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분진이라고요?”
“아페티트의 욕망의 핵은 분진 형태로 흩어져 있어요, 그래서 이 창고에…… 아!”
사비나가 에르잔에게 가까이 다가가려던 순간, 그녀의 긴 옷자락이 벽에 마찰하면서 화르륵 불타올랐다.
무의식중에 그것을 떼어 내려던 사비나는, 에르잔이 강한 힘으로 옷자락을 움켜잡자 우뚝 굳었다. 타다닥. 작은 불씨가 튀는 소리가 들리더니, 사비나의 옷소매는 에르잔의 손안에서 새까만 재로 변해 버렸다.
“불이 붙은 옷자락을 바닥에 떨어뜨리면 위험합니다. 더 큰 폭발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기사 양성소에서 기본적으로 가르치는 무술 항목은 검술과 체술이 중심이지만, 그렇다고 다른 무기를 다루는 법을 배우지 않는 것은 아니다. 병사로서 화포를 다루는 방법이나 화약의 보관법, 돌발 사고 시의 대응도 깊이 있게는 아니지만 분명히 가르친다.
“가능하면 몸을 많이 움직이지 않으시는 게 좋습니다, 사비나 아가씨.”
“이 분진을 흡수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죠?”
가시라면 뽑으면 되고, 뱀이라면 삼키면 그만이지만. 분진은 대체 어떻게 흡수하면 되는 걸까.
물론 분진의 형태를 한 저주는 진짜 분진이 아니기에, 단순히 공기 중을 부유하는 게 아니라 저주가 모인 장소에 고인다.
사비나는 제 몸에 달라붙어 오는 저주의 미세한 흐름을 느낄 수 있었지만, 그녀가 알 수 있는 것은 딱 거기까지였다.
욕망의 저주는 사비나의 몸에 달라붙으면서도, 결코 그녀의 몸 안으로는 흡수되지 않는다. 마치 먼지나 꽃가루처럼 피부와 옷자락에 달라붙어 있을 뿐이다.
‘이걸 어떻게 흡수하지? 코와 입으로 들이켜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는데.’
사비나는 옷소매로 코를 감싸는 대신, 옷소매에 코를 대고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저주의 알갱이가 그녀의 몸속으로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으나, 동시에 연기까지 함께 들이마신 까닭에 기침이 나왔다. 콜록거리는 사비나가 넘어지거나 벽에 밀착했다가 불이 다시 붙지 않도록, 에르잔이 그녀의 어깨를 안아 주었다.
“사비나 아가씨,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에르잔은 괜찮아요?”
에르잔이 아무리 저주의 영향을 받지 않는 몸이라 하더라도, 저주를 들이마시지 않을 뿐 저주의 분진이 일으키는 폭발이나 연기에는 영향을 받는다. 사비나는 에르잔의 오른쪽 어깨 옷자락이 검에 타들어 간 것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것을 어떻게 오해했는지, 에르잔이 급히 그녀의 어깨에서 손을 떼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의 행동을 제한하고 제가 나서려던 것이 아니라…….”
“에르잔, 숨 쉬는 건 괜찮냐고요.”
“예?”
“연기가 나잖아요. 참기 힘들지 않아요?”
사비나의 질문에 에르잔이 아리송한 표정을 짓더니, 한발 늦게 이해했다는 듯이 코 밑을 슥, 비비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땀이 많이 나는 편이라 괜찮습니다.”
“네?”
“연기를 들이마시지 않기 위해서는 물에 적신 천으로 코를 감싸는 것이 제일입니다. 그것이 여의치 않다면 얼굴을 적시거나, 입가에 침을 바르는 정도로도 효과는 있습니다.”
“물……? 액체가 필요한 건가요?”
“예. 가벼워서 공기 중에 떠다니던 것들도, 물에 젖으면 날아다니지 못하게 되니까요.”
새나 날벌레의 날개가 젖으면 날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될까.
사비나의 피부와 옷에 들러붙은 저주의 가루는 분명 붙어 있지만 흡수할 수는 없다. 그녀가 움직이면 분진이 떨어지고, 털어 내면 나부끼며 공기 중에서 작은 불씨를 만들어 낸다.
‘하지만 내 피로 적시면 달라붙어서 꼼짝하지 못할 거야.’
사비나의 시선이 에르잔의 검으로 향했다. 시선을 내려 소매가 떨어져 흰 피부가 드러난 팔을 흘긋 보았다가, 다시 손을 올려 목 언저리를 문질렀다.
아페티트가 핥아 주었던 다리에 길게 상흔이 나 있었다. 따끔거리는 것을 보니 아직 완전히 아물지는 않은 모양이다.
“에르잔. 내 목을 그어서 피를 뿌리면 이 불길을 잠재울 수 있을 것 같은데…….”
“사비나 아가씨!”
무서운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사비나의 말에 에르잔이 기겁하며 만류했다. 그가 거절할 것을 알고 있었기에 사비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에르잔은 사비나를 다치게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네나뷔스테의 증오의 핵을 흡수할 때 목을 베이고, 바르셀다의 분노의 핵을 흡수할 때 팔을 다쳤을 때 에르잔의 반응이 어땠는지, 기억은 나지 않아도 들어서 알고 있다. 완전히 창백하게 질려서 넋이 나갔다고 나자예프가 말했던가.
사비나의 목을 그어 피를 뿌린다면 공기 중에 부유하는 욕망의 핵은 전부 그녀의 피에 들러붙어, 더는 날아다니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에르잔이 그렇게 놔두지는 않겠지.
“자르지만 않으면 괜찮아요. 목은 가볍게 베여도 피가 많이 흐르니까, 상처를 깊게 내지 않아도…….”
“절대로 안 됩니다. 제발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내 명령을 따르겠다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젠 나한테 명령을 하네요?”
“……제게도 양보할 수 없는 것은 있습니다.”
사비나의 안전. 그것만은 에르잔도 단념할 수 없다. 그녀의 의사를 거스르고 뜻에 반하여, 또다시 내쳐지게 된다고 하더라도 사비나를 위험에 처하게 할 수는 없다.
에르잔의 필사적인 얼굴을 마주한 사비나는 피식 웃었다.
“그렇게 대답할 것 같았어요.”
“사비나 아가씨……”
“그럼 에르잔 걸 조금 빌리는 건 괜찮은가요?”
에르잔의 피부를 칼로 베어, 그의 피로 불을 끄겠다는 소리일까? 에르잔은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비나의 몸에 상처가 나는 것보다는 차라리 제가 칼에 베이는 것이 낫다. 그녀를 지켜 내려면 검을 휘두르는 팔과 뛰는 두 다리는 무사해야 하니 옆구리를 베는 게 가장 효율적일까. 제 몸의 어디를 상처 내면 좋을지 고민하던 에르잔의 뺨을 사비나의 손이 감싸 왔다.
“사비나 아가씨?”
“입 벌려요.”
창고 안은 열기로 후끈했다. 한여름의 뙤약볕 아래서 한나절을 일하더라도 이보다 뜨겁지는 않을 것이다. 송골송골 맺힌 땀이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기도 전에 기화할 만큼 뜨거운 창고 안에서는 호흡조차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에르잔의 입술에 사비나의 입술이 맞닿아 오자 그 뜨겁고 갑갑하던 느낌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 숨을 쉬는 것도 잊어버린 에르잔의 입술을 빨아당긴 사비나는 그의 입안으로 혀를 밀어 넣어 혀 아래에 고인 타액을 훔쳐 냈다. 주위가 뜨거워서일까, 에르잔의 타액이 꿀처럼 달고 시원하게 느껴졌다. 사비나는 그것을 입안에 머금고 삼키지 않으려 고개를 숙인 다음, 에르잔의 가슴을 밀어냈다.
‘아페티트. 이리 와요.’
사비나가 본 <아페티트>는 단순히 환각으로 그녀의 감각을 조종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그는 그녀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것처럼 그녀가 부르면 가까워지고, 부정하면 멀어졌다.
사비나는 눈을 감고 다시금 속으로 아페티트를 불렀다.
‘나를 기다렸다면서요? 나한테 다가와요.’
입술조차 움직이지 않고 속으로 불렀음에도 어떻게 알아들은 건지, 귓전에 습한 한숨이 닿아 왔다.
“제 앞에서 당신의 개와 입을 맞추더니, 이번에는 또 저를 유혹하시는 겁니까? 당신의 욕망은 종잡을 수 없네요.”
아페티트가 후후 웃으며 사비나의 귓가를 핥았다. 사비나는 고개를 돌려 입술로 아페티트의 뺨을 더듬었다. 눈을 감고 있어도 그가 바로 옆에 달라붙어 있기에 얼굴의 위치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사랑스러운 나의 아가씨, 뭘 하시려는 겁니까?”
“당신과 키스하려고요.”
소리를 내서 말했을까? 아니면 속으로 생각만 했는데 아페티트의 환각에 의해 그것이 <들렸다>고 착각한 것일까.
눈을 감아 시야가 차단되었음에도 아페티트가 빙긋 웃는 모습이 그린 듯이 선명했다. 코끝에 걸리는 한숨은 달콤하고, 그녀의 입술에 맞닿아 오는 부드러운 점막의 감촉은 이곳의 열기를 단번에 잊게 해 줄 만큼 아찔했다.
사비나는 차츰 몽롱해지며 감각이 멀어지는 것을 애써 붙들고 있으려 노력하지 않았다. 다만 제게 입을 맞춰 오는 아페티트와 혀를 섞으며, 제가 머금고 있던 에르잔의 타액을 그의 입안으로 흘려 넣었다.
“흡…… 꺽!”
딸꾹질을 하려다 목이 멘 듯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사비나가 눈을 뜨자, 아페티트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부릅뜨고 제 얼굴을 더듬고 있었다.
그의 턱 아래가 녹아서 구멍이 뻥 뚫리고, 이어서 양 뺨과 목까지 금빛으로 타들어 가는 것이 보였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
분명 코 아래부터 목 언저리까지 전부 녹아버렸음에도, 아페티트의 당황한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역시 내 눈에 보이는 남자의 모습은 환상이구나.’
사비나가 가장 끔찍하게 여기는 것은 죽어 가는 사람을 마주하는 것.
그다음으로 싫어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다친 모습을 마주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턱과 목이 녹아 흘러 꺽꺽거리는 아페티트의 모습을 보는 것은 조금도 괴롭지 않았다.
제 눈에 보이는 남자가 환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환각에 불과할지라도 그것이 <저주>인 이상, 에르잔의 타액이 닿으면 정화된다는 사실이 신기해서일까.
툭. 투둑.
비에 젖은 종이에 구멍이 뚫리는 것처럼 아페티트의 구멍 난 피부 너머로 그의 목에서 가슴을 타고 배까지 금빛의 물길이 흐르는 것이 보였다.
사비나가 머금은 것은 겨우 한 모금이었는데, 그것만으로도 아페티트는 견딜 수 없을 만큼 타격을 입은 모양이었다.
“욕망의 핵을 내게 넘겨요, 아페티트. 안 그러면 당신은 죽을지도 몰라요.”
“……당신이 그런 식으로 죽음을 입에 담을 줄은 몰랐는데요.”
앞가슴이 다 무너져내려 뼈와 내장이 녹아 흐르는 것을 감추려는 듯, 아페티트가 몸을 수그리며 중얼거렸다. 아니, 수그린 것이 아니라 다리가 무너져 내린 거였다. 온몸이 형체를 유지하는 힘을 잃고 녹아내리는 아페티트의 모습은, 이제까지 사비나가 숱하게 죽여 왔던 <저주로 죽어 가는 인간>의 모습과 흡사했다.
사비나는 어쩐지 가슴 속이 싸늘하게 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저주로 생명을 빼앗는 모습과, 정화의 힘으로 저주를 없애는 모습이 이토록 흡사할 줄은 몰랐다.
그녀의 피로 저주를 흡수하고, 에르잔의 정화의 불꽃에 타들어 가는 저주를 보면서도 몰랐다.
검은 꽃이 산산이 부서질 때는 느끼지 못했던, 저주의 뱀이 금빛으로 타들어 갈 때는 느끼지 못했던 갑갑하고도 무거운 감정이었다.
아페티트가 <인간>의 형태를 본떠 만든 저주, 사비나가 보고 있는 환각, <욕망의 핵>이 무너져 내리는 모습에 이상한 감정이 잃었다.
가엾거나 측은하다고 생각한 건 아니다. 사비나는 저도 모르게 혀를 깨물었다.
그녀의 입안에 비릿한 피가 고이기 시작한 것을 눈치챈 아페티트의 눈이 번뜩였다.
“좋습니다, 나의 반려여. 어차피 우리는 하나가 될 운명이었으니.”
완전히 몸이 무너져내려, 구불거리는 붉은 머리카락이 꼭 핏자국처럼 보일 만큼 바닥에 납작하게 가라앉았을 때, 그것은 진짜로 핏방울이 되어 확 튀어 올랐다.
늪 속의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