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 속의 불-90화 (90/189)

90화

18. 구원받지 못한다 해도

“아우, 쓰라려…….”

나자예프는 왼쪽 손을 눈가에 대고 휘청거리면서 숲길을 걸었다. 네나뷔스테로부터 안구가 멀쩡하게 자리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일까, 낙엽 위에 누워 찬바람을 맞다 보니 어둠뿐이던 시야에 조잡한 균열이 가면서 깨진 유리 사이로 보이는 풍경처럼 조금씩 시력이 되돌아왔다.

그대로 몇 번 눈을 깜박깜박하고 나니 눈 안쪽이 시큰해지는 감각과 더불어 눈꺼풀이 오르내릴 때마다 쓰라린 감각이 그를 괴롭혔다. 나자예프는 엄살이 심했으나, 엄살도 보고 반응해 주는 사람이 있어야 부리는 보람이 있는 법이다. 오딜이 자리를 뜬 이상 나자예프의 편은 없었다. 들어달라고 비명을 질러 대 봐야 네나뷔스테로부터 날아오는 건 시끄럽다는 분노의 외침과 신발짝, 아니면 걸레, 그것도 아니면 발길질뿐일 것을 아는 나자예프는 혼자서 끙끙거리며 바닥을 구르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이 정도면…… 걸을 수 있지 않을까?"

아직 회복이 다 되지 않은 까닭에 왼쪽 눈은 보이지 않고, 오른쪽만 상이 겹쳐져 보인다. 찢어졌던 각막이 재생되는 걸까. 원근이 돌아오지 않은 데다 상까지 겹쳐 시야가 어지러웠으나 나자예프가 의지할 구석은 제 몸뚱어리 하나밖에 없다.

그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고는, 손으로 나무를 더듬어 가며 거리를 파악해 천천히 숲을 빠져나왔다.

어둡다고 생각했던 게 그저 나무가 빽빽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는지, 숲을 빠져나왔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와…… 평소에는 15분도 안 걸릴 거리를 이 고생을 해서 내려왔어…… 장하다, 나자예프!"

자신의 대견함에 감격한 것도 잠시, 나자예프는 아직 일그러진 시야 때문에 교회가 보이지 않는 것을 알아차리고 당황했다. 우선 교회로 돌아가야 로스카옌에게 먹을 것을 달라, 씻게 해 달라, 재워 달라고 빈대 붙을 수라도 있는데, 늘 다니던 길에 원근이 사라진 데다 날까지 어두우니 길을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나자예프는 숲길에 들어오기 전, 마지막으로 들렀던 사비나의 오두막을 찾았다. 불은 꺼져 있지만 아마도 근처에 가면 귀가 밝은 에르잔이 튀어나올 테니 교회까지 데려가 달라고 떼를 쓰면 어떻게 될 것이다. 여차하면 소란을 피워 사비나를 깨운 다음 그녀의 동정심을 사 하룻밤 묵어 갈 수도 있으니 모로 봐도 손해는 없는 계책이었다. 빈틈없이 완벽한 자신의 계획에 속으로 박수를 치며 나자예프는 오두막을 향해 걸어갔다.

에르잔이 사비나가 다니기 편하도록 길의 잡초를 전부 뽑고 자갈을 골라낸 덕분에, 나자예프는 원근이 잡히지 않는 눈으로도 무사히 사비나의 오두막까지 다가갈 수 있었다.

“조용하네…… 에르잔도 자나?”

에르잔이 기민하고 빠르긴 하지만 위험 요소가 없다고 판단하면 풀어지는 순간도 있을 것이다. 만약 에르잔이 깊이 잠들어 나자예프의 접근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상태라면 더욱 잘 되었다. 나자예프는 살금살금 헛간을 지나 사비나가 잠들어 있을 침실 쪽으로 다가갔다. 안으로 들어가서 엄한 짓을 하려는 건 아니다. 물론 그러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나자예프는 자기 나름대로 도리를 아는 남자였다. 사랑하는 여자에게 불한당 취급을 받고 싶지 않았던 나자예프는 사비나의 잠든 얼굴이나 구경할 생각으로 창가로 다가가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없었다.

정확히는, 침대며 테이블이며 의자며 불이 꺼진 등잔까지 보이는데, 나자예프가 가장 보고 싶어 하는 사비나만이 없었다.

이 허름한 오두막의 존재 가치는 <사비나가 머무는 곳>이라는 사실 하나뿐이므로, 사비나가 부재중이라면 집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표현할 만했다. 나자예프는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헛간으로 다가갔다.

방에 사비나가 없을 때 예견하긴 했지만, 헛간 안에도 인기척은 없다. 에르잔 역시 부재중이라는 뜻이다.

“이상하다. 이 시간이면 보통 잘 텐데…… 교회에 로스카옌을 만나러 갔나?”

더듬거리며 벽을 짚고 큰길가로 나온 나자예프는 한숨을 내쉬었다. 사비나가 머무는 오두막은 동쪽 첨탑에서 약간 떨어진 아래쪽에, 로스카옌이 머무는 교회는 서쪽 제일 끝이니 광장을 가로질러 정확히 반대편으로 걸어가면 된다는 것은 알지만, 시력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은 상태로는 광장에서 방향을 잃고 헤맬 가능성이 높았다. 나자예프는 뒷머리를 긁으며 고민하다가 고개를 털었다.

"어휴, 북쪽은 가기 싫은데…… 어쩔 수 없지."

동쪽 첨탑을 지나 북쪽 숲으로 난 길을 통해 돌아가면 서쪽 교회에 도착한다. 마을의 북쪽에 고인 기함할 만큼 무거운 체념의 기운을 가까이 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거리도 방향도 가늠하기 어려운 상태에서는 다른 방법이 없다. 나자예프는 음식 냄새를 쫓아 부엌으로 달려갔을 때처럼, 무거운 저주의 기운이 모인 방향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여기는 언제 와도 기분이 나쁘다니까. 하여튼 살아 있는 시체들만 모인 곳이라 그런가…….”

빽빽하게 들어선 나무 탓에 숲 너머의 마을은 보이지도 않지만, 나자예프는 숨쉬기가 답답할 만큼 무거운 공기를 들이마시는 게 고역이라는 듯 욕설을 내뱉었다.

그런데 문득, 시야의 한구석에 반짝이는 것이 들어왔다.

“응? 저게 뭐지?”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누군가 인위적으로 나뭇가지를 꺾어 낸 듯한 자리에 반짝이는 금빛이 고여 있었다. 타다 남은 불씨처럼 흔적만 남아 타닥거리는 소리를 내던 그것은 나자예프가 가까이서 들여다보자 제 역할을 다했다는 듯 슥, 숨이 꺼졌다.

‘이 황금색 불씨…… 설마 에르잔인가?’

나자예프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분명 숲에 들어올 때만 하더라도 북쪽 저주의 영향으로 공기가 무거웠는데, 유달리 이 부근만 숨쉬기 편안했다. 에르잔이 이 길로 지나간 걸까. 저주를 태우는 정화의 불꽃은 태울 대상이 소멸하면 저절로 꺼진다. 나뭇가지의 꺾인 부분에 반짝임이 남아 있었다면, 에르잔이 이곳을 지난 지는 오래지 않았다는 뜻이다.

“에르잔이 여길 지나갔나? 왜 이 길로 갔지? 걔들은 눈도 잘 보이니까 그냥 광장을 가로질러가거나 남쪽 큰길로 가면 될 텐데?”

나자예프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나 그의 의문에 답해 줄 이는 어차피 없었으므로, 나자예프는 다시금 심호흡을 하고는 조금 더 공기가 가벼운 방향을 찾아 나아갔다. 조잡하게 금이 가 있던 시야가 차츰 정리되고, 따갑고 시큰거리던 왼쪽 눈이 간질간질하기 시작했다. 비비고 싶은 충동을 꾹 눌러 참으며 나자예프는 입안을 깨물었다.

“이것도 에르잔 덕분인가? 지나간 자리가 자동으로 정화가 된다니 편리하네. 마을 광장에 토템으로 세워 놓고 공기청정기로 쓰고 싶다…….”

시답잖은 욕망을 중얼거리며 걸어가던 나자에프는, 문득 목 언저리로 다가오는 섬뜩한 기운을 느끼고 멈춰 섰다.

아버지가 다른 동생에게 제 몫의 저주를 뒤집어씌울 만큼 저주를 두려워하던 나자예프는 본능적으로 위험 요소를 감지할 수 있었다. 아직도 원근이 돌아오지 않은 시야지만, 보이는 풍경의 한중간에 미세하게 가로로 선이 그어진 것이 시야에 금이 간 때문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아챌 수 있었다.

제대로 살피지 않으면 눈치채지 못할 만큼 가느다랗지만, 그것은 영역 표시를 위해 둘러놓은 울타리나 마찬가지였다.

북쪽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만들어 놓은 아페티트의 경고 표시. 달빛 아래서는 모든 것이 푸른 빛이 도는 무채색에 가까운 풍경에서, 유달리 선명한 핏빛으로 보이는 것만 보아도 보통 수상한 게 아니다. 나자예프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가, 허리를 굽혀 낮은 자세로 가느다란 핏빛 선을 피해 지나갔다. 그것이 아페티트의 머리카락이라는 것까지는 알지 못했지만 위험하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아무 생각 없이 발을 내디뎠다간 목이 잘렸을 것이다.

“저건 이 근처에 다 둘려 있는 건가?”

나자예프는 뒤를 돌아보며 목 언저리를 쓰다듬었다. 괜히 불안한 기분이 들며 가슴 속이 술렁였다.

“에르잔이 사비나를 떼어 놓고 다닐 리가 없는데…….”

정화 능력이 있는 에르잔이야 저런 것쯤 태워버리고 지나갔을 테지만, 문제는 사비나였다.

에르잔의 정화 능력이 아무 때나 발현하지 않는 것처럼, 사비나의 저주를 흡수하는 능력 또한 자동으로 발휘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저 수상하고 섬뜩한 <선>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면, 사비나는 저것에 베여 상처를 입었을지도 모른다.

“아냐. 아닐 거야. 그래도 에르잔이 있는데…….”

나자예프가 사비나의 곁에 조금이라도 다가가려 하면 막아서는 거대한 장벽과도 같은 에르잔이 아닌가. 그녀를 지키지 못했을 리가 없다.

“아오, 젠장. 왜 이렇게 기분이 이상하지?”

시답잖은 농담과 장난질,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경박한 행동으로 무장한 탓에 보통은 알아차리기 어렵지만, 나자예프는 사실 겁이 무척 많은 타입이었다. 사서 걱정을 하는 나자예프의 머릿속에 떠올리기도 싫은 가정이 폭죽처럼 솟아올랐다가 터지고는 사라졌다.

“아냐. 아닐 거야. 네나뷔스테를 만난 게 오늘 낮인데, 쉬지도 않고 밤에 곧바로 아페티트한테 갈 리가 없잖아? 바르셀다 때처럼 도움받을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두근. 두근. 이상하게 울렁거리는 심장이 진정되질 않아 나자예프는 가슴을 쳤다가 켁, 하고 기침을 뱉었다. 어쩐지 코끝이 싸해지면서 피부의 솜털이 일어나는 듯한 느낌이 든다.

겁도 많고 걱정도 많은 나자예프가 가장 질색하는 것. 불길한 예감이다.

가만히 서서 주먹을 쥔 것만으로 가슴의 고동이 격렬해지며 손바닥에서 땀이 배어났다.

“젠장…… 기왕 예지능력이 있을 거면 좀 좋은 걸 알 수 있게 해 주든가!”

시야에 원근이 돌아왔다. 평면에 그려 놓은 그림 같았던 풍경에 입체감이 살아나자, 나자예프는 아페티트가 갇혀 있을 서쪽 창고를 향해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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