도 보일 지경이었다. 검은 손자국. 15년 전 찍혔을 당시에는 피로 가득해 빨갛게 보였을 손자국과 칼로 벤 건지 도끼를 휘두른 건지 모를 혼잡한 흠집이 마치 가시덩굴처럼 외벽을 감싸고 있었다.
본 적도 없는데 창고 안에서 일어났던 일이 무엇인지 상상할 수 있을 것 같아, 나자예프는 부르르 어깨를 떨고는 한 걸음 창고에 가까이 다가갔다. 불안한 예감이 꼭 밧줄의 형태를 이루어 그의 몸을 옥죄는 것처럼 걸음이 무거웠다.
나자에프는 속으로 욕을 하며 고개를 털었다.
“아니, 잠깐.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 보자…… 사비나가 여기 왔을 리가 없잖아?”
나자예프가 본 것은 사비나와 에르잔이 머무는 오두막이 비어 있었다는 것.
북쪽 숲을 통해 서쪽 교회로 가는 길에 에르잔이 남긴 듯한 정화의 흔적이 있었다는 것뿐이다.
사비나가 네나뷔스테로부터 <북쪽보다 먼저 서쪽에 있는 저주의 핵을 흡수하라>는 말을 들었긴 했지만, 그에 따르겠다고 확실히 결정한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아페티트를 먼저 만나기로 했다 치더라도 그날 밤에 곧바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움직인다는 건 이상했다.
한동안 눈이 안 보여서 불안해하다 보니 괜히 걱정하는 게 습관이 되어 버린 건 아닐까. 위험을 피하고 싶다는 생존본능과, 불안한 예감일수록 잘 맞아떨어진다는 확신 사이에서 나자예프는 방황했다.
‘사비나가 진짜로 저 안에 있다면 도우러 가야 하지만…… 없을 수도 있잖아. 그럼 내가 굳이 가만히 있는 아페티트를 들쑤셔서 좋을 게 없는데?’
안전한 곳에서는 허세를 부려도, 막상 위기의 순간에는 굳어 버리는 제가 한심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나자예프는 필사적이었다. 그는 위험한 것이 싫었다. 두려웠다. 저주의 영향을 받지 않던 예전이라면 모를까, 제물도 없이 타격을 그대로 받아야 하는 지금의 자신이 저 창고에 들어간다면 저주에 녹아 버릴지도 모른다.
오딜이나 카밀라, 네나뷔스테는 15년 동안 이 마을의 저주에 익숙해졌으니 다소 저주를 접하더라도 큰 타격이 없었지만, 나자예프 자신도 멀쩡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예전이라면 농담 삼아 입에 올렸을 아페티트의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마저 심장이 죄어들 정도로 두려웠다.
“그래. 진정, 진정하자. 일단 교회에 들어가서, 사비나가 왔는지 로스카옌에게 물어보는 거야. 없다면 그때 창고를 찾아가도 되는 거잖아? 내가 왜…….”
퍼엉!
필사적으로 현실을 부정하며 안전한 길을 찾으려던 생각은 창고 안에서 들린 폭발음에 의해 끊겨 버렸다. 부정하고 싶어도 제 귀에 들린 폭발음이 머릿속을 꽉 채워 그의 사고가 다른 방향으로 흐르도록 놔주질 않았다.
“사비나!”
가슴이 울렁거리는 불안감. 그의 희망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어둠 속에서 찾아 헤매던 빛에 다가간 순간, 그것이 훅 꺼져 버려 다시 어둠 속에 남겨질지도 모른다는 절망감이 땀에서 솟아올라 제 다리를 붙드는 것 같았다. 보이지 않는 손이 그의 다리를 붙잡고, 창고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만류하는 것 같았다.
나자예프는 저를 붙잡는 손길을 발로 퍽, 차 냈다. 저를 향해 기어오는 검은 손을 짓밟았다. 실제로 땅에서 손이 튀어나와 그를 붙들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말로 멈춰 서 버릴 것만 같았다.
창고 외벽에 가득한 검은 손자국이 점점 붉어졌다. 마치 지금 바로 새로운 피가 덧발라진 것처럼.
검은 칼자국에 새빨간 손자국. 어지럽게 흩어진 그 모습이 흡사 덩굴장미가 피어난 모습처럼 보인다고 하면, 다들 미친 사람 취급을 할까.
“알 게 뭐야, 어차피 지금도 미친놈 취급을 받는데!”
나자예프는 창고로 뛰어가, 사비나의 이름을 부르며 창고 문을 열어젖혔다.
***
“흡……!”
튀어 오른 핏방울이 사비나의 목에 달라붙었다. 아페티트의 <욕망의 핵>이 그녀의 목에 난 상처 틈으로 기어들어 오는 모습이, 흡사 상처 틈으로 벌레가 기어들어 가는 것처럼 보여 에르잔은 기겁했다.
“사비나 아가씨!”
“에르, 잔. 괜찮아요……!”
에르잔은 사비나를 붙잡고, 그녀의 목에 난 상처 안으로 기어들어 가는 검붉은 핏방울을 닦아 내려 했지만 사비나는 고개를 흔들며 에르잔을 피했다. 타닥. 타닥. 작은 폭발음을 일으키던 불씨가 한순간 늘어나는 듯했다가, 도로 사라졌다.
더불어 그녀의 목 안에 마치 불길이 이는 것처럼 뜨거운 기운이 가득 차올랐다. 입을 벌리면 소리가 아니라 연기가 뿜어져 나올 것 같아, 사비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우웁……!”
“사비나 아가씨,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차라리 제가 저것들을……!”
검은 덩어리로 뭉쳐진, 수상한 놈들을 베어 버리겠다고. 그렇게 말하려던 찰나, 꾸물거리던 검은 색의 덩어리가 눈처럼 녹아 바닥을 가득 채웠다.
마치 물이 증발하듯, 메마른 바닥을 흐르던 검은 진액이 퐁. 퐁. 물방울이 되어 솟아올랐다. 꼭 비눗방울을 부는 것처럼 허공을 부유하던 저주가 사비나를 향해 천천히 날아왔다.
사비나는 그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손을 내밀자, 그녀의 하얀 팔에 검은 진액이 덕지덕지 붙었다. 진물이 뚝뚝 흘러 떨어지는 듯했던 그것은 어느새 점성을 잃고, 그녀의 피부 위에 재처럼 까만 가루만 남기고 사라졌다. 사비나는 그 재가 바닥에 떨어지지 않도록 몸을 웅크렸다.
‘얼마나 흡수한 거지? 어지러워서 잘 보이지가 않아.’
아직도 환각을 보는 걸까. 아니면 일렁이는 불길 때문에 시야가 왜곡된 탓일까. 아페티트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데 창고 안의 열기는 점점 거세져만 갔다. 언젠가 에르잔이 고기요리를 하는 법 가운데 증기를 쐬어 익히는 방법도 있다고 그랬는데.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 이 창고 안에서 고기처럼 삶아질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 사비나는 가물가물한 시야를 어떻게든 정리하려 애쓰며 문을 찾았다.
에르잔을 내보내야 했다.
‘나는 죽지 않으니까 괜찮지만, 에르잔은 평범한 사람이니까…… 이런 곳에 오래 놔두면 안 돼. 에르잔을 내보내야 해.’
그녀가 고개를 내저으며 에르잔을 찾으려는 듯한 동작을, 도움을 요청하는 거라고 오해한 에르잔은 재빨리 달려가 사비나의 몸을 끌어안았다. 미처 그녀가 흡수하지 못한 잿더미가 두 사람의 몸 사이에서 금빛으로 부서졌다. 피부가 따끔따끔할 정도로 열기가 일었으나 창고 안이 워낙 뜨거운 까닭에 사비나는 에르잔이 그녀가 미처 다 흡수하지 못한 저주를 정화하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했다.
“사비나 아가씨, 괴로우십니까?”
“에르잔, 빨리…….”
당신은 여기서 오래 버틸 수 없으니까, 빨리 피해야 해요.
그렇게 말하려던 찰나, 바깥에서 나자예프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비나! 이 안에 있는 거야?”
처음부터 대답을 들을 생각이 없었는지, 아니면 너무 다급해서 말보다 손이 먼저 나간 것인지,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잠긴 문이 활짝 열렸다.
저주는 흡수할 수 있지만, 저주로 인해 일어난 불길은 사비나의 통제를 벗어났다. 사람이 견딜 수 없을 듯한 열기로 가득하던 창고 문이 활짝 열리며 바깥의 찬 공기가 쏟아져 들어오자, 바닥이 흔들리는 듯한 진동과 함께 창고가 무너져 내렸다.
“사비나 아가씨!”
“사비나!”
눈앞에서 불꽃이 튀고, 뭔가 크고 무거운 것이 제 몸을 덮치면서 다시 시야가 어둠으로 물들었다.
아페티트의 저주를 제대로 흡수했을까?
사비나는 마치 열기에 녹아 버린 눈사람처럼 제 몸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상상하며 눈을 감았다.
늪 속의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