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에르잔에게는 저주가 통하지 않는다. 사비나가 죽음의 저주를 걸면, 그 어떤 주술사도 저주를 막아 낼 수 없었다. 흡수하거나,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도 불가능했다. 사비나의 저주는 그 어떤 주술보다도 강력했으니까.
그러나 에르잔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에르잔의 정화 체질이 얼마나 강한지는 몰라도, 사비나의 죽음의 저주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을 정도라면, 아페티트의 욕망의 저주에서도 자유롭지 않을까.
“진정하십시오, 사비나 아가씨. 괜찮습니다.”
“에르잔은, 괜찮은 거죠……?”
“저는 괜찮습니다.”
단호한 대답에 어지럽게 헝클어졌던 머릿속이 얼음물을 끼얹은 듯 명쾌해졌다. 시야가 맑아진 느낌이었다. 일렁이는 불길 탓에 주위의 모습은 일그러지고 연기 때문에 뿌옇게 되어 잘 분별도 가지 않는데, 지근거리에 있는 에르잔의 얼굴만은 똑똑하게 보였다.
‘저는 죽지 않습니다.’
사비나를 악몽에서 끌어 올려 준 단호한 대답.
그 말이 사비나로 하여금 희망을 갖게 했다.
“에르잔, 당신이…… 내 눈이 되어 주세요.”
“예?”
“나 지금 눈이 안 보여요.”
아페티트와 처음 마주했을 때부터. 아니, 네나뷔스테를 피해 달아나던 숲속에서 그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몽롱한 기분이었다. 뭔가에 홀린 느낌이라고 할까. 어쩌면 사비나는 죽 헛것을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에르잔이 말하는 <녀석들>이 누구를 말하는지 사비나는 모른다.
다만 아페티트의 머리카락이나 옷자락이 불에 전혀 타들어 가지 않는 것과, 머리가 반으로 갈라져 죽었는데도 다시 멀쩡히 그녀의 앞에 나타나 끌어안은 것, 에르잔이 나타나자 처음부터 이곳에는 없었다는 듯이 사라진 것까지.
자신과 에르잔은 같은 장소에서, 서로 다른 것을 보고 있다.
그렇다면 둘 다, 적어도 둘 중 하나는 <잘못된 것>을 보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사비나가 아페티트의 저주에 걸려 환각을 보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에르잔은 무엇을 보고 있을까?
“사비나 아가씨, 앞이 안 보이십니까?”
“제대로 보이는 게 없어요. 아니, 볼 수가 없어요.”
적어도 에르잔이 보고 있는 것은 환각이 아닌 진짜이기를. 그렇게 믿는 수밖에 없다.
“사비나 아가씨. 혹시…….”
“눈이 먼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나는 지금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어요.”
“예?”
“환각을 보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 에르잔이 대신 보고 알려 줘야 해요.”
사비나는 살짝 몸을 밀어 올려, 아직 불이 옮겨붙지 않은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매캐한 연기가 콧속으로 들어와 절로 기침이 나왔다.
기침이 나는 걸 보니 이 연기는 진짜일까?
아니면 기침을 한다고 감각을 조종하고 있는 걸까. 사비나가 다시 입을 크게 벌려 연기를 들이마시려 하자, 에르잔이 다급하게 만류했다.
“사비나 아가씨, 연기를 들이마시면 안 됩니다!”
“나는 괜찮…… 아니, 흡.”
에르잔의 만류에 사비나는 얼른 입과 코를 막았다.
에르잔이 만류하는 것으로 보아 이 연기는 환각이 아니다.
‘이 연기와 불길은 환각이 아니라 진짜인 거구나…….’
굴뚝에서 직통으로 연기를 들이마신다고 한들 사비나는 죽지 않지만, 지금 그녀가 불과 연기를 주의해야 하는 건 생존 때문이 아니었다. 아페티트가 보여 주는 환각과는 달리 이 불과 연기는 저주가 아닌 ‘현실’이다. 사비나는 재빨리 숨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온몸이 뜨거웠다. 창고 안의 온도가 올라가는 것이 느껴진다.
“뭘 머뭇거리시는 겁니까? 당신의 개를 데리고 얼른 빠져나가지 않으시고.”
바로 귀 옆에서 아페티트가 속삭였다. 나른한 음성이었다. 귓전에 닿는 한숨과 입술의 감촉까지 생생해, 어떻게 생각해도 그가 제 옆에 딱 달라붙어 말을 걸고 있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사비나는 눈을 뜨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것을, 귀에 들리는 것을, 피부에 닿는 것을 믿어서는 안 된다.
'내 감각을 믿지 말자. 에르잔을 믿는 거야.'
제대로 숨을 쉴 수 없어 속이 갑갑하고 불씨와 열기 때문에 피부가 따끔거렸으나, 사비나는 자신을 둘러싼 다른 모든 감각을 배제하기로 했다.
아페티트가 정말로 사비나보다 강한 저주의 화신이고, 아버지가 그와 그녀의 만남을 예측하고 있었다면.
아버지가 행동을 예측할 수 있는 사비나 자신이 아니라, 에르잔을 믿어야 이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다.
‘안 속아요, 아페티트.’
속으로 말을 건넨 것뿐인데, 정말로 그녀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바로 옆에서 귓가를 핥는 것 같았던 습한 감촉이 사라졌다.
사비나에게 말을 걸던 <아페티트>가 멀어졌다.
‘아페티트는 내게 환각을 보여 주고 있어.’
그리고 그 환각은 에르잔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기묘한 확신이 들었다.
“에르잔. 이 창고. 크기가 얼마나 되나요?”
“규모는 저희가 머물던 오두막과 비슷한…… 아니, 약간 더 비좁습니다.”
사비나가 처음 바깥에서 보았던 창고의 크기도 그 정도였다.
그렇다면 불타 무너지는 벽 너머로 보였던 또 다른 창고와 다른 방들은 분명 환각일 것이다.
“에르잔. 우리 두 사람 외에, 열 명이 더 있다고 했지요? 나머지는 어디에 있어요?”
쿵.
에르잔이 어깨로 받치고 있던 기둥을 떨어뜨리고, 사비나를 품으로 끌어들였다. 한 손은 사비나의 어깨를 안고, 한 손으로는 검을 거머쥐고 있었다.
에르잔은 꿀꺽, 마른 침을 삼켰다.
“지금은 중앙에 모여 있습니다. 불길 때문에 덩어리져 보여 열 명이 모두 뭉쳐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나요? 붉은 머리에 금색 눈을 한 남자가 있다면, 그 사람이 아페티트일 텐데.”
“……죄송합니다, 아가씨. 지금 상태로는 모습을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에르잔은 꾸물거리는 검은 덩어리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뒤에서 두 개의 팔이 튀어나오더니, 툭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뜯겨 나간 팔에서 흘러내리는 액체는 피가 아니었다. 검은 물. 아마도 저것이 사비나가 말하던 저주이리라.
“에르잔. 그럼 아페티트…… 아니, 저 사람들을 상대할 수 있겠어요?”
에르잔은 아직도 꾸물거리는 커다란 덩어리를 노려보았다. 불길 때문에 접근할 수 없는 건지, 아니면 단순히 기회를 넘보는 건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에르잔은 자신과 괴물 사이에 떨어진, 썩은 고기처럼 뜯겨 나간 거뭇한 팔을 검 끝으로 찔러 보았다. 그러자 그것은 금빛으로 불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제 힘으로 불태울 수는 있습니다.”
“그럼 이 불도 끌 수 있나요?”
에르잔은 검은 연기와 불씨를 내뿜는 불꽃을 바라보다가 검을 붕 휘둘렀다. 당연하게도 연기나 불길이 베이는 일은 없었다. 타다 만 작은 불씨 정도라면 모를까, 이 불을 에르잔의 힘으로 끄는 것은 무리였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제 힘으로는 무리입니다.”
“에르잔이 끌 수 없는 불이라는 거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제가 더 철저하게 대책을 세웠어야 했는데…….”
“아뇨. 덕분에 상황을 알겠어요.”
아페티트인지 그가 부리는 다른 저주의 일부인지는 몰라도, 그것은 에르잔의 정화의 힘으로 없앨 수 있다.
그러나 이 창고 안에 자욱한 연기나 불길은 에르잔의 힘으로는 없앨 수 없다.
그건 곧, 지금 이 불길과 연기 자체는 <저주>가 아니라는 뜻이다.
'아페티트가 품고 있는 욕망의 핵…… 그걸 찾아내야 해.'
네나뷔스테가 품고 있던 증오의 핵은 가시 바늘 모양이었고, 바르셀다가 품고 있던 분노의 핵은 뱀 모양이었다.
욕망의 핵은 어떤 모습일까.
'창고를 감싸고 있던 빨간 장미…… 욕망의 핵은 꽃 모양인 걸까?'
꽃에는 향기가 있고, 향 중에는 사람에게 환각을 보여 주는 것도 있다.
그렇다면 아페티트가 품고 있는 꽃 형태의 <핵>이 사비나로 하여금 환각을 보게 한다고 볼 수도 있었다.
“에르잔. 욕망의 핵은 꽃…… 향기인 것 같아요.”
“꽃향기요?”
“네. 감각을 둔하게 만들고, 환각을 보여 주는 종류의.”
“환각제라는 말씀이시군요. 하지만 이곳에 꽃 같은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밖에 자라고 있던 장미 덩굴이 본체가 아닐까 싶은데…….”
“없습니다.”
“네?”
불현듯 눈을 뜨고 고개를 들어 올린 사비나의 눈에, 난처해 보이는 에르잔의 표정이 보였다.
“사비나 아가씨. 이 창고 주위에는, 처음부터 풀 한 포기 나 있지 않았습니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럼 사비나가 본 빨간 장미 덩굴은 뭐란 말인가.
그 장미조차도 아페티트가 만들어 낸 환각이란 말인가?
“그럼…… 뭐가 나한테 환각을 보여 주고 있다는 거죠? 꽃이 아니면, 향수? 향료 같은 것이 있나요?”
“사비나 아가씨, 잠시…… 읏!”
사비나가 달려들 듯이 물어 오자, 에르잔은 검을 손에서 놓지 않은 채로 그녀의 몸을 추스르느라 발에 채는 기둥을 걷어찼다.
쿠르릉.
에르잔의 발길질에 옆으로 구르던 기둥이 불 속으로 다시 들어가자, 뭔가 팍 하고 튀어올랐다.
불꽃이 두 사람을 향해 날아왔다.
“사비나 아가씨, 자세를 낮추십시오!”
작은 폭발이었지만, 비좁은 공간에서는 그조차도 위협적이다. 에르잔은 움직이는 것이 더욱 어려워졌다.
“사비나 아가씨, 우선은 물러나야 할 것 같습니다. 언제 폭발이 일어날지 알 수가 없어서…….”
“폭발…… 아, 왜 그 생각을 못 했죠?”
“뭐가 말입니까?”
“에르잔! 분진이에요!”
분진.
많이 들이마시면 환각을 보고, 불을 쉽게 일으키고, 모이면 폭발을 일으키는 것.
‘욕망의 핵’은 꽃이 아니었다.
향기도 아니었다.
이곳에 연기를 피우고 불을 일으키며, 사비나에게 환각을 보게 하는 것.
이 작은 창고를 가득 채운, 분진이다.
늪 속의 불